제38화
제38화
80대의 천무린.
70대의 천무린.
60대의 천무린.
…….
20대의 천무린.
세대를 거듭하며 과거의 나를 구현하여 상상으로 대련에 임한다. 수많은 정파 무공으로 천마신공과 맞붙어 보지만.
지금으로선…… 모조리 필패.
제대로 된 검술을 펼쳐 보기도 전에 천마신검의 검격으로 막을 새도 없이 그대로 처절하게 분쇄된다.
단 한 번의 손짓에 와르르 무너지는 현재의 무위.
소림도, 무당도, 화산도, 개방도, 남궁세가도, 하북팽가도.
익히고 있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듯 잘근잘근 씹혀 버렸다.
그때의 난 당최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었기에.
흐흐, 자꾸만 웃음이…….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참.
정신을 차리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지금의 난 기로에 서 있다. 마인의 천무린이 아닌, 정도(正道)의 천무린으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누군가 두 번 살아 본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으나, 고민이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현재의 나는 천마 천무린이 아닌 사천무관의 천무린이다. 정도의 천무린이며, 정파 강호에 몸을 담은 천무린이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의 나는 그 과거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
고로 천마신공을 익힌 무신 시절의 나를 넘어서는 것, 그리고 정파의 무인으로서 무신의 무위를 회복하고 뛰어넘는 것이 첫째.
고작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현재 익히 안면이 있는 마교도를 만났을 때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을 정하는 것, 그렇게 내 정체성을 바로잡는 것이 둘째였다.
물론 둘째조차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마공도 익히지 못하는 몸.
마교에 찾아가서 ‘나 천무린이오!’ 했다가는 칼침 맞기 딱 좋았다. 그놈들 성격을 누가 다 버려 놨는데! 바로 나 천무린이지! 암!
비명횡사(非命橫死) 당하기 싫은 내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
‘거스를 필요가 없다, 운명을. 내게 주어진 운명이 천마 천무린이 아니라 정파 강호의 천무린이라면 거기에 순응해 움직이면 될 뿐.’
저승사자가 그랬지 않은가.
내가 일으킨 수많은 혈겁을 그리 비난하더니, 이토록 상반된 곳에 떡하니 환생시켜 버렸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지금은 잠잠하지만 이후에도 혈겁이 얼마나 그리고 몇 차례나 터질지.
그리고 그것은 내가 죄다 키워 놓은 놈들로부터 시작하겠지.
‘운명의 장난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운명의 장난일지라도 순리를 거스를 필욘 없지.’
폭풍우가 온다고 예측해도 그 폭풍우를 막을 수 있으랴.
천둥 번개가 친다는 것을 예측한다고 막을 수 있으랴.
그저 내게 큰 피해가 오지 않도록 진심을 다해 기도할 뿐.
이와 같이 순리를 역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내려놓고 받아들인다.
단지 그뿐이다. 그리하다 보면 언젠간 길이 보일 것이다.
짧은 생각을 마치고 조용히 고갤 내린다.
이제 8기 후보생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근력 훈련과 체력 훈련을 병행한다. 매일같이 훈련을 거듭하다 보니 슬슬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제법 많다.
특히, 백리후와 진무양, 명진과 낭소소는 한이라도 맺힌 사람처럼 훈련에 아주 진심이었다.
속가 제자라는 신분을 탈피하여 각 문파로 돌아갔을 때 제대로 인정받아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엿보인다.
이 네 사람뿐만 아니라 북해빙궁의 금지옥엽 설화린과, 종남파의 송무, 기린 상단의 태강, 청룡표국의 후송 역시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훈련에 매진한다.
“설 소저! 역시 내 그대를 잊을 수가 없소!”
남사익은 설화린에 대한 애정으로,
“후욱, 후욱. 쪽팔린 것보다 죽는 게 나아!”
황태는 자기가 괴롭혔던 놈들에게 해코지 당하지 않기 위해.
제각각의 이유로 훈련에 매진한다.
열심히들 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마음 한구석이 찡해진다.
아마 내가 키운 이 녀석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과거의 천무린이 그랬던 것처럼 혈겁을 막아 줄 버팀목이 될 것이며, 거대한 방파제가 되어 줄 것이다.
허허, 녀석들. 훈련 열심히 해라.
그러나…….
“언젠간 죽인다.”
어?
“기필코 죽인다.”
갑자기? 대체 누구를?
“필멸무린(必滅武麟).”
“난도무린(亂刀武麟).”
하하, 나구나. 나였구나.
“와신상담이라고 알지?”
으응, 잘 알지. 어떻게 해서든 날 죽이겠단 뜻 아냐……?
“10년이 걸려도, 20년이 걸려도 반드시.”
왜……?
“오체분시(五體分屍)라고 알지? 내 평생소원이야.”
오체분시까지?
당최 그렇게까지 살인멸구를 하고 싶은 건지. 나 원 참.
알 수가 없네.
알 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쏟아지는 살기의 장대비를 그저 웃어넘겼다.
내 마음이 그리 넓어졌냐고?
하하, 그럴 리가.
“다 들린다. 이놈들아. 조곤조곤 말하면 내가 못 알아먹을 줄 알고?”
뚜둑. 뚜둑.
손을 풀면서 위협적으로 후보생들을 바라본다.
그런데.
“하여간, 자기 욕하는 건 또 잘 들어요.”
“나였으면 귀를 도려냈을 거야. 매일 간지러울 텐데.”
설화린과 낭소소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천무린 한 달이면 언제 처맞을지도 알지.”
“또, 또. 때리려고 눈 부라리는 것 좀 봐.”
“지겹다, 지겨워.”
으잉? 뭐야.
백리후와 진무양, 명진이다.
“척하면 착이지. 이제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약한 게 죄지, 약한 게 죄야.”
송무와 태강이다.
하하, 다들 아주 친해졌네.
맞는 게 지겹다니,
지겨우면 안 되지.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어.”
그간 손속에 제한을 뒀더니 애들이 단체로 정신을 놔 버렸네.
그런 게 바로 동질감이라는 건가.
“내적 친밀감이 많이 생겼나 봐?”
후보생들이 단체로 나를 바라본다.
왜? 이제는 다같이 덤비면 해 볼 만할 거 같은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더니, 딱 그 모양 그 꼴이구먼.”
내 말에 후보생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진다.
“……뭐가 호의고 뭐가 권리인지?”
송무의 말에,
“정말 미친놈이었네요. 정말로.”
설화린이 화답한다.
하하, 내가 이런 놈들을 믿고 방파제니 버팀목이니 지껄인 건가.
믿었던 저 연놈들마저 저러하니, 나도 모르게 손등의 힘줄이 투둑 튀어나온다. 어, 관자놀이에도 핏발이 서네.
심장이 가열차게 두근거린다.
……어?
커억!
살기가 피어올랐나 보다, 나도 모르게.
금살(禁殺)의 금제가 발동했다.
……저승사자 개XX.
엄습하는 격통에 상체가 절로 숙어졌다. 절로 숨이 가빠 왔다.
여태 역근경에 몰두하고 살의를 내뿜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이 격통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온 혈관을 좀먹는 개미들이 단체로 혈관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 심장을 옥죄고, 머릿속을 수많은 바늘이 찔러 대는 고통은 제아무리 천무린이라도 도저히 버텨 낼 수 없었다.
어째 무공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격통도 그 강도가 심해진다고 느껴지는 것은 단지 착각일까.
“끄으윽.”
천지 분간도 안 되는 심해 속에 갇혀 호흡도 못 하고 있는 답답함이라고 할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격통에 순간 아찔함마저 느끼며 무릎 한쪽이 휘청거린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부들거린다.
‘제발…… 당의원으로!’
어지간히 눈치 있는 놈들이라면 내 상태를 보고 바로 당의원으로 데려가겠지?
그런데.
“……화가 많이 났나 본데? 자꾸 부들부들 떨어.”
“그, 그러니까 입 열지 마.”
“눈 마주치는 순간, 다 같이 조지는 거야. 다들 눈 깔아.”
그게 아니라고! 미친놈들아!
“아니, 근데 저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원래 강호는 힘 있는 자가 다 가지는 세상이라고 했다. 우리가 나갈 세상이 얼마나 험난하고 비정한지 몸소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아이고, 나 죽는다.
어느 놈 하나 나서서 내 상태를 살펴봐 주는 놈이 없네! 씨X럴!
바로 그때.
세 사람이 날아온다. 아니, 거의 날아오다시피 한다.
억지로 고갤 들어 보니 명진과 남사익, 황태였다.
하아, 뭐야.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감격이 몰려온다.
훈련할 때 가장 많이 팬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가장 빨리 내게 달려와 주다니.
나도 모르게 눈가가 찡해졌…….
“……거봐, 내가 지금이랬지?”
“진짜네?”
어?
“지금 부들거리기만 하지 못 움직이잖아.”
“왜 그러는 거지?”
“주화입마라도 걸린 거 아닐까?”
“너무 열 받게 하면 주화입마에 걸리는 거야?”
“그러니까 황태, 네 말은 지금은 쥐어 패도 우리를 못 건드린다는 거잖아?”
……X발, 그럼 그렇지.
내가 지금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여기서 쓰러진다면 후보생들에게 쌓아 놓은 나의 권위와 권력은.
내 말이 곧 법이라고 새겨 놓은 모든 상황은……!
아마 모두 무너지겠지.
……상상했는데 끔찍하다.
정말 끔찍했다.
절대로 쓰러질 수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 부들거리면서 고갤 든다. 때릴 테면 어서 때려 보라는 눈빛으로.
움찔.
흠칫하던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다.
“이거 맞아?”
명진의 말에 황태와 남사익이 서로를 바라본다.
“……쌓인 거 없냐?”
남사익의 말에 황태가 음울한 목소리로 이야길 꺼냈다.
“없을 리가. 어젠 나 씻고 나왔는데, 나한테서 냄새난다고 패더라.”
그 말에 남사익이 고갤 저으며 말을 덧붙인다.
“그건 약과지. 난 아까 밥 먹다가 입가에 뭘 묻혔다고 처맞았는데?”
남사익의 말에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황태가 헛웃음을 흘리는 명진에게 시선을 돌린다.
“명진이, 넌 왜?”
“……난 아까 쳐다보는 눈빛이 기분 나쁘다고.”
세 사람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금제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내 주변을 둘러싼 채, 켜켜이 쌓여 있던 응어리들이 하나둘씩 풀어졌다.
듣는 내가 다 민망해질 정도로.
내가 그렇게까지 했다고?
에이, 사람 새끼라면…….
원래 가해자는 모르는 법이다.
‘자, 잠깐만!’
그럼 니들도 강해지든가! 이 새끼들아!
‘지금이라도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너희들한테 해코지 안 할게! 어? 절대로!’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내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나 너무 억울해서 안 되겠어. 몇 대라도 패자.”
“몇십 대로 돌려받을 텐데?”
“몇십 대가 아니라 몇백 대라도 지금은 패야 속이 후련할 거 같아.”
“그렇지? 어차피 또 맞을 건데.”
“이래 맞나 저래 맞나 어차피 똑같아.”
“밟아!”
그렇게 나는 밟혔다.
퍼억! 퍼억!
격통 때문에 그리 아프진 않았다.
이미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이거든.
근데.
왜 마음이 아프지?
X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