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제36화
“재미난 아이가 들어왔다지? 악 교관.”
“들으셨습니까.”
“무관 내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던가? 혹 숨기고 싶었던 건은 아닐 테고.”
“그럴 리 있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즐거워 보여. 지난 몇 년간 자네에게서 보기 드문 모습이지. 아마 그 아해가 자넬 즐겁게 해 주는 모양이야.”
깊고도 울림이 있는 목소리. 그러면서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악교운의 양어깨를 짓눌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사천무관주 당백진.
중후한 인상에다 자칫 충혈된 것으로 보일 정도로 핏발이 선 눈빛은 무게감이 느껴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마주할 수 없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옥죄게 만드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니까.
“그래, 그 아이에게 마인에 대한 이야길 꺼냈다고?”
“……예. 마인을 생포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호, 마인 생포를? 이거, 악 교관의 눈에 제대로 든 모양이야. 내 그리 후보생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 일렀거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결코 그럴 리 없다고 같은 말을 반복할 셈인가 보군. 허허, 이 노부가 많이 늙은 모양이야. 악 교관이 이 늙은이를 무시하는 것 같아 서운하구먼그래.”
안개처럼 피어오른 기운이 스멀스멀 공간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꾸국. 꾸욱.
“크으으.”
“그 아이가 지금 그리 날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악 교관이 제법 편의를 봐주고 있음이 뻔히 보이는데 말일세. 정녕 나를 무시할 참인가?”
나긋하다 못해 나른한 목소리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라도 담겨 있는지 한마디, 한마디에 악교운의 무릎이 휘청거린다.
“……반드시 잡겠습니다.”
“반드시라.”
대답하는 악교운의 입가에 핏물이 한 줄기 흘렀다. 단지 기운을 정면으로 받은 것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터져 나오는 핏물이 입 안을 가득 메운 악교운이었지만, 금방 삼켜 내는 그였다.
그러나.
“크흐, 흐하하하!”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그는 여태 피어올린 기운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 손짓 한 번에 그 기운을 모두 회수하였다.
손사래 한 번에 공간을 지배하던 모든 기운이 일시에 사라지다니.
“간만에 자네를 보니 내가 즐거웠던 모양이야. 장난을 좀 치고 싶었던 게 조금 과했던 모양이야. 사실 그 아이가 뛰어놀든 뭘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겠나. 개의치 말게.”
……악교운의 손등에 힘줄이 한 줄기 튀어나오다 말고 사라졌다.
장난이라고?
여태 혼자 X랄 발광을 해 놓고 이제 와서 개의치 말라니.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또 그런 놈들을 좋아하지 않는가. 자네도 그렇고.”
그 말에 악교운은 몸에 들어간 힘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이지. 그딴 마인 졸개한테 신경 쓰지 말고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세. 이 노부의 자존심과도 직결된 일이란 말일세.”
늘 이런 식이다.
당백진은 더할 나위 없이 강한 인물이지만, 종잡을 수 없는 성격으로 인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악교운에게는 가장 어려운 상사이자 버거운 상대였다.
“……마인 생포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있고말고. 마인이라 해 봐야 고작 어린 아해에 불과하지 않은가. 안 그런가?”
당백진은 당씨 성을 가진 모든 인물들 중에서 현시대에 가장 강한 인물이다. 또한, 당씨 성뿐만 아니라 정파 강호 내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라면 딱히 아쉬울 것 하나 없을 듯하지만, 그는 삼대 무관 중 사천무관주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달성해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왜 우리 무관에선 비무대회 우승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지 의문이란 말일세.”
그 말에 악교운은 마치 못 볼꼴을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차마 건드려서는 안 될, 당백진의 역린(逆鱗)이었으니까.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 당백진의 무위는 현 무림맹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 그와, 야차라고 불리며 처세라고는 모르는 악교운이 입가에 피를 머금은 채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
바로 삼대 무관 비무대회.
올해 아직 개최되지 않은 비무대회를 제쳐 두고 횟수만 따져도 7년간 총 6회에 달한다.
생도가 된 이들이 펼치는 비무대회는 매년 열리는 연례행사에 불과하지만, 정파 강호에서는 가장 큰 화젯거리이다.
생각해 보라.
삼대 무관으로 정파 강호가 구분이 된 이 마당에 구파일방 대 오대세가의 세력 싸움을 누가 지켜보겠는가.
무엇을 기대하며 호사가들이 술맛을 느끼겠는가.
그간의 근간을 모두 뒤흔드는, 이 삼대 무관의 새로운 흐름에 따라 정파 무림에선 이제 이보다 관심이 집중되는 행사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무관의 연례행사를 매년 치르다 보니 죽어 나가는 것은 바로 교관들이었다.
대체로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생도들의 수준은 겨우 후보생을 면한 수준.
즉, 첫 해 생도들이 배운 무학인 사천검법과 사천심법으로 비무대회에 참여하게 되니 말이다.
1학년 생도들을 맞이한 교관들은 어떻게 해서든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윗선의 압박감에 시달리며 교육을 시켜야 하는 입장이다.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가르치다 보니 한 해에 이미 진이 다 빠져서 사천무관의 다른 부서로 이동시켜 달라는 요구가 폭주하는 것은 교관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건 윗선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느끼는 문제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재재작년에도 단 한 번도 우리 무관에서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지? 아마.”
단지 결과만 중요했다. 결과가 시원찮았기 때문에 1학년을 맡는 교관들에게 더더욱 압박을 가할 수밖에.
……조졌다. 이젠.
당백진이 이토록 대놓고 이야길 꺼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까.
“어제 말일세. 내 섬서와 산동의 관주 놈들을 만났지 뭔가. 무림맹에서 마주쳤는데 말일세. 허허, 그놈들이 내게 뭐라는지 아는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고 들으셨습니까.”
“보약. 보약이라더군.”
“예?”
“사천무관이 산동무관과 섬서무관에겐 보약이라고 하더라고. 하하하, 지들 몸보신을 시켜 주는 보약 말일세. 하하하하!”
……열 받을 만했다. 그랬네. 그랬어.
악교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 사천무관이 창설될 당시엔 사천당가를 주축으로 점창, 공동, 아미라는 대문파들이 중심이 되어 기대감을 한껏 모았다.
무려 구파일방에 속해 있는 4대 문파에다 오대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천당가의 결합은 무인들의 기대감을 일으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까.
그랬기에 위명이 높았고, 사천무관과 관련된 모든 문파와 가문들에 대하여 호사가들은 끊임없이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역시!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가 위협해도 너끈히 버티는 이유가 다 있었군그래!」
「버티다니, 이 사람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버티는 게 아니라 그놈들이 꼬랑지를 흔들며 무서워서 도망간 게지!」
「사천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걸세, 왜냐?」
「사천무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셈인가? 하하핫, 미래가 참으로 밝구먼!」
사천무관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당백진과 사천당가의 명성 또한 치솟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창설 이후, 지난 8년간.
“섬서랑 산동 따위에게 무려 7연패를 했다고? 후후후, 거기다 뭐? 보약. 크흐, 흐흐흐.”
가뜩이나 충혈된 눈빛은 더욱더 붉어졌다. 흡사 살귀의 눈이 이러할까 싶다.
“악 교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말이 안 됩니다.”
악교운은 말을 잘못 꺼내는 순간, 자신의 생명조차 위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백진의 피부를 통해 스멀스멀 기어 나온 기운이 고풍스러운 나무 탁자에 닿자, 그대로 연기처럼 산화해 버렸다.
은은하게 담겨 있는 독기가 탁자 모서리 부분을 그대로 먼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꿀꺽.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말이 안 된다고? 크흐흐하하하…….”
앙천대소를 터뜨리던 당백진이 갑자기 웃음을 뚝 하고 멈췄다.
“근데?”
“예?”
“근데 왜 패배하느냔 말일세.”
“…….”
“왜, 대체 왜! 대체…… 왜!”
사천무관의 연이은 패배에 대하여 당백진이 악교운에게 넋두리를 할 수도 있다. 그 정도 푸념은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나한테…….’
악교운은 후보생들의 총교관이지,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생도들을 책임지는 교관이 아니다.
‘내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인가.’
혹시 후보생 때 기초를 제대로 못 가르쳐서 이리된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인가.
“내가 왜 자꾸 자네에게 이런 헛소리를 해 대는지 아마 궁금하겠지?”
귀신이다.
“……아, 아닙니다.”
“내가 그리 실없이 막 내뱉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는가.”
예, 라고 당장 외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그럴 리 있겠습니까, 관주님.”
“그래그래, 날 그리 잘 이해해 주는 악 교관이니 내 이리 신뢰하며 말해 봄세.”
“무엇을 말씀입니까?”
어째 불안하다.
“이번 대회는 7기 생도의 차례겠지?”
“그렇습니다.”
“7기는 좀 불안하잖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7기는 황금 기수라고 불릴 만큼 속가 제자 하나 없는…….”
7기. 악교운에 의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서 생도가 된 인물들은 총 41명.
역대 기수들 중 가장 많은 인원이 후보생에서 생도로 진급하였다.
“그래서 불안하단 걸세. 자네가 제일 잘 알면서 왜 그러나.”
……당백진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알겠다.
7기는 황금 기수다. 그것도 역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재능을 가진 기수들이다.
거기다.
늘 잘 먹고, 부족함이라고는 없이 자라 온 7기는 각 문파에서도 아주 특출 나게 지원을 받아 온 기수다.
생도로 진급한 이들 역시 대다수가 대문파 출신의 전형적인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
그러나 당백진은 그들이 후보생에서 생도로 진급할 때부터 늘 부정적이었다.
“황금 기수? 배고픔을 모르는 놈들이 과연 악바리라는 근성이란 게 있겠나. 중요한 순간이 되면 여태 배운 것을 써먹기는 고사하고 바로 꼬랑지부터 내릴 것 같은 놈들인데.”
악교운은 억측이라고 주장했지만, 당백진은 반드시 그러리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악 교관, 내 자네를 무엇을 보고 받아들였는지 잊었나?”
악교운 역시 명문가 중 명문가인 산동악가의 후손으로서 부족함이라고는 모르고 떵떵거리며 잘 살아왔다. 마교의 손에 멸문지화를 당하기 전까지는.
그런 그가 밑바닥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는 동안 경험한 숱한 고난과 악에 받칠 수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적을 사천무관주인 당백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백진은 이리 말한다.
“그런 고행을 거친 적이 없는 온실 속 화초들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해.”
그런 말을 하는 당백진이 악교운은 되레 불안해진다.
“……설마?”
“7기 생도는 당연히 참가하고, 8기 후보생들도 동시에 올려 볼 생각이네.”
“에?”
얼토당토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악교운은 저도 모르게 ‘예’도 아닌 ‘에’로 반문을 하고 말았다.
처음 듣는 소리니까.
8기 후보생의 총책임자는 악교운인데, 이런 이야길 들으니 그저 황당할 수밖에.
“다 필요 없고.”
근데 악교운에게 그 어떤 말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당백진이었다.
“이번에도 지면 우리 다같이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는 악교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