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제25화
무의 끝은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고 하지 않던가.
수많은 무예의 대가들은 모든 무의 종착지는 결국 하나라고 말한다. 상류에서부터 하류로 뻗어 오기까지 무수한 과정이 있었고, 다채로운 순간을 경험한 물줄기들이 한데 모여 결국 대해를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마의 종주였던 내가 정도의 무공으로 이러한 깨달음을 얻다니.”
참으로 어색했다.
지난 시절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그리고 갈 길도 멀고, 그 길이 매우 험할 것이란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다. 더욱 무수한 경험으로 무공을 체득해야 했다.
실전만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것은 내 근간을 소림으로 하되, 현재 갖고 있는 내력만으로는 소림의 무공에만 의지하기에는 벅차다는 것이었다.
빠름을 느림으로 막아 내기도.
무수한 변화를 단단함으로 견뎌 내기도.
아직은 부족했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알면 알수록 좋다.
실전에서 쓸 수 있는 무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알고 있는 무공이 많으니.
그래서 중요한 순간에 취팔선보로 방심을 이끌어 냄과 동시에 역공까지 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았던가.
적재적소에 쓰일 수 있는 수많은 무공을 관조해야 했다.
특히.
“신법과 보법 그리고 검법.”
경공 혹은 신법은 먼 거리를 더욱 빠르고 편하게 가기 위함이고.
보법은 근접전에서, 혹은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고 넓히기 위해 가장 좋은 발걸음이다.
간단한 움직임 한 번에 마인의 공격을 회피한 것처럼.
신법과 보법은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고.
검법은.
“비수라서 다행이었지. 아마 검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먼저 권법과 장법은 기본적으로 거리 면에서 불리했다. 불리한 거리는 생각보다 많은 변수를 감내해야만 한다.
주먹을 꽂으려면 적의 품속에 파고들어야 하고.
손바닥으로 쳐 내려면 쇠붙이에 치명상을 당하지 않도록 더욱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권각술과 장법이 병장기보다 마냥 약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거리에서만큼은 유불리의 조건이 명백하다.
경지에서 차이가 나는 적이 거리 면에서까지 유리하다면.
게다가 단단함을 겸비한 강인함과 날카로움을 지닌 민첩함까지 지닌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이다.
“……존X 험난했네.”
아마 설화린과 송무, 태강이 아니었다면 생포하는 건 절대 불가능했겠지.
그래서 허리춤에 찬 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때 떠올린 것은 바로.
“검 하면 무당, 화산, 남궁인가.”
물론 종남과 점창도 있고, 그 외에 수많은 문파들이 검공을 자랑한다.
하지만 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문파는 무당파, 화산파와 남궁세가로, 이들 세 문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세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유능제강, 즉 부드러움에 능하고 강함을 이긴다는 이 말은 무당을 위해 존재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수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태극의 묘리를 담은 무당파.
쾌와 변, 환을 갖춘 검술은 매화검수들의 근간이 되며, 화려함 속에 고절한 검결로 상대하기 까다롭기 그지없는 화산파.
무거움과 패기로 수위를 차지하는 패도적인 검술은 녹림의 부법보다도 더 강인하다고 알려져 있는 남궁세가.
“무당이면 태극검공(太極劍功). 화산이면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 남궁이면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
세 가지 검법 모두 고절하기 짝이 없었다. 무당파, 화산파 그리고 남궁세가 모두와 겨뤄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묘한 감정이 생겼다.
정파를 대표하는 검문이라 천마신검보다 강인한 검술이 있는지 호승심이 생겼기에.
한때 무신이자 천마로서 얘네들을 가둬 놓고 패긴 했다. 특히 검 좀 쓴다고 허세 부리는 것도 꼴 보기 싫었고.
아무튼 직접 마주한 검술인 만큼 세 검문의 검술 모두 인정하는 바이나, 아무래도 그중 하나를 꼽는다면.
“창궁무애검이지.”
마의 무공은 부드러움, 쾌속, 변칙과 변화, 환영은 뒤로하고 그저 찍어 누르는 무공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모조리 부수고 파괴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무공.
천마가 되어 천마신공을 익히고 나서부터는 그 재미에 푹 빠지고 크게 매료되었었다.
그리고 무당과 화산 그리고 남궁 중 천마신공의 분위기를 닮은 것은 그나마.
“남궁.”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며 몇 가지를 추려 냈다.
곤륜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극의에 다다르면, 구름 위를 노니는 용과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뿐더러 무려 8번 이상 회전을 펼칠 수 있는 신법이었고.
개방의 취팔선보(醉八仙步).
비틀거리는 특유의 움직임과 변칙적인 행동은 그 누구도 쉽게 예측해 공격할 수 없는 묘리를 담고 있었다.
남궁의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
푸른 하늘마저도 갈라 버린다는, 거칠 것이 없는 패도적인 기세를 담은 검결은 언뜻 천마신검과도 닮은 부분이 있었다.
신법과 보법, 검법까지 완벽하다.
“진짜 이러다가 정파의 모든 무공을 다 익히겠는데.”
아마 정파의 유명 인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성통곡할 일이겠지.
자신들의 비전절기와 진신절기를 환생한 천마가 모조리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복장 터질 인간들이 아마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게, 누가 방심하래?
약해서 무공비고란 비고는 싹 다 털린 너희들 스스로를 탓해야지.
구결을 되뇌며 역근경의 공력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준비한다.
5성에 다다른 역근경.
흉내 낸 권기를 갖고 펼칠 수 있는 백보신권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대력금강장.
이제는 더욱 다양한 무공들로 나를 채우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일로정진보다는 수많은 변수들에 대비할 수 있도록 보다 변화무쌍하게.
처한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도록.
“끄응.”
“……얼마나 잔 거지?”
“하, 움직이고 싶지 않아. 정말로.”
뻐근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일어나는 세 사람이었다.
좀 더 자고 있지. 꼭 중요한 순간마다 일어난단 말이야.
부스스한 얼굴의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서 깨어난 나를 바라봤다.
“무린아, 벌써 일어난 거야?”
“그 와중에 정말 대단해. 부지런하게 운기까지 하면서 몸을 돌보는 거야?”
송무와 태강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린이라면서.
근데.
“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설화린이 황급히 자신의 옷가지로 상체를 가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마치 피해자의 표정을 한 채.
뭔데? 갑자기 또 왜 저래?
“먼저 일어나서 저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겠죠?”
……하아?
나도 모르게 순간 주화입마(走火入魔)가 찾아올 뻔했다. 혈압이 급격히 올랐다.
과거에도 이렇게 화딱지가 나서 쓰러질 뻔한 적은 없었는데.
저 말에 아예 대꾸하기도 싫다. 대꾸하면 내 자존심이 너무 상할 것 같았다.
그런데.
“에이……. 설마 아니지?”
송무가 의문형으로 내게 묻는다.
왜 의문형이지. 때려 달란 뜻인가. 하하.
거기다.
“……그럴 리가?”
태강까지.
이런 씨X.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분노에 내 이마에 힘줄이 솟는 것을 느꼈으나.
한 소리를 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방금까지 역근경을 펼치며 부처의 마음을 떠올린 덕인 듯했다.
내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게 될 줄이야.
“후우우.”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던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최대한 순하게 말했다.
“제발 염X 좀 작작 떨어.”
“어쩐지, 나한테 그렇게 무심한 눈빛을 보낸다 했더니 이렇게 방심할 때를 기다린 거죠! 당신!”
방금까지 같이 마인과 싸우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라고 생각했던 내가 참 밉다.
설화린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한 건 잡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자. 내가 참아.
부처의 마음으로…… 아니, 잠깐.
근데 할 말은 해야지.
“내가 널 왜 건드리는데? 볼 것도 없는 애를 내가 뭐 좋다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순수한 내 마음을 담아 말했다.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꾸깃.
볼 것도 없다니.
절로 표정이 꾸깃해지는 설화린이었다.
“저 봐. 못생겼잖아.”
꾸깃해진 표정을 바라보며 뱉은 내 말에 금세 부들부들 떠는 반응을 보이는 설화린이었다. 못생겼다니? 못생겼다니이!
나 북해빙궁 빙화! 설화! 각종 꽃이란 꽃의 이름은 다 갖다 붙이는 여자야.
“무슨……! 당신! 예쁜 여자 본 적 없죠!”
예쁜 여자? 웃기고 자빠졌네!
내가 어? 천마 때! 어? 아주 나 잡아 줍쇼! 하고 달려든 여자가 몇 명인데! 손에 꼽을 수도 없어, 이년아!
“없긴 왜 없어? 널리고 널린 게 예쁜 여자들인데. 너 같은 애 한 무더기를 가져다줘도 못 비빌 미녀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이건 사실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설화린의 미모가 한껏 피어오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은 아니다.
아직 꽃봉오리 수준이니까.
“이익!”
양손 끝에 빙백장을 펼치는 설화린이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가는 천무린이었다.
두 사람의 술래잡기를 지켜보는 송무와 태강은 혀를 찼다.
“어째…… 화린이도 무린이를 닮아 가는 것 같지?”
“……서로 사랑하면 닮는다던데, 혹시?”
“정말 그럴지도 몰라.”
“미운 정, 고운 정 들다 보면 정분난다던데…….”
송무와 태강의 말에 두 사람은 술래잡기를 하다 말고 고개를 홱 돌리더니 소리쳤다.
“X랄 마!”
“헛소리 마요!”
어째 말하는 순간까지 똑같다.
“저 봐, 귀 밝은 것까지 똑같아.”
절레절레.
* * *
마인을 잡고 난 뒤, 남은 기간 동안 생활은 아주 편했다.
교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소문이 돈 것인지, 그 뒤에 찾아오는 마인이 없었다. 혹시 모를 창피를 당할 원인조차 제공하지 않는 것이 차후에 생길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도일 테니까.
나의 이 흐뭇한 반응과는 달리 다 죽어 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헉…… 헉……. 진짜 죽을 거 같아.”
“나도…….”
앓아누운 송무와 태강은 차라리 마인과 한 번 더 붙는 게 이것보다 낫겠다 싶었다.
앓느니 죽지.
뭔 광명을 찾겠다고.
두 사람은 헐떡이며 자신들이 왜 이런 몰골이 되었는지 상기하였다.
‘어쩌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지.’
조별 임무가 이틀째로 접어드는 날.
송무는 마인들의 움직임이 더는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냈다.
「무린아, 이렇게 시간을 아깝게 날리느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무공 좀 가르쳐 주라.」
송무의 말에 태강 역시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자신들보다 압도적인 실력의 마인과도 대등하게 붙으며 냉철하게 상황 판단을 내리던 천무린의 모습이 꽤 인상 깊게 남은 태강이었다.
같은 후보생일진대.
혹여 천무린은 어느 기연을 얻은 게 아닐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천무관의 밥을 몇 년간 같이 먹은 송무와 태강의 입장에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려야 했지만.
앞서 보여 준 천무린의 신위가 눈에 아른거려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난 휴식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스산한 한마디는 지난 자신들의 과오이자 후회를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그런 말, 아니 생각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현실 속의 고통은 너무 생생했다.
“개수를 더 늘려 볼까.”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제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굳건해졌다.
하지만.
천무린은 눈앞에서 자신들보다 몇 배는 큰 바위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다. 역설적이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