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제28화
검 끝이 땅끝에서 하늘로 올려치며 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근력 훈련이 아닌 검술을 펼친다는 사실에 기쁜 나머지 둘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
‘으음.’
갑자기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엉켰다.
뭐라 형언할 수 없었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사천검법이라 하면, 본디 무관에 입관하자마자 익히는 무공이다.
1초식부터 6초식까지 있는 사천검법은 사실 시중에 떠도는 삼재검, 육합검 등과 같은 삼류 검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천무관에서 내노라하는 고수들이 대거 참여하여 직접 개량하며 만든 사천심법과 사천검법을 함께 펼쳤을 때의 효과는 감히 삼류들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진다.
사천무관에서 후보생들의 검술 교육의 일환으로 쓰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몇 년 동안이나 펼쳐 온 검세이다 보니, 확실히 느껴진다.
똑같은 검식.
전과 다를 바 없는 동작.
디디는 발자국 한 걸음조차.
어느 하나 다를 것 없는 초식이었지만, 안정감이 느껴진다 싶을 정도로 갖춰진 자세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검술 교관 담진이 일전에 보여 준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얼핏 엿보인다.
물론 그가 말했듯 이 사천검법으로만 연습을 해도 절정에 다다를 수 있다곤 했지만, 말로만 듣던 것과 몸소 표현된 것은 너무도 달랐으니까.
거기다 죄다 사천검법으로 절정 고수가 된다면 어느 누가 다른 무공을 익힐까.
상천, 하천, 태산, 구궁, 백경, 천공.
총 6가지로 나뉘는 초식은 기본기이면서 이 기본기에 충실해질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다.
정말 여태 내가 배운 게 헛된 것인가. 여태 몇 년간 배웠던 것보다 지금 고작 사나흘 만에 이토록 정교해진다고?
의문 어린 표정으로 천무린을 바라보는데.
“제2초식, 하천!”
솨아아!
묵직한 음성에 사념은 털어 버리고, 이내 검 끝을 움직인다.
안정된 자세에서 나오는 잘 벼려진 검세가 허공을 갈랐다. 그간 검세를 펼치며 보이던 어리숙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흔들림 없이 펼쳐지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그러기엔.
‘너도?’
‘설마 너도?’
송무와 태강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검세를 펼쳐 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은 검에 빠져들었다.
흔히 말해.
‘무아지경.’
몇 번이고 검식에 취해 검을 뻗었고 휘둘렀고 베었다.
비록 사천검법에 한해서겠지만, 그들이 평소에 원하는 대로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펼쳐지는 검식을 통해 느끼는 황홀감은 남달랐으니까.
나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두 사람의 검세를 지켜봤다.
반각이었던 시간이 일각, 일각이 곧 반 시진, 한 시진이 넘도록 검은 멈출 줄을 몰랐다. 며칠을 굶었던 사람처럼 검에 흠뻑 빠진 사람이 되어서 말이다.
이제야 좀 사람다워졌네.
갈 길이 구만리였지만, 열을 내고 입에 귀한 영약까지 먹인 보람이 조금은 나오려나.
하긴 이 정도도 못하면 나가 뒈져야지.
어설픈 검식을 가지고 드잡이하다가 이제 아주 조금은 나아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후욱, 후욱.”
“하아…….”
거친 호흡을 고르며 검을 늘어뜨린 두 사람은 사천검로를 상기하며 잔뜩 흥분에 들뜬 표정으로 떠들어 댔다.
“그러니까…….”
“우리가 방금 펼친 게.”
“……사천검법 맞지?”
“와아…….”
감탄의 연속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한 시진이 넘도록 검술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지치기는커녕 손바닥에 남아 있는 여운이 강렬하기만 했다. 여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훈련 할당량을 채우기에 급급했건만.
그간 사천무관의 훈련에서는 할당량을 채움으로써 그래도 열심히 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사천검법만큼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익히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무와 태강은 헛웃음을 지으며 천무린을 바라봤다.
“뭘 봐, 등X들아. 그거 좀 펼쳤다고 화경의 경지에라도 든 사람처럼 처웃고 있냐고.”
퉁명스러운 내 말에도 두 사람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오늘로 자신들의 생각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검을 펼치기에는 기초적인 역량도, 육체적 능력도 모두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야 좀 감이 오지? 그동안 얼마나 놀았는지?”
내 말에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곧게 세운 상하체에 붙은 근력이 검 끝을 흔들리지 않도록 바로 세워 주고, 근력이 붙음으로써 민첩함까지 더해져 날카로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힐끗.
저 녀석이 이렇게 만든 거란 말이지?
하품을 하고 있는 나는 두 쌍의 또랑또랑한 눈빛을 마주 봤다.
“뭐? 왜?”
무한한 신뢰의 눈빛이 나를 감쌌다.
“그래서 이제 다 끝난 거지?”
나른한 내 말투에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이다.
“어? 으응.”
“무린아……. 네 덕분에.”
“무린아, 너의 교육 방식에 대해 우리가 그간…….”
“시작할까?”
두 사람의 말을 끊은 나는 히죽 웃었다.
……어?
뭐가 또 남은 거야?
그런 의문 어린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드러나자, 나는 물가에 던지는 돌멩이처럼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뭔 소리야. 아직 하루나 남았는걸.”
내 교육 방식이 어쩌고 어째?
불신.
불평.
불만.
불안.
또 뭐? 도망을 가? 내가 자는 사이에?
하하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내 가르침을 받으려고 여기저기서 줄 서고 그랬는데.
하하하!
뒈질 줄 알아. 어딜 그냥 넘어가려고!
다른 건 몰라도 어설프게 끝낼 것이었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자아, 드가자아!
내 미소에 두 사람은 금세 창백한 표정을 지었다.
동굴 내에서 국한되었던 훈련의 범위는 달라졌다.
사천무관 뒤에 있는 북쪽 산 전체가 배경이 되어 버렸고, 그 산에서 보이는 모든 것은 훈련의 대상이 되었다.
거친 돌길 위에서 내력 없이 아침 구보를 하는 것은 물론이오, 깎아지듯 만들어진 절벽에 내력을 일절 쓰지 않고 올라가는 둥, 온갖 훈련을 병행해야 했다.
물론 그 훈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간단하지?”
단지 가파르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경사가 아예 없는 절벽 위에, 흐뭇한 미소로 송무와 태강을 바라봤다.
여태 단어의 뜻을 잘 몰랐던 걸까.
“이, 이 미친놈아! 간단하긴 뭘 간단해애!”
뭘 간단해애! ……간단해애! ……해애!
메아리가 울려 퍼져 산 전체를 가득 메웠다.
간단하다고 표현한 이 절벽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동굴 속에 있어서 몰랐는데, 북쪽 산이 이리도 가파를 줄이야.
“허허. 나 때는 말이야. 원래 이런 데서 허리춤에 두~툼한 바윗덩어리 하나씩 달고 매달려 있고 그랬어.”
“나 때는.”
그 때가 언젠데! 대체!
원시천존이시여! 태상노군이시여! 하늘에서 바라보고 계실 텐데 어찌하여 저 흉신악살을 안 데려가나이까!
태강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투두둑.
발에 차인 돌무더기가 후두둑 떨어지면서 끝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고갤 돌린 태강의 눈에 보이는 송무.
이미 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어? 어어어!”
두 팔에서 힘이 빠질 것처럼 휘청이는 송무의 모습을 보던 태강은 비명을 질러댔다.
빠각!
“시끄러!”
고개가 아래로 꺾일 정도로 주먹만 한 돌멩이가 태강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리고 동시에.
빠각!
“누가 여기서 쳐 자래? 잠은 죽어서 영영 자는 거야.”
힘이 빠져가던 송무가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까진 안 하려 했는데…….”
불길하다.
태강의 귀가 쫑긋거렸다.
“두 놈 중에 늦게 오르는 놈은 오늘 저녁밥 없다.”
“우오오오오!”
“밥이 없다니! 그럴 순 없지!”
송무와 태강이 언제 힘이 빠졌냐는 듯, 절벽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말이야.
역시.
끼니가 걸려야 되나 보다. 하긴 마도관 시절에도 굶긴다는 말 한마디면 미친 듯이 뛰어들던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뭔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을 것을 안 준다면?
어휴. 끔찍하지.
자주 써먹어야겠어.
그렇게 흐뭇하게 웃고 있는 와중에.
빼꼼.
응?
“뭐야. 왜 또 훔쳐봐.”
습관성 관음증인가.
어지간히 심심한지 또 쳐다보고 있다. 저렇게 보면 나한테 안 들킬 줄 아는 건가.
내 뾰로퉁한 반응에 설화린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또 훔쳐보긴요! 저도 바람 쐬다 우연히 본 거거든요?”
“바람을 쐬러 굳이 여기까지? 절벽에?”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리더니, 송무와 태강을 가리켰다.
“흥! 그래요! 저렇게나 비명을 질러대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아. 그렇구나. 비명 때문이었구나.”
“흥! 맞아요. 비명 때문이었어요.”
제법 괜찮은 이유를 갖다댄 것이 흡족한 덕이었는지 설화린은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야야! 너희들 입에서 앞으로 한 번만 더 비명 나오면 삼시 세끼 다 없을 줄 알어!”
그 말에 절벽 위를 기어오르다가 주르륵 몇 번이나 미끄러져야 했다.
“하여간. 이것저것 변명 하나 갖다 붙이는 데는 아주 도사야. 도사. 무당에서도 울고 가겠어. 아주.”
빠직.
설화린의 고운 손에 핏줄이 불거진다.
어째 이 사람만 보면 이렇게 화가 나는지.
무례하고.
염치없고.
사람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덴 아주 도가 튼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잊었어? 우리가 훈련할 때만큼은 참견하지도, 보지도 않겠다고 했잖아.”
할 말을 잃었다.
쳇, 거기다 맞는 말까지 해 버리니 설화린으로서도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내일 반드시 이 오만하고도 광오하다 싶을 정도로 싸가지 없는 사람의 콧대를 눌러 주리라.
설화린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몸을 홱 소리 나게 돌려서 가 버렸다.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 가지고 말이야. 콱, 마.”
진짜 한 대만 때리고 싶었다.
제발 딱 한 대만.
* * *
퉁퉁.
설화린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비무에 대응하기 위해 더욱 손속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표정은.
“제, 제발 무린아……. 다시는 네 교육 방식에 토 안 달게. 엉엉.”
“엉엉엉.”
송무와 태강 모두 빌고 있었다.
왜지.
난 그냥 비무에 대응하라고 훈련시켰을 뿐인데, 나 원 참.
“다들 왜 그러실까. 내일 저 꼬맹이한텐 이기게 하려고 이러는 건데.”
“엉엉, 진짜 우리한테 왜 그래?”
나 참.
무공 지도였는데, 이렇게까지 날 나쁜 사람을 만들 건 뭐람.
내 교육 방침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멸시하고, 괄시하고, 경시하던 녀석들의 눈빛이 떠올라서 손속이 과해진 건 절대 아니다.
절대로.
설마 내가 애들이 반기 좀 들었다고 손속이 과해졌으려고.
에이…….
퉁퉁 부은 두 눈과 입술이 불어터진 두 사람의 얼굴을 보노라면.
“커흠흠.”
조금 과했나 싶기도 하고.
“……이래서는 비무는 고사하고 쓰러질 거 같은데요?”
다음 날, 비무를 위해 검을 뽑아 든 설화린이 세 사람을 마주하며 황당한 눈빛을 했다.
오늘 비무한다는 사람을 저렇게 두들겨 패도 되는 건가?
두 눈을 뜨고 있는지조차 구분이 안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