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제37화
극단적인 표현이 튀어나오려고 하자, 악교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번만큼은 꼭, 꼭.”
“꼭?”
“……우승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문득 7기 생도 교관들의 피가 마르는 심정을 느끼게 된 악교운이었다. 평생 안 느끼고 살 줄 알았건만.
……빌어먹을.
절로 욕지거리가 나오는 와중에 악교운의 어깨를 따뜻하게 다독거리는 손길.
고갤 돌려보니 빙긋 미소를 짓고 있는 당백진이 보인다.
“이래서 내가 악 교관을 신임하는 게 아니겠나. 하하하.”
벌써부터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치하한다.
“……저어, 그런데.”
“말하게.”
“대체 무얼 보고 8기가 승산이 있다고 보신 겁니까?”
그 말에 당백진은 턱을 쓰다듬는다.
“뭔가를 좀 봤거든.”
“어떤 것을 보셨다는 것인지…….”
그저 궁금했다. 7기는 안 되고 8기는 되는 이유가.
“지금 기수가 7기보다 나은 이유. 그거야 뻔하잖은가. 8기는 미운오리 새끼들이 많더구먼. 황야 속에 피어난 잡초 같은 놈들이 제 구실을 잘하지. 바로 자네처럼.”
8기 햇병아리들까지 죄다 내력을 꿰뚫고 있었던 건가. 역시 당백진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혀를 차던 악교운이 조심스레 묻는다.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는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네. 섭섭하게.”
섭섭하다는 표현을 어째서…… 이렇게 강대한 기운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악교운의 양어깨가 다시 한없이 무거워진다. 호흡조차 버거워질 만큼.
농 한마디라도 던졌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 기세다.
내력을 끌어올린 악교운은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 꺼냈다.
“……무시라니, 가당치 않, 쿨럭, 않습니다. 다만, 격무로 바쁘신 와중에 그리 파악하고 계신 게 너무도 신기하여 말씀드린 겁니다.”
그 말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운을 회수한 당백진은 입을 열었다.
“알 수밖에 없잖은가. 워낙 군소 방파 출신이 많은 데다 대문파 출신들도 죄다 속가 제자 출신들이니. 다들 잡초 같은 친구들이더군.”
……출신으로 그렇게까지 판단하는 당백진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반박할 자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말을 이어 가는 당백진이 자연스레 덧붙인다.
“거기다 친우라고 기껏 있는 북해빙궁주나 남해태양궁주 놈들이 얼마나 들쑤시고 갔는지 아는가? 지들 금지옥엽이니, 아들놈이니 뭐니 하며 아주 난리를 쳤단 말일세.”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당백진의 모습에 악교운이 침음을 삼켰다.
세상천지 누가 새외 삼궁주들을 이리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근데.”
“예, 말씀하십시오.”
“진짜로 이번에도 패배하면 다 같이 접시 물에…….”
감탄은커녕, 악교운은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질끈.
* * *
“끄응…….”
이놈의 사주팔자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꼬일 수 있을까.
악교운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그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천무린이었다.
“하하하하! 이놈들아! 그냥 다 뒈지자! 뒈져!”
이젠 그냥 자기 즐기자고 같은 동급생인 후보생들을 개 패듯이 패고 있었다.
마인 하나 잡으라고 괜히 말을 꺼냈다가 후보생들이 저 미친놈한테 질질 끌려 다니게 생겼다. 그렇다고 한들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위에선 8기 후보생들을 비무대회에 참가시키라고 하지 않는가.
오히려 이 천무린을 제대로 써먹어야 할 판이다.
왜 그런가 하면.
“뭐라고 했나, 고윤.”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미친놈이지만.”
우물쭈물하면서도 고윤이 눈을 질끈 감고 말을 한다.
“……타고났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재주를.”
“그게 무슨 말인가?”
고윤과 자겸을 따라 천무린의 훈련을 말없이 지켜본 결과, 악교운도 부교관들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부교관들은 8기 후보생들의 군기를 꽉 잡고 있는 천무린 덕에 훈련을 아주 편하게 진행했다고 말했다.
어디 그뿐이랴.
8기 후보생들은 하나같이 사천검법에 도가 튼 건지, 이젠 눈을 감고도 사천검법을 아주 능숙하게 펼친다.
게다가 군더더기도 하나 없고 검세에 담긴 힘까지 적절하다.
역대의 기수들을 돌아봐도 후보생 때부터 이만큼 완벽한 사천검법을 펼치는 기수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저놈 공로라는 건가.”
악교운의 침음에 두 부교관은 고개를 끄덕인다.
“참으로 대단하군. 참으로.”
“그렇……지요.”
“그런데.”
“예.”
“……인정하기 싫어지는 것은 내 속이 좀 꼬였다고 생각해야 할까?”
어쩌면 총교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그게 정상인 듯싶습니다. 총교관님.”
“당연지사입니다.”
고윤과 자겸은 이미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고갤 끄덕인다.
하하, 이미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했군그래.
그런데.
몇 걸음 걸어서 연무장에 나서는 순간,
“자! 총교관님 나오신다, 일동 정렬!”
그 말에 후보생들이 훈련을 받다 말고 냅다 정렬을 한다.
그 와중에 정중앙에 서서 히죽 웃고 있는 녀석.
생도가 되어야만 소대장 격으로 볼 수 있는 기장을 뽑지만, 이미 이놈은 후보생들을 휘어잡아 아주 기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교육을 시키면, 불과 한 달도 안 되어서 이렇게 후보생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까.
눈가에 총기 따윈 찾아볼 수도 없고 피부도 퍼석퍼석해져 이게 과연 꽃다운 17세의 후보생들이 맞나 싶다.
“말씀하십시오, 총교관님!”
말하는 놈의 얼굴을 바라본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헌앙한 모습에다 출렁이던 살덩어리를 모조리 성장판에 집중시킨 건지 아주 키도 훤칠해졌다.
거기다 갈무리된 기운을 얼핏 훑기만 해도 어지간한 부교관들과 엇비슷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젠 고윤과 비벼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상황인가.
고작 17세였다. 17세에 절정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다니.
천재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악교운은 모든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성장해 가는 이 괴물을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천무린이 펼치는 무공 또한 고절하기 짝이 없었다.
보고도 피할 수 없는 한 수는,
어떨 때는 강직하고.
또 어떨 때는 봄날처럼 부드럽다.
손속에 거침이 없다가도 한없이 자비로워졌고.
태산같이 굳건하면서도 나비의 날갯짓처럼 살랑거린다.
고윤과 자겸을 비롯한 부교관들은 천무린의 무공을 보고 그리 평가했다.
천무린은 애초에 자신이 익힌 무학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홀로 훈련을 할 때면 거침없이 무공들을 펼쳐 냈다.
무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누가 이 괴물을 키워 냈을까.’
당연하겠지만, 아무도 천무린이 혼자서 성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천무린의 무공은 무수한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한 수, 한 수가 명문이라고 불리는 산동악가의 진신절기와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악교운의 머릿속엔 당연히 천무린이 혼자서 저 수많은 무공을 익혔으리라는 생각은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너무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니까.
정파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거기인이나 차후에 있을 혈겁에 대비하기 위해 다수의 은거기인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비전절기를 작심하고 전수해 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조심스레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걱정이 앞선다.
“……이제 곧 자유 훈련 시간이 끝날 것이다. 대련 평가가 곧 이뤄질 참인데, 다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는 건가?”
“아유, 그럼요. 말도 마십쇼.”
“너한테만 물은 것이 아닌데.”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놈들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걸 어쩌겠습니까.”
후후, 후후후.
그래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히히.”
저 정신 나간 놈에게 내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 게.
악교운은 기가 차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 * *
환생한 뒤로 응어리졌던 것들이 차츰차츰 해소가 되어 간다.
각종 마공을 비롯하여 익힐 수 없는 천마신공에 대한 상실감.
살의를 함부로 일으킬 수도 없도록 의지를 제압해 버린 금제.
자신의 손발에 익숙하지 않던 정파 무림의 무공.
17세라는 어린놈들과 지내는 동심(?)의 세계까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이 시간이 흐르며 차츰차츰 익숙해져 간다.
심적인 부담감과 상실감을 털어 내면서 초심으로 돌아간다.
어휴, 이래서 사람은 가슴속에 뭘 담아 두고 있으면 안 된다니까?
전생에 내가 무슨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어린놈들이랑 붙여 놓았나 싶었는데, 이젠 죄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된다.
어디 그뿐이랴.
소림의 무공을 기반 삼아 탄탄해진 육체 위에 수많은 명문 정파의 무공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탑이 된다.
고작 씨앗에 불과하던 생명체가 태동하여 뿌리를 내리고 거목이 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한 번 거쳐 온 길, 비록 마공을 버려야 했지만 정도의 무공으로도 일로정진이 가능하게 된다.
거기다 익히는 무공들이 하나같이 초상승의 절기들.
단지 무학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마공이 아닌 정공으로 허기짐을 채워 가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아마 우화등선한 정파 출신의 신선들은 죄다 이 광경을 보고 저승사자에게 가서 따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흐, 어쩌겠냐.
천마신공 이후, 나른함과 무료함으로 가득하던 권태로움이 차츰 옅어지고 이젠 정도의 무공을 익히면서 이런 생각도 종종 하게 된다.
‘과연, 정도의 무공이 극의에 다다르면 천마신공도 깨뜨릴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과거의 천무린이 펼쳤던 천마신공은 극의에 이르러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짙은 혈향이 느껴지는 전장에서 펼치는 압도적인 진각, 천마군림보.
허공을 노니며 하늘 아래를 오시하게 만들어 주는 천마능공.
단 한 수에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주먹, 천마신권.
검격 한 번에 태산도 베어 버린 천마신검까지.
천마신공과 함께 펼쳤던 4가지의 무공으로는 단 한 번도 말이다.
……과거의 나는 정말 강했군. 후후후.
나 참, 이렇게 강했으니 감히 어떤 놈들이 내게 덤벼들었겠어.
자아도취에 빠져서 나도 모르게 미친놈처럼 크게 웃었다.
후보생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