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제23화
마인의 정신을 다른 데 팔리게 한 설화린의 말솜씨도 제법이었지만, 그녀는 태강과 송무에게 조용히 눈치를 준 채 거리를 좁혔다.
그것이 차후에 있을 임기응변을 위한 행동임을 깨달았다.
그녀의 임기응변은 마인을 오롯이 옭아맬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을 벌어 주었다.
잠깐 사이, 내 눈에 마인의 빈틈이 보였다.
마인은 느슨해진 손목 힘과 고민하는 눈빛으로 지금 생각에 잠겼음을 드러냈고, 이는 내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내가 아는 악교운이었다면, 아마 방심한 이 교관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행운을 어찌 눈감고 그냥 넘기랴.
상점이라는데!
검기(劍氣)를 뿌려 대는 절정의 고수가 되진 못했지만, 일류급에 다다르면 내공의 순환이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충분한 내공만 있으면 내가 익힌 무공을 쏘아 낼 수 있는 경지가 바로 일류다.
다만 응축시켜 검기, 권기, 도기 등을 발현하는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엔 미치지 못해 고작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류와는 천지 차이인 경지.
후우웅!
금빛 서기가 삽시간에 모여들더니 내 오른손 주먹에 맺혔다.
신혁건과 맞붙었을 때완 달리 자유로운 자세에서도 기운이 응축되는 등 효율성이 지극히 높았다.
흠칫!
내 기운을 느낀 탓인지 급히 정신을 차린 마인이 나를 바라보았을 땐 이미 백보신권이 그의 지척까지 다가가 있었다.
인질로 잡고 있던 송무와 손에 쥐고 있던 식량을 내팽개침과 동시에 내공을 끌어올려 서둘러 백보신권을 양손으로 마주하는 마인이었다.
꽈앙!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마인은 내가 제 힘을 끌어올린 덕에 몇 걸음이나 물러났고, 나 역시 몇 걸음 물러나야 했다.
역시.
일류라도 같은 일류는 아니란 건가.
무려 5성의 백보신권이었는데도 무너지지 않는 마인이었다.
하지만.
내 노림수는 물러난 마인의 양옆에 포진해 있는 설화린과 태강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의 마인이었지만, 금세 완숙한 일류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빙백장을 펼쳐 내는 설화린과, 땅을 박차 마치 풍차를 돌리는 것처럼 역동적인 동작으로 발차기를 펼쳐 내는 태강이었다.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적어도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적절한 수였다.
타닥! 타다닥! 파악!
마인은 손을 어지럽게 움직이더니 빙백장을 펼쳐 내는 설화린의 손목을 걷어 내며 방향을 틀었고, 또한 태강의 발끝을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 내는 것도 모자라 손바닥에 장력을 실어 태강의 복부를 후려쳤다.
“크읏!”
공중에서 충격을 받은 터라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히는 태강이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태강이었지만, 사실 마인이 제대로 마음먹고 공격을 펼쳤다면 큰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충격이 큰 타박상에 불과했다.
이 두 사람의 연수 합격은 설령 마인에게 치명상을 주진 못했지만, 덕분에 나는 동굴 입구를 완벽히 봉쇄할 수 있었다.
만약 눈앞에 있는 마인만 포박한다면?
귀구의 알도 얻고.
마인을 포박해 상점도 얻고.
이번 조별 과제에서 제법 얻는 것이 많게 되리라.
후후, 꿩 먹고 알 먹고, 라는 속담은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거겠지.
전처럼 백보신권에 기운을 썼다고 탈진하지 않는다. 적어도 두어 번은 더 가능했다.
끌어모은 기운이 양 주먹에 맺힌다.
왼손과 오른손 모두에 금빛 서기가 자연스레 모아졌다.
마인 역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자세를 잡았다.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 걸로 보아 제대로 해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쳇, 방심 좀 해 주지.
이렇게 된 이상, 정면 승부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몇 방 먹여 놔서 마인의 움직임도 조금 부자연스러워졌다는 것.
이기면 상점이고.
비기면 내일부터 고통의 시작일 터.
지면 얄짤없고.
봐라. 저 독기 어린 표정을.
어린놈들한테 좀 당했다고 치졸하게 눈빛이 돌변하는 거 보니.
“좀생이 같으니라고.”
움찔.
들렸나 보다.
그리고 더욱 기운을 세차게 모으는 게.
“왜 자꾸 도발하고 그래요? 자신 있어요?”
내 옆에 설화린이 섰다.
자신 없지. 근데 원래 진지할수록 이렇게 입을 풀어야 하는 법이거든.
“무린이라면 가능할 거야. 우리 꼭 상점 따자.”
창백한 표정의 송무도 일전에 내가 손봐 준 천하삼십육검법의 기수식을 취하며 옆에 섰다.
호오, 그래도 전보단 태가 난다. 제법.
그런 여유 만만한 우리의 반응 탓에 졸지에 상점을 주는 상품 정도로 전락한 마인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 * *
황당무계(荒唐無稽).
마인으로 위장하면서 이런 곤혹감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후보생들에게 위협을 주고 압박을 하는 것이 주임무인데.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하다하다 이런 애송이들이 나를 상점을 주는 상품으로 취급한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날 잡아서 상점을 챙기겠다고?
너무 기가 차서 대꾸할 의지마저 꺾였다.
더욱 어이가 없는 건 농담이 아닌 듯한 저 반응들을 보라.
애들 눈빛이 살벌해진 게 자신을 더욱 어이없게 만들었다.
식었던 단전을 뜨겁게 달궜다.
아무리 후보생에다 핏덩이들이라지만, 태도가 너무 불손하다.
거기다 저놈.
저 노오옴!
17번 후보생 저 노무새끼가 특히……!
이렇게 열 받고 있지만, 그런 반면 머리는 금방 차가워졌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에 막 동굴을 벗어나려던 시점에서 파고들어 오는 공격을 가벼이 막았는데, 지금도 그때 막은 왼쪽 팔이 제 역할을 못 할 정도로 욱신거렸다. 그리고 두 번째 공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후보생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적어도 생도 이상의 수준이어야만 가능한 신위라고 할까.
절레절레.
그럴 리가 없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각 후보생들의 무공 수위를 파악했는데, 그 후 짧은 시간에 생도 수준으로 무공이 훌쩍 뛰어올랐을 수는 없을 터였다.
생각해 보라.
어제 이놈과 붙은 후보생이 남사익이었다.
남해태양궁의 남사익은 고작 이류 중간쯤에 해당하는 수준이었고, 그를 이겼다고 하여도 17번 후보생의 수준은 명백히 이류였다.
그런 이가 고작 하루 만에 일류가 되었다고?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마도 너무 당황해서 혹은 너무 얕봐서 생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마냥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후보생들을 상대하니 손속에 제한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제한을 두자니 정말로 상점을 주는 상품 따위로 전락해 나중에 악교운에게 당할 후환이 두렵기도 했다.
후우우.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찰나.
“왜? 쫄았어?”
씨X.
이젠 모르겠다.
17번 놈의 도발에 그만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
* * *
“정말 미쳤어! 미쳤어요! 당신은!”
겁도 없이 도발하는 내 모습에 설화린은 옆에서 빙백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로 펼쳤다.
내 도발에 눈깔이 돌아 버린 마인의 짓쳐들어오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아니, 인간적으로 그래도 적당히, 라는 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줄기차게 뽑아대는 저 내력이 손끝에 감돌고 있는 걸로 보아 나한테 진심인 거 같은데.
살짝 X됐다 싶었다.
양손을 교차해 역근경의 기세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펼칠 수 있는 무공 중 가장 강한 무공은 백보신권이지만 펼치는 데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두 수, 세 수를 놓고 봤을 땐 소림오권이 더 적절했다.
느릿하고 단단한 바위를 연상케 하는 백보신권이나 대력금강장으로 유연하게 대처하기에는 아직 내 숙련도가 부족했으니까.
달라진 내공으로도 두 무공의 전력을 끌어낼 순 없었으니까.
그래서 소림오권 중 갈고리 모양처럼 꺾은 표권으로 마인의 찔러 오는 비수를 쳐 냈다.
아니, 쳐 내려는 내 움직임에.
핏!
마인은 표홀한 움직임으로 뻗었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공격을 회수하였다.
허공을 헛지르는 내 손등에 비수가 스쳐 지나가서 핏방울이 공중으로 튀었다.
“칫.”
쩌저저적!
차가운 한기로 인해 공기가 얼어붙는 소리가 나며 마인을 위협하는 설화린의 장력. 그러나 마인은 몸을 회전하는 관성으로 피하며 설화린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등으로 팔뚝을 쳐 버렸다.
그 가벼운 행동으로 빙백장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요, 표정이 급변한 설화린은 얼른 내공을 회수해야 했다.
실전 경험까지 완숙한 경지에 이른 마인이었다.
비수를 사용하는 것부터 공격과 방어의 움직임까지 쾌를 추구해 몹시 민첩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호흡을 골랐다.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나 내 몸을 관조했다. 마인의 시선이 설화린에게 잠깐 쏠린 찰나의 순간,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무공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했다.
소림의 무공은 강인하다. 하지만 느렸다.
단단하고 무거웠다.
길게 보면 내가 이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무너질 뿐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머릿속을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무공 중 하나를 선택했다. 당장 활용할 수 있으면서 임기응변으로 쓰일 때 가장 효과적인 무공을.
내 몸이 취한 이의 그것처럼 자세가 흔들렸다.
“어엇!”
흔들리는 내 자세에 비명을 내지른 설화린이 황급히 몸을 날리려 했지만, 마인이 한발 빨랐다. 내 빈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쇄도하는 마인은 비수를 뻗쳐 왔다.
당장이라도 내 어깨에 꽂힐 듯한 비수는 다가올수록 속도가 더해졌다.
뒤에서 빙백장을 펼쳐 오는 설화린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나에게 일합을 먹이겠다는 의도를 보이는 마인이었다.
그렇게도 분했냐.
하지만.
다가오는 움직임에 맞춰 나는 유연하게 허리가 꺾였다. 마치 취객의 움직임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젖혀지는 상체는 마인조차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변칙적이고 변화무쌍한 움직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 보법은.
바로 취팔선보(醉八仙步)였다.
개방의 비전절기 중 하나인 취팔선보가 펼쳐졌다. 역근경과 어우러져 펼치기엔 아직 어색한 감이 있었으나 한 번쯤 활용하기엔 충분했다.
자유분방한 움직임과 그에 따르는 경이로운 유연성은 마인조차 순간적으로 놓칠 정도의 놀라운 활용도를 보였다.
“지금!”
“알고 있어요!”
내가 뒤로 젖힌 상체의 움직임에 맞춰 이미 깊게 비수를 뻗어 온 마인이 뒤로 빠지려는 순간, 설화린이 뒤에서 빙백장을 펼쳤다.
이에 마인은 몸을 틀어 최대한 피하려 했으나, 나는 양손을 뻗어 그런 마인의 어깨를 낚아챘다.
쩌적!
새하얀 빙백장은 정확하게 마인의 오른쪽 오금에 적중했다.
설화린도 파악하고 있었다. 굉장히 민첩한 움직임 때문에 여태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이 다시없을 적기임을.
“크으으.”
마인은 주춤하며 황급히 물러났고, 품속에 있는 비수 두 자루를 나와 설화린에게 뿌렸다.
워낙에 기민하게 뿌렸기에 나와 설화린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그 비수를 쳐 내야만 했다.
멈칫한 순간, 마인은 몸을 날렸다. 동굴 입구 쪽으로.
쳇, 하지만 도망가게 놔둘 순 없었다.
전보다 훨씬 느릿해진 움직임이었다.
빙백장이 역시 효과가 있었다.
“송무!”
그 발로 어딜 가려고!
내 말에 이미 천하삼십육검법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던 송무가 심호흡을 하며 검을 늘어뜨렸다.
비장한 표정의 송무는 당장 울기 직전이었다.
“못 막으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이 새끼야!”
마인보다 내 눈빛에 더 위협을 느낀 송무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