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하지만 후보생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단체로 덮치는 것? 아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런 괴물 같은 놈을 무슨 수로 제압한단 말인가.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있었다.
뭐냐고?
여긴 사천무관이니까. 다름 아닌 학관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그런 기관에서 폭력을 기반으로 한 유혈 사태가 일어난다?
어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암 그렇고 말고.
“……정말로 할 거야? 사익아?”
군중의 힘을 등에 업은, 용기 있는 후보생은 바로 남사익이었다. 덩치도 있는 데다 남해태양궁이라는 아주 든든한 뒷배경을 지닌 남사익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은근 즐겼다.
실력으로?
아, 아니, 그건 아니지.
우리 선은 넘지 말자고. 하하.
백리후도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열양장은 씨알도 안 먹히는 마당에 어떻게 힘으로 저 악의 무리를 처단하겠는가.
하지만.
설화린이 눈에 밟힌다. 자꾸만 설화린의 시선이 저 괴물 놈에게 잡혀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구원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사내 남아는 그렇다. 안 될 걸 뻔히 알지만, 가끔 도전해야만 할 때가.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거기다.
우리에겐 구세주가 있다.
아직 구세주들이 지나갈 순간이 아니라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
그러는 와중에도,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지옥에서 올라온 염라대왕 같은 놈은 쉴 새 없었다.
백리후를 비롯한 진무양, 명진, 낭소소는 물론이거니와 설화린, 황태마저도 불평불만 없이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쉼 없이 구르고 있었다.
“야야! 팍 씨! 주먹을 뻗을 때 발끝에서부터 전신에 다 힘을 주는 멍청한 새끼들이 어딨어! 그렇게 느리고 멍청하게 뻗어 가지고 어느 놈이 맞아 주겠냐고!”
서릿발 같은 기세로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린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정확히 타격이 이뤄지는 순간에 딱! 어? 콱 씨! 내가 몇 번을 보여 줘도 못 알아듣냐! 이 귀머거리 새끼들아아아! 너희들이 그러고도 정파의 희망 맞냐고오!”
말로 두들겨 맞는다는 게 이런 걸까.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지만.
일단 그렇단다.
어디 그뿐이랴.
여자라고 봐주는 일도 없었다.
“어디서 분을 처발라 가지고 오는 거야! 신성한 연무장에! 당장 가서 지워! 5초 준다.”
방심하면 돌멩이가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날아와 이마를 찧었다.
“잠이 와? 잠은 죽어서도 평생 자면 되잖아! 이놈들아아!”
뭐 이런 과격한 방법이 다 있단 말인가.
사파 언저리에서도 이런 몰상식한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침음을 삼키며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남사익의 앞으로 지나가는 일단의 무리.
그러자 화색이 도는 남사익이었다.
“부교관니이이임!”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남사익과 함께 용기백배한 몇몇 후보생들이 훈련을 받다 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발 여기를 봐 달라는 염원을 가득 담아서.
“부교관님드을! 여기! 여길 좀 보십시오!”
“살려 주십시오오!”
“제발 살려 줘요오오!”
그런데.
응?
단 한 번도 고갤 안 돌린다. 단 한 번도.
“……못 들었나?”
“그럴 리가.”
연무장의 크기가 뭐 얼마나 넓다고 이 거리에서 그걸 못 들어?
그럴 수가…… 있나?
“못 들었나 보다! 다시 질러 대!”
이미 야차 같은 놈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시선이 꽂혀 있었다.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비롭게.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바들바들.
남사익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부교관을 못 잡는다면 진실의 방으로 직행감이었다. 이 사달을 일으켜 놓고 진실의 방으로 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다.
부교관님을 먼저 데리고 오느냐 아님 놈이 먼저 달려드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야차 같은 놈이 흐뭇하게 손을 들어 흔든다. 뭐든지 다 해 보라는 듯이.
웬일로 여유를 주지?
“……내공까지 써! 있는 힘껏 지르라고!”
“그래! 모두 질러 대!”
그렇게 남사익을 비롯한 서너 명의 후보생들이 군중의 염원(?)을 담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댔다.
그러나.
“……그냥 가네?”
“왜 그냥 가지?”
“어째서…….”
“일부러 못 들은 척하시는 건 아니겠……지?”
아니.
누가 봐도 이 악물고 못 들은 척하는 모습이다.
내공까지 담아서 질렀는데, 못 들을 수가 있을까.
거기다.
“……눈 마주친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설마, 서얼마.”
보고도 못 본 척을……?
잠깐 우릴 쳐다본 것 같았는데, 부교관들은 모두 고갤 돌려 버렸다.
뚜둑. 뚜둑.
그리고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스산한 소리.
관절을 푸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목청 좋다, 다들? 훈련에 임할 때 내가 그리 목소리를 내라고 말했는데도 소리가 작더니 말이야. 나 참.”
남사익의 뒤로 들리는 익숙하고도 낮게 깔린 목소리.
“이렇게 우렁차고도 남자다운 목소리는 어째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
“하아…….”
서로가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저 웃으리라.
웃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으니.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렇게 후보생들은 다시 한번 천무린이 가진 권력의 손맛을 봐야만 했다.
* * *
“총교관님은 당최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가 없군그래.”
“그분 생각을 우리가 알아서 뭐에 쓰겠나? 그저 그러려니 하는 거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불만이면 직접 가서 이야기를 해 보든가.”
직접? 직접이라고?
에이, 뭘 또.
“선 넘지 말자, 우리. 서먹해지기 싫다.”
“어, 그래. 미안.”
고윤은 진심으로 자겸에게 화를 낼 뻔했다.
악교운은 말 그대로 야차다. 건드리지 않으면 그저 냉소적이고 냉혈한 정도로 보이는 게 전부이지만, 눈이 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야차다.
고윤은 악교운에게 두들겨 맞고는 몇 날 며칠을 당의원을 오가며 오로지 치료에 전념해야만 했다. 그런 고윤을 바라보며 혀를 차던 부교관이 악교운을 떠올리다 말고 이야길 꺼냈다.
“그보다 소야차가 또 한 명 있잖아?”
소야차.
말 그대로 작은 야차다. 부교관들 사이에서 흔히 나오는 별호.
“……여기 터가 안 좋은 거 같아.”
“출세하자…….”
고윤과 가장 절친한 벗이자 함께 부교관으로 있는 자겸은 창밖으로 보이는 연무장을 바라봤다.
“저거, 저놈. 진짜로, 으휴!”
고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지막지한 놈.
북쪽 동굴에서 조별 과제랍시고 마인이 되어 겨뤘던 그 시절이 불과 칠 주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그새 더 강해졌다.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던 무공의 수준이 더 이상 읽히지 않았다. 완연한 일류의 경지에 든 자신이 말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납득이 간다.
질투심이나 시기심 같은 하찮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을 보니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절세의 무재를 타고났으며 감히 그의 노력을 폄하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보여 주고 있었다.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
사천무관이 낳은 불세출의 무재가 말이다.
섬서무관과 산동무관이 배출한 역대 무재들과 비교하면 늘 한 수 뒤처진다는 평을 듣던 사천무관에도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다만.”
정말로, 다만.
“어떻게 성격은 못 고치는 거겠지?”
조금이라도 반기를 들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용히 어디로 끌고 간다. 으슥한 곳으로.
어, 지금도 저기 한 명 끌려가고 있네.
왜 갔다가 오면 그토록 반항하던 녀석들이 조용해지는지 원.
진실의 방이라고 했나, 뭐랬나.
그뿐이면 다행이다.
“어디서 배워 온 건지 모를 저런 훈련법은 대체…….”
이게 바로 진짜 무관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라도 하려는 듯, 천무린은 단체로 움직이고 단체로 교육받으며 단체로 밥을 먹고 단체로 잠을 자게 만들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숙의 시작이었다.
“너희들은 전부 쓰레기야! 몸을 쓰는 것부터 죄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
그간의 노력을 허사로 돌려 버리는 신공부터 시작해서,
“나이 들어서 골병들래? 지금 고생하고 말래? 당장 공들여서 기반을 다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어? 탄탄대로를 걷는 거야! 알간!”
어린놈이 하는 말이라고 보기에는 살짝 어폐가 있는 말도,
“불만 있으면 나랑 함 뜨든가. 덤벼.”
폭력까지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는 놈의 교육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었지만.
“송 조교, 뭐 하나! 마음 약해서 봐주면 네가 다 덤터기 쓰는 거야. 태 조교 좀 봐 봐. 아주 듬직하잖아. 다시 훈련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송무와 태강을 적절히 활용하여 후보생들을 압박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데.
고작 반 시진을 뛰면 헉헉거리던 후보생들이 지금은 한 시진을 전력으로 뛰어도 멀쩡해 보인다. 고른 호흡으로 질주했다.
“우오오오오!”
“으라차차차!”
……말도 안 되는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효과가 모두 같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죽이자! 죽이자!”
“필멸무린! 난도무린!”
반드시 천무린을 멸한다.
천무린을 난도질한다.
무슨 구호처럼 후보생들이 외치면서 움직인다.
고윤이 침음을 삼키며 자겸을 바라봤다.
자겸은 이미 못 볼꼴을 봤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이거 맞아?”
“……맞긴 뭐가 맞아.”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지만, 이미 늦었다.
알알이 박힌 근육은 모든 초식을 다루는 데 힘껏 쓰였고, 근력을 비롯한 모든 신체 능력이 월등히 좋아진 후보생들이 보였다.
거기다 단순히 신체 능력만 좋아졌을까.
“사천검법, 제1초식! 상천!”
곧 그들의 무공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르릉, 촤르르르륵!
촤아악!
일사분란하며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수십 명의 검세가 마치 하나가 되어 춤을 춘다.
장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황태, 이 새꺄! 고개 들어야지! 상대랑 눈도 안 마주치고 검을 올려 베냐!”
“하도 처맞더니 대가리가 깨졌냐! 명진 놈아! 똑바로 안 할래? 목 위에 달려 있는 건 쓰라고 있는 거지 장식품이 아니라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
“아오, 머리 색깔만 튀는 저 개 같은 놈, 지 약혼녀보다 못하고 자빠졌네. 으휴, 사내새끼가 쪽팔리지도 않냐! 팔꿈치 더 들어! 내가 언제 장법 펼치랬어?”
천리안이라도 갖고 있는 것인지, 51명이 움직이는 검세를 어찌 다 파악하고 있는지 움직임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지적한다.
시선 처리, 팔꿈치의 각도, 발끝의 움직임 등 개개인으로 지도를 받아도 과연 다 살펴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모조리 잡아 준다니.
고윤과 자겸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서 혀를 내둘렀다.
곧 절정의 경지에 다다를 그들조차도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알랴.
눈앞에 선 이가 불과 10년 전까지 이 시대를 풍미했던 무신이자 모든 마인의 종주이며, 천마신교의 절대적인 군주였던 천무린이었음을.
또한, 무림학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마교의 마도관에서 수석 자리를 죄다 꿰차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