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제17화
“신혁건?”
“나 몰라?”
어떻게 알아, 이 새끼야.
대뜸 8기 누구라고 소개하면, 낸들 어떻게 아냐고?
눈살을 찌푸리는데, 신혁건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게 관심 없을 수도 있겠지. 다만 나 역시 8기라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꾸밈없는 얼굴, 뾰족한 머리칼을 가진 녀석은 팔(八)이라고 적혀 있는 가슴팍 언저리를 가리켰다. 그 뜻은 곧 나와 같은 8기를 뜻했다.
“근데 어떻게 여기에 왔…….”
후보생의 자격으로는 본관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결론은 한 가지.
“생도냐?”
“눈치가 꽤 빠르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개나 소나 생도를 되는 건 아닌지 겉으로 발산하는 기운부터가 여타 후보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백리후, 남사익 등이 아직 후보생에 머물고 있는 이유.
왜 백리후가 첫 진급시험에서 못 올라갔는지 대번에 파악이 될 정도였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지금의 나와 붙어도 최소 동수.
혹은 나보다 조금 앞서는 정도의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제법이네.”
“제법? 하하하! 너, 정말 재밌는 녀석이구나. 이름이 뭐야?”
내 말에 신혁건은 유쾌하게 웃었다.
“천무린.”
내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던 신혁건은 골똘히 생각했다.
“천무린? 음.”
그의 기억 속엔 천무린이라는 이름 석 자가 없었다.
천씨 성이 그리 흔한 것도 아닌데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녀석에게 단 한 치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는 거겠지.
근데 이 녀석이랑 말씨름을 할 새가 없다.
얼른 군수품을 보급 받고 남는 시간 동안 본관 구경 좀 하려고 했더니.
“비켜.”
“어? 아, 어어.”
신혁건은 몸을 옆으로 돌려 공간을 비켜 줬지만, 내가 가는 방향에 맞춰 함께 따라왔다.
성큼, 성큼.
“뭐냐?”
“아니, 궁금한 게 많아서. 난 금방 생도로 진급해 와서 애들이 뭐 하고 지내는지 전혀 모르거든.”
자랑이냐.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해맑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너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기 위해서지. 넌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궁금한 거라면 신혁건의 등 뒤에 있는 창 한 자루 정도.
정파 무림에 창을 쓰는 무가가 없진 않겠지만, 대문파 중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대문파 출신의 여럿 후보생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생도로 올라올 정도의 녀석이라면.
“없어.”
“에? 어째서지? 나한테 정말로 궁금한 게 없다고?”
대충 짐작이 가니까.
강호 무림은 신비한 곳이고, 모래알처럼 수많은 무공, 수없이 많은 기인이사와 은거기인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근데 너 어디 가는 건데?”
“군수관.”
송무 이상으로 호기심이 많은 녀석의 주둥아리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나는 당장 주먹을 출수하기 전에 한 차례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쌈박질하면 징계를 먹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퇴관될 수도 있으니까.
“군수관? 어떻게 가는진 알고?”
흠칫.
맞다. 생각해 보니 난 군수관 가는 길을 전혀 몰랐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신혁건이 빙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대충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옷도 큼지막한 데다 여기저기 다 찢어져서 새로 배급 받으러 온 것 같은데.”
눈썰미도 좋네.
“후,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핵심만 말하라고.
“이건 어때? 내가 너에게 군수관을 가는 길을 알려 줄게. 대신 넌 내가 궁금한 것들에 대해 말해 줘. 너한테도 전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텐데.”
“단, 군수관 가는 길까지만이다.”
“군수관은 여기서 가까워. 기왕 온 거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게 도와줄게. 어때?”
한 시진 동안 이놈이랑 붙어 다니는 게 내게 과연 득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혼자 무턱대고 헤매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안내해.”
“시원시원해서 좋네. 확실하게 알려 줄게.”
씨익 웃은 신혁건은 나를 이끌고 사천무관 곳곳을 구경시켜 줬다.
실상 군수관은 본관 통로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순간 신혁건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수관이 바로 코앞에 있어서 속았다 한들 그가 안내해 주는 각 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더불어 훈련장, 무기고, 기록실, 특별 활동실 등을 둘러본 것은 꽤 유용했다.
“각 반은 어차피 네가 생도가 되면 제대로 소개받을 테니 상관없을 테고.”
“훈련장을 한번 봐. 후보생들이 쓰는 공간 따위랑은 비교도 할 수 없지? 척박한 사막과 푸른 초원을 빗대는 거라고 할까.”
“여기 무기고는 수많은 대장장이들이 각종 무구들을 만들어 내지. 혹시라도 네가 생도로서 크게 활약을 하게 된다면 일반적인 무구보다 훨씬 뛰어난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
“기록실은 각 생도마다 진행한 임무와 과제에 대한 기록을 갱신해 놓지. 단순히 기록만 하느냐고? 아냐. 새로운 기록이 갱신될 때마다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사파의 거두들이나 무법자들에 대한 현상 수배도 여기에 나와 있으니까 잘 파악하라고.”
쉴 새 없이 떠드는 그였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쓸데없는 내용은 쏙 빼고 핵심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송무보다 더 간추려서 깔끔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별 활동실은 뭐지?”
“특별 활동실, 줄여서 특활실이라고 불러. 음, 다른 무관들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천무관이 갖고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기도 하지.”
착각이었다. 제발 핵심만 말해 달라고.
“사람이 평생 무공만 연마하고 살 순 없잖아. 검사들도 활이 쏘고 싶을 수도 있을 거고, 승마를 해 보고 싶기도 하겠지?”
“취미 활동을 말하는 건가?”
“취미라기보다는 활동 범위가 매우 포괄적이야. 혹 수렵과 채집 활동을 하게 되면 담당 교관과 함께 그와 관련된 활동을 수업 대신 하는 거지.”
이런 것도 있었나.
신기하긴 했다. 마교의 마도관에서는 이러한 교육 방식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오직 무공 단련으로만 점철된 시간과,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극단적으로 적은 자유 시간만 있었기에.
그래서 수많은 마도관의 동료들은 오로지 싸움에만 미쳐 있었는데, 여긴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렇군.”
“신기하지?”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다 됐다는 뜻이었다.
“난 이제 돌아가야 해. 궁금한 게 있으면 돌아가는 동안 모두 질문해라.”
어지간해선 이런 호의를 베풀지 않겠지만, 내가 원했던 것 이상의 정보를 뽑아낼 수 있었기에 몇 가지 질문 정도엔 답을 해 줄 생각이었다.
터벅- 터벅-
본관의 동문을 향해 걸으며 신혁건은 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기회를 줬으니 질문할게. 첫 번째로 백리후는 여전히 잘 지내지?”
“백리후?”
녀석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음? 왜 모르는 척하지. 8기라면 나와 같이 진급한 녀석이 백리후의 형제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텐데. 어찌나 동생 걱정이 많던지 궁금해서 말이야.”
진급한 녀석들 중에 백리후의 형이 있었나.
송무에게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정보였다.
“잘 지낸다. 아마 차기 생도 진급에 가장 유력한 놈이겠지.”
있는 그대로 말했다. 말 그대로 백리후는 현재 8기 후보생 중에선 독보적인 놈이었다.
“후후, 그렇군. 뭐, 녀석이 좋아하겠어. 그럼 두 번째 질문.”
신혁건의 눈매가 휘었다.
“말해라.”
“넌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야?”
뭔 질문이 저따위람.
표정이 찌푸려지며 한마디 하려는 찰나.
“아하하, 질문이 좀 그랬나? 오해는 하지 마. 내가 지금 네 기도를 읽을 수가 없어서 그래.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전에 살펴봤을 때도 몸이 좀 많이 튼튼해 보이던데.”
역시 눈썰미가 좋은 놈은 이래서 피곤하다.
“지금 내 경지가 이류에서 일류로 넘어가는 중이거든. 후보생들 평균이 이류 초입을 갓 벗어난 수준이라고 한다면, 내가 너의 힘을 가늠하지 못하는 게 이해가 안 되거든.”
그리고 너무 직설적이고 솔직해서 피곤했다.
그건 내 전매특허인데.
“굳이 말해 줘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강해진 이유를 너에게 설명해야 해?”
“아니. 근데 궁금하잖아. 백리후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1차 진급 땐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불과 몇 개월 만에?”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에 신혁건이 씨익 웃었다.
“맞지. 그것도 맞는데…….”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본관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신혁건의 등 뒤에 꽂혀 있는 창이 쏜살같이 뽑히며 나를 찔러 왔다.
위협적인 기세로.
환생한 이후 처음 느껴 보는 위협이었다.
후우우웅!
있는 대로 내공을 끌어올려 대력금강장을 펼쳐서 찔러 오는 창대의 옆을 후려치며 방향을 틀었다.
타아아악!
그러자 튕겨 나간 힘을 동력 삼아 그대로 크게 회전하며 창에 더욱 힘을 실어 내는 신혁건이었다.
이렇게 유연하고 낭창한 창법이 있었던가.
“하하! 제법인데. 역시 허세가 아니었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고!”
“이게 무슨……!”
또라이나 다름없었다.
휘몰아치는 창격에 나는 연이어 역근경의 금빛 서기를 통해 대력금강장을 펼쳐야 했다.
창이라는 긴 병기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뽑아내는 창격에 장법으로 쳐 내는 것만이 현재 내게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승부를 보려면 결국 녀석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한 방을 먹일 수밖에 없는데.
쾅! 쾅!
하지만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통로 밖에 있는 인원들은 통로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여기에 들어와서 공격하는 거냐?”
“교관들을 제외하고는 이 통로를 이용하는 인원은 거의 없지. 근데 교관들이 이용하는 시간대도 정해져 있거든.”
역시나.
신박한 또라이다.
“거기다 나도 괜히 걸려서 벌점 받으면 좀 그렇고.”
“그런데도 이런 짓을 한다고?”
“재밌잖아.”
재밌다라, 나랑 같은 부류인 거 같기도 하고.
후우.
신혁건은 연신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통로 밖으로 보이는 해무리가 져 가는 모습을 보며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혀야만 했다.
이놈 때문에 늦어서 벌점 받기만 해 봐라.
그래서.
나는 허리춤에 오른손을 갖다 댔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최고의 수, 아직까지 방심하고 있는 놈에게 한 방을 먹이려면 아껴선 안 되는 한 수.
아껴서 똥 되기 전에 후딱 써 버려야 했다.
“응? 자세가 어정쩡한데.”
신혁건은 창대를 잡아 마치 뱀의 머리가 움직이듯 창머리를 유연하게 휘둘렀다.
“처음부터 권법이랑 장법도 그렇고. 역시 따로 스승님이 계신 거냐?”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았다. 오른쪽 주먹에 휘감아지는 기운을 느끼며 집중했다.
최소 동수, 혹은 나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의 녀석이지만, 내 호승심은 들끓었다.
싸움을 걸어온 상대를 보고 꽁무니를 빼는 건 어차피 나하고는 전혀 맞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덤벼드는 녀석은 지그시 밟아 줘야 직성이 풀렸다.
우우웅!
3성 정도에 불과한 역근경의 기운이었지만, 마치 소용돌이치듯 내 오른손에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