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제29화
“준비 다 됐냐?”
송무가 한 걸음 나섰다. 흠씬 두들겨 패서 두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실눈처럼 보였지만.
“내가 먼저 해 볼게.”
긴장감이 감도는 표정으로 검을 뽑는 송무는 마주한 설화린을 바라봤다.
‘내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고작 사나흘 남짓한 시간으로 사천무관 8기 후보생들 중 상위권에 속하는 설화린을 꺾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으로 인해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의외로 또.
괜찮았다.
「무린아, 내가 정말 이길 수 있을까?」
「이런 등X이, 진짜로 더 맞아야 하냐.」
「아니……. 그래도.」
「병X아, 네가 더 잃을 게 있어? 쟤한테 지면 쪽팔리기라도 한 거냐고.」
퉁명스러운 무린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다가 사라진다.
불과 몇 분 전에 해 준 천무린의 말은 불안감을 기대감으로 바꾸어 줬다.
맞다.
자신은 거의 만년 꼴찌에 버금가는 최하위권. 상대는 상위권.
무관 내에서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의 현격한 수준 차라고 느꼈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그리고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여운이 송무를 감싸고 있었기에.
“그 눈빛, 정말 불쾌하네요.”
언짢은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는 설화린의 시선은 송무의 기대에 찬 표정에 꽂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감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자신과 비무를 하는데 불안한 기색이 전혀 없다고?
어쩌면 혹시 백 분의 일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눈빛.
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 눈빛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설화린은 다짐했다.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고. 상대가 약하다고 얕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좋게좋게 마무리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어? 나 걱정해 주는 거야, 화린아?”
참 눈치도 없다. 저 천진난만한 표정은 정말로 내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의미에서 이는 천무린보다 더 큰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힐끔.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바라보고 있다.
뿌득.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봐주려고 했건만, 이젠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찌릿.
또, 또.
나는 혼자 이를 갈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설화린을 마주 봤다.
“왜? 나 또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빨리 시작이나 해욧!”
어린노무 새끼가 어디 어른한테 바락바락 소리나 지르고……!
후우.
앓느니 죽지, 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서글픈 마음을 밀쳐 두고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자, 시작해.”
내 말에 설화린은 이내 이갈이를 멈추고 얕은 한숨을 불어 낸다.
그러곤,
척!
포권지례를 취했다.
제아무리 가벼운 비무일지라도 비무는 비무.
설화린은 진심을 다하기 전에 갖춰야 할 예의를 갖췄다.
“어? 어……!”
그 모습에 송무 역시 허겁지겁 포권을 취한다.
쩌저적. 쩌저적.
비무 준비가 끝나자, 주변을 새하얗게 피어나는 눈꽃으로 만든 설화린은 사천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북해빙궁이 자랑하는 빙백신공을 자랑하듯 늘어놓더니 사천검법의 기수식을 펼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겉멋만 잔뜩 들어서는.
“먼저 선수를 양보하죠.”
얼씨구? 선수까지 양보해?
방심 안 하려고 마음 다잡은 거 아니었나. 근데 선수를 양보한다는 건 자기보다 약자라고 상대를 얕보는 거잖아.
알다가도 모르겠네, 얘는.
쯔쯧.
혀를 차며 나는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했다.
신중을 기하던 송무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을 내디디자마자 6초식인 천궁을 펼쳤다.
사선으로 베어지는 검격은 꽤나 쾌속했고 꽤나 간결했다.
“흥! 이 정도 가지고……!”
코웃음을 치던 설화린은 초식의 운용에 자신이 있다는 표정으로 똑같이 천궁의 초식을 펼치며 막아 냈다.
아니, 막아 내려 했는데 벌써 짓쳐들어온다……고?
타아악!
가까스로 막아 낸 설화린이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에겐 숨을 돌릴 틈은 없었다.
천궁, 상천, 구궁, 하천, 백경, 태산.
기존에 알고 있던 사천검법의 반듯하고 변칙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검법이 모든 틀을 깨부수고 유려한 선을 그려 냈다.
검술에만 집중하던 송무의 호흡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사천심법까지 가열차게 펼치니 검결에 탄력이 붙었고 군더더기 없는 선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이, 이게 무슨!”
무수히 뻗어 오는 초식들을 걸음을 떼며 겨우겨우 쳐 내는 설화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타닥! 타악!
설화린 역시 후보생들 중 수위를 다툴 정도의 실력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점차 송무의 움직임에 익숙해져 갔다.
“……심지어 빙공이 송무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 같은데. 역시…… 안 되는 걸까.”
자조적인 태강의 말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빙백신공의 기운이 넘쳐흐르니, 결국 그 기운이 송무의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을 방해했다. 북해빙궁이 자랑하는 특유의 차가운 기운을 적절히 활용하는 설화린이었다.
“내가 그렇게나 패고 또 팼는데도 아직도 교육이 덜 됐나 봐.”
이 어리석은 아해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오른손이 불끈 쥐어진다.
“……어? 왜 또 그렇게 웃어? 무섭게. 얼마나 또 패려고.”
태강은 자라목이 된 채 불평을 했다.
“하지만 너도 보다시피 송무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고 있잖아.”
후, 그래서 너희가 갈 길이 구만리란 말이다.
이놈들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처여.
아? 내가 언제부터 부처를 찾게 된 거지.
“……부족한 것만 보이고 우세한 건 안 보이나 보지?”
“응? 우세해?”
내 말에 태강이 다시금 비무를 뚫어져라 살펴본다.
우세한 듯 보였던 송무의 움직임이 빙공의 방해로 더 나아갈 수 없는 듯 보였지만.
……반대로 설화린의 움직임도 경직되어 보인다.
“어, 어째서지?”
아무리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손목. 손목을 유심히 봐라.”
이렇게 죄다 알려 줘야만 알아듣는 너도 참 어지간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설화린의 손목을 바라봤다.
덜덜 떨리는 손목과 경직된 움직임.
저건 당연한 거다.
후보생들은 약관도 안 된 어린 나이이기에 육체적인 능력이 죄다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다. 기초만 잡아 줘도 강인해지는 무공 수준은 서로 비슷한 이류 수준에 불과하니 문제가 되는 근력을 압도적으로 키워 줬다.
내력이 있다지만 밤톨만 한 내력에만 의지할 순 없기 때문에 육체적 능력이 절대적인 것이다. 특히 지금의 나이대에선.
단단해진 송무의 육체적인 능력은 급격히 강해진 상태로 결코 설화린이 방심하며 받아 낼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수를 양보하고 검격을 간단하게 막아 낸다고 첫 수를 펼친 것부터 악수였다. 여전히 자신이 강하다고 자부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방심할 수밖에 없었지. 아주 멍청하게.”
그 말에 설화린은 부르르 떤다.
그리고 눈빛이 매섭게 변한다.
“야야, 쟤 화났다.”
“……그러게 왜 비무하는데 화를 돋우고 그래?”
내 말에 태강은 좀 어지간히 하라는 눈빛을 보냈고,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뭔 소리야? 어차피 다 네가 감당해야 하는데.”
“응?”
태강이 그게 무슨 말이냐며 미간을 모으고 날 바라봤다.
“다음은 네 차례잖아?”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네가 배운 게 송무랑 다른가?”
맙소사.
배운 게 다를 리가 있을까. 5일간 죽을 둥 살 둥 함께 배우고 함께 견디고 함께 도망…… 아니, 아니.
그런 태강에게 나는 말했다.
과연 송무와 비무를 끝낸 설화린이 송무 때처럼 당황하며 손발을 어지럽게 상대할 것 같으냐고.
“아마 널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하하.”
나는 태강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다.
부르르.
태강의 양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하도 맞아서 천무린에게는 평생 못 개길 줄 알았는데, 열화와 같이 불타오르는 걸 보니 세상에 영원한 것 없나 보다.
꿀꺽.
목울대가 자연스레 움직인다. 지금이라도 집중을 해야 했다.
송무의 단단해진 검세에 짓눌려 있는 설화린이었지만, 다음 차례인 자신에게까지 저렇게 힘없이 당해 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간극을 메우려면 집중해서 설화린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카가가강!
그녀의 한기 어린 검격이 송무의 검면을 때렸다.
저런 공세를 막상 눈앞에서 당한다고 생각하니 싸울 의지가 꺾인다.
주춤거리는 송무에게 이채를 띠며 다가간 그녀는 지체 없이 좌수로 빙백장을 펼쳤다. 급변하는 그녀의 기세는 대번에 송무의 급소를 노리고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쩌저저적.
단 한 번에 치명상이 입힐 수 있을 정도의 한 수가 펼쳐진 것을 보고도 송무는 침착했다.
‘……믿자. 내 검을.’
그렇게 송무는 숨겨 놨던 검을 꺼냈다.
천하삼십육검법을.
종남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검법이자 천하에서도 가히 일절이라고 불리는 데 전혀 손색이 없는 검법.
“호, 제법 자세가 나오는데.”
막 눈을 떴을 때 봤던 볼품없던 모습은 여전했지만, 조금은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나는 피식 웃었다.
피핏!
터져 나온 천하삼십육검법은 휘날리던 얼음꽃을 조각내며 송무에게로의 접근을 불허했다.
파파팟!
그뿐 아니라 송무의 주변에서 공기와 기세가 반전되며 설화린이 뻗은 검격과 빙백장을 모조리 막아 냈다. 그리고 분쇄했다.
콰가가각!
“……이게 종남의 검.”
처음 겨뤄 보는 천하삼십육검법의 검세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설화린이었다. 그저 어리숙하게만 보였던 송무의 변한 모습에 설화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토록 자유롭게 공세를 전환하는 것도, 갑작스레 맞이한 고절한 검술도 그녀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을뿐더러 이런 송무의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아니.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까드득.
그리고 지금 이렇게까지 이 사람의 능력을 끌어올린 누군가가 급격하게 원망스러워졌다.
대체 무슨 수를 어떻게 쓰면 어리숙하기만 했던 사람을 이렇듯 번듯한 검수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