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총교관님.”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 고윤은 악교운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업무가 아주 바쁘다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보고는 미루라고 말했을 텐데.”
“그게…….”
“됐다. 보고 나서 판단하면 되겠지. 아닐 시에는 각오가 되어 있으리라고 판단하겠다.”
그 말에 고윤이 침음을 하며 악교운을 안내했다.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대연무장으로, 8기 후보생들이 쓸 수 있는 가장 큰 연무장이었다.
“여기에서 누가 훈련을 한다고? 주로 교육을 위해서만 쓰이는 곳인데…….”
하나둘, 하나둘.
“야, 이 새끼들아! 제대로 안 뛰어?! 북쪽 동굴까지 찍고 오는데 무려 반각이나 줬는데 그걸 못 한단 말이야? 어휴, 앓느니 죽지.”
단상에 올라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 녀석을 보고 악교운은 고윤에게 시선을 돌린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보시는 것이 맞습니다. 저도 꿈인 줄 알고 이틀 만에 보고를 드리는 겁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갤 돌린 악교운의 시선에 후보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천무린은 워낙 괴짜 같은 놈이고 거기다 무공까지 강해졌으니 몇몇 후보생들을 제 수족 부리듯 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래, 거기까지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어떻게 8기 후보생 전원이 저 녀석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그게 말하자면 긴데.”
빨리 말해 보라고 재촉하는 듯한 악교운의 시선에 고윤은 눈을 질끈 감는다.
“17번 후보생에게 반항했던 모두가 두들겨 맞은 후 그다음 날부터 자진해서 참가했다고 합니다.”
“……저 녀석들도?”
백리후를 비롯한 일행을 가리킨다.
“하하, 그게 말이죠. 저 녀석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17번 후보생의 말을 안 들으면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쳤다고 하더군요. 정말 재밌지 않습니까?”
“……그게 웃긴가?”
딸꾹.
재밌는 광경이라며 자랑하듯 말하던 고윤이 그만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17번 후보생을 단죄하고 각자 훈련을 하라고 하면…….”
“무슨 연유로? 자유라는 명목으로 저들이 움직이는 거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강제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됐다. 내버려 둬라.”
자유 훈련을 하라고 시켜 놨더니, 모두가 같은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대문파, 군소 방파 할 것 없이 아주 일사분란하게.
악교운은 그 모습에 조소를 띠었다.
“2차 진급시험까지 어떻게든 잡아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런 방식으로 간다는 거였나.”
재밌군.
뒷말은 잇지 않은 채 조용히 돌아가는 악교운이었다.
* * *
이틀째다.
8기 후보생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아무 불평불만 없이 천무린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불평불만이 처음부터 없었느냐고?
에이, 그럴 리가.
“에이, X발.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같은 후보생한테 훈련을 받는다는 게 말이 돼?”
“그래, 이건 아니지. 야! 조져! 조질 수 있어. 우리가 대가리 수가 더 많아!”
“족쳐!”
그럴 때마다 송무와 태강, 설화린이 각 자리에서 소리쳤다.
“21번 후보생, 진실의 방으로!”
“40번 후보생, 진실의 방으로!”
“13번 후보생, 진실의 방으로!”
그렇게 모두 다 진실의 방으로 들어갔던 인원들은 하나둘 뚝배기가 깨져서 돌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놈들이 나올수록 천무린은 껄껄 웃으며 이리 말했다.
“좋구나! 좋아! 제발 더 나와라. 간만에 손맛 좀 보게!”
손목을 풀며 좋아서 날뛰는 녀석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오금이 저려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네. 어떻게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된 거지?’
불과 몇 개월이다. 고작 몇 개월 만에 어찌 그리 강해질 수가 있다는 것인가.
단순히 강해진 거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단 한 수도 걷어 내지 못하고 이리 깡그리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나, 백리후가 말이다.
백리후뿐만이 아니라 진무양, 명진, 낭소소를 비롯한 대문파 출신은 물론이거니와 군소 방파의 황태와 남사익도 같이 구르고 있었다.
“어이, 남해 놈아! 뒈지게 맞아서 온몸에 열이 펄펄 나 봐야 정신 차리지?”
“저저, 황 뭐시기 저놈 봐라. 아주 꼴값을 떤다. 애들 앞에서 온갖 행세는 다하고 다니더니. 으휴, 저 덜떨어진 놈!”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백리후뿐 아니라 다들 이와 같은 상황에 그저 혼란스러워했다.
그나마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백리후를 비롯한 네 사람도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반발이 심한 명진은 첫날 저녁에 악에 받쳐 소리치기도 했다.
“다 같이 덤벼들어서 손을 쓰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우리가 방심해서 그런 거잖아.”
“……방심이라고? 어떻게 방심해야 단 한 수에 기절할 수가 있는 거지?”
그런 명진을 입 다물게 한 건 진짜로 단 한 수 만에 기절해 버렸던 진무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낭소소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천무린을 비교군으로 들지 말고 남사익, 황태라고 할지라도 단 한 수만에 그들을 꺾을 수 있는 사람, 여기 있어?”
그녀의 말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남사익과 황태는 무공 수위만 따져도 10등 안에 들어간다. 물론 이길 수야 있겠지만, 단 한 수에?
절대 불가능했다.
“그리고 전력으로 출수해서 그렇게 됐다고 쳐도, 일권일압을 총 세 번이나 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일권일압.
한 번의 주먹질로 제압한다. 그리고 그걸 무려 세 번이나.
처음이 명진, 두 번째가 진무양, 세 번째가 백리후.
엄밀히 말하자면, 백리후는 권은 아니고…… 금나수 정도 되겠지만.
낭소소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특히 백리후는 천무린에 의해 땅바닥에 꽂힌 뒤부터 아직도 얼얼한 안면을 가끔 쓰다듬는 습관마저 생겨 버렸다.
“커흠흠.”
“명진아, 뇌까지 근육으로 키우지 말고 쓰란 말이야.”
어째서인지 낭소소의 목소리가 예전보다 날카로워졌다. 그러다가.
“어? 무린이 교육이 다 끝났나 보다!”
자리를 벗어난 낭소소가 표홀히 날아가 천무린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세 사람은 혀를 찼다.
“무슨 짓을…….”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명진과 진무양의 푸념에 백리후가 고개를 저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뭐?”
“괜스레 저항했다가…….”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그리고 사파의 대거두보다 두려운, 그런 존재가 돼 버린 천무린이었다.
백리후는 저항의 의지를 이미 꺾었다.
“난 또 진실의 방에 들어가기 싫다.”
딸꾹.
딸꾹.
백리후의 말에 진무양과 명진이 동시에 딸꾹질을 한다.
“그리고…….”
백리후의 시선이, 희희낙락해서 몽둥이찜질을 멈추지 않는 손길에 머문다.
“대체 어떤 연유로 저리 강해질 수 있는지 나는 너무 궁금하다. 그 의문을 좇다 보면 나 역시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강함에 대한 염원.
힘에 대한 갈망.
누구나 다 강해지고 싶다.
그뿐 아니라.
“그러면 저 녀석을 꺾을 수도 있게 될지도.”
백리후의 두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인정에 대한 욕구.
세 가지가 조화롭게 타오르니 그 옆에서 딸꾹질을 하던 두 사람도 방정맞던 행동을 멈춘다.
비단 백리후만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모두가 동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
무당파.
청성파.
아미파에 속해 있는 낭소소까지 모두 대문파의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속가 제자라는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들도 인정받고 싶었다.
8기 후보생들 사이에서나 그럴듯한 배경으로 인정받는 게 아닌, 본신의 힘과 능력으로 제대로 인정받고 싶었다.
거기다.
“……하하, 본 문에서 되레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더욱 인정받고 싶은 점도 있고.”
이들은 사천무관이 아니라 섬서무관으로 갔어도 되었다. 그런 그들이 굳이 섬서무관이 아닌 사천무관을 택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동문수학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지만 오히려 더욱.
“못살게 굴지.”
같은 문파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했다. 단적인 예로 백리후를 비롯한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던 다른 세 사람 역시 같은 문파에서 온갖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사천무관으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처음 이곳에 입관하여 단합했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학관을 나설 땐 우리를 무시했던 모든 이들에게서 인정을 받자고 했었지.”
백리후의 말에 진무양이 나직이 답한다.
그리고 명진 역시 진중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우린 그 목표를 잊었나?”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골목대장이나 하자고 모였나?”
“그렇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무얼 두려워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지? 눈앞에 해답이 있는데.”
……그렇다. 해답은 눈앞에 있다.
왜 설화린이 출신도, 배경도 다 내려놓고 천무린에게 고개를 숙였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현명한 처사였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진실의 방은…….”
딸꾹.
“무섭지.”
절대로 가기 싫었다. 진실의 방만큼은.
* * *
“야야, 내가 강제로 시킨 거 아니다? 교관님들이 물었는데 강압적이니 뭐니 하면 그땐 다 같이 뒈지는 거야. 알지?”
그 말에 온몸이 넝마가 된 후보생들이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씨, 씨X……. 백리후까지 훈련을 받는 걸 보고 신뢰를 가졌건만.’
‘아니, 남사익이랑 황태가 다 한 방에 나가떨어질 줄 누가 알았냐고…….’
당의원에서 막 회복하고 돌아온 남사익하며, 다른 떨거지들을 우르르 몰고 온 황태하며 죄다 박살이 나면서 후보생들의 눈은 반짝였다.
그 무위에 반한 수많은 후보생들이 자진해서 자유 훈련 기간 동안 내게 배움을 청했다.
백리후를 비롯한 대문파 제자들이 먼저 배움을 청해 훈련받고 있는 모습까지 그들에게 바람을 불어넣기 좋았다.
후후.
즐거운데.
나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넝마가 된 후보생들을 바라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2차 진급시험까지 마인을 잡아야 하는데, 한 명 한 명 찾아서 염불을 외며 나무아미타불하기도 이상하지 않은가.
거기다 안 그래도 애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했는데, 이렇게 애들을 후려 패니 이제야 성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진작에 이렇게 나설걸.
제3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