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제14화
다 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
무신 천무린, 나이 81세.
겪어 본 세월이 몇 년인데, 얘가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랴.
척하면 착이다.
“다 됐다.”
우에에엑!
토해 내듯 쏟아내는 것은 검디검은 울혈이었다. 울컥거리는 것들의 정체인 듯했다.
“뭐, 뭐야. 이게 내 몸에 있었던 거야? 우웁!”
몸속을 활개치고 다니던 기운들은 금방 사라졌지만, 노폐물과 찌꺼기들은 달랐다. 처음 겪어 보는 기현상에 송무의 몸속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으으.”
정신을 못 차리는 송무의 모습에 혀를 찬 나는 녀석의 굽어진 등을 바르게 세워 줬다.
“뒤처리는 차후에. 지금 중요한 건 네 몸속에 지나간 흔적들의 경로를 소주천하는 일이야.”
강제로 가부좌를 틀게 한 나는 송무의 괴로운 얼굴에도 개의치 않고 역근경의 흐름을 몇 번이나 복기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괴, 괴로워.”
사납게 몸속에서 휘몰아쳤던 기운은 지금도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었고 계속해서 헛구역질이 났지만, 그때 들리는 단호히 내리누르는 음성.
“껍질을 깨고 싶으면, 전과 같이 나약하게 굴고 싶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순간들.
종남파의 삼대 제자 항렬.
장문인의 사제인 도량진인을 스승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전수받은 천하삼십육검법을 아무리 익혀도 따라와 주지 않던 재능.
늘그막에 얻은 제자라며 좋아하던 도량진인은 단 한 번도 그런 자신을 질책한 적이 없었지만, 늘 죄스러웠다.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에.
제자 된 도리로서 단 한 번이라도 스승님을 웃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대부분이 섬서무관으로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자신만 사천무관으로 향한 것은 바로 도량진인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런 배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다시 당하고 싶냐? 힘이 없어서. 무공이 약해서. 그저 그런 놈으로 세상을 떠돌다가 사라지고 싶으냔 말이다.”
묵직한 음성에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쳤다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울컥하고 치솟는 울혈보다 다시는 없을 기회를 잡는 게 더 중요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명이.
희미해지는 의식과.
명멸하는 시야와.
마모되어 가는 정신력.
번쩍!
하지만 송무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기회를 반드시 잡는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굽었던 허리가 꼿꼿해졌고, 가부좌는 더할 나위 없이 정직했다.
그리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탕된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피식.
나는 그 모습에 가만히 옆에 섰다.
아고, 녀석아.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살지.
우웅!
그리고 곧 송무의 주변으로 비치는 금빛 서기에 나 역시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 * *
남사익.
남해태양궁의 오롯한 주인인 태양궁주의 둘째 아들.
타오르는 적발과 염왕을 연상케 하는 불그스름하고도 짙은 아미는 태양궁주의 호방한 기세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그런 그가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며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칠 주야를 지내면 뭐가 달라지는가? 애꿎은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 얼른 설 소저에게 조장 자리를 넘겨주어야 할 터인데.”
“됐어요. 내가 당신한테 언제 부탁했나요?”
굳이 자신을 위해 나서는 남사익의 호의 자체가 불편한 설화린이었다.
자기 딴에는 날 위해서 한 행동이겠지만.
설화린의 입장에서는 아주 난처하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그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남해태양궁 자제와의 약혼은 전 북해빙궁주이자 전대 대빙천검(大氷天劍) 설상일이 저질러 놓은 일이었다.
손녀딸인 자신을 이렇게 팔아 버린 자신의 조부에게 치가 떨렸고, 정략결혼으로 팔려 가는 게 너무도 싫었던 설화린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천무관을 택했다.
적어도 후보생이 되면 졸업할 때까지 북해빙궁에서도 혼인을 서두르진 못할 테니까.
더 나아가 이 느끼하기 짝이 없는 남사익의 얼굴을 보는 것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도 자신을 따라 입관했던 것이다.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후.”
그리고 불편함 이상으로 일을 벌이는 이런 행동이 결코 좋아 보일 리 만무했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
거기다 이런 남사익의 정신 나간 행동을 흔쾌히 수락하고 조별 과제의 일정까지 뒤로 미뤄 준 악교운의 생각이 궁금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왔다.
표정부터 걸음걸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설화린이 노리던 조장 자리를 홀라당 가져간 놈이었다.
“천. 무. 린.”
옆에 있는 남사익만큼이나 싫은 인간이다.
가뜩이나 설화린 본인은 가지고 싶어도 못 가져서 안달이 난 자리를 홀라당 뺏어 가고도 그 자리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 짓는 뚱한 표정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후, 화린아, 교양. 교양.”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추스른 뒤 걸어오는 천무린을 다시금 바라본다.
그 와중에도 궁금증이 생겼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확 바뀌어 버린 그에게 느끼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했다.
갑작스레 고강해진 무공하며.
워낙 하위권에다가 별 볼 일 없는 집안 배경 때문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확 달라진 외모하며.
만사가 다 귀찮다는 저 표정만 빼면, 지금 후보생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로 모두의 주목을 끌고 있는 남자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눈부신 외모를 보고도 마치 어린애를 보듯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발끈하게 되는 설화린이었다.
“흥.”
설화린은 속에서 들끓는 감정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왔군. 근데…….”
남사익이 설화린의 옆에 서서 천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뭔 짓을 하고 왔길래 저런 몰골인 건가. 고작 칠 주야 동안 특훈, 뭐 그런 거라도 하고 왔단 건가. 후후.”
그저 우습다. 우스울 따름이었다.
나를 이기기 위해 고작 그 정도 시간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송무라는 녀석의 몰골도 심상치 않았다. 두 눈이 파이다시피 움푹 들어갔고, 양팔과 양다리는 덜덜 떨리는 듯 보였다.
“둘이서 무언가 하긴 했나 본데, 어림도 없는 짓이지.”
남사익은 그저 코웃음을 쳤다.
황태?
그 잡놈을 이긴 걸로 천무린을 떠받들고 있는 이 무관의 분위기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애들 눈높이가 고작 그 정도라는 건지.
수준이 낮은 건지.
아니면.
“후후, 내가 너무 강한 거겠지.”
남해태양궁 내에서도 자질과 무공에 대한 재능으로는 감히 나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재능이 노력을 이길 수 없다?
우스운 소리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다시 한번 웃긴 이야기다.
왜냐고?
나는 그 세 가지 모두를 타고난 놈이니까.
남사익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 자신의 앞에서 백리후든 천무린이든 뭐든.
“제법 요란하게 등장하는군.”
악교운의 나직한 한마디에 연무장에 모인 8기 후보생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길게 말해 시간을 더 이상 끌 필요가 없지. 무려 칠 주야나 시간을 버렸으니 말이야.”
그 말에 송무가 혼자 툴툴거렸다.
“정작 이런 자리를 만든 사람이 누군데…….”
고개를 돌리는 악교운이 지그시 송무를 바라봤다.
“29번 후보생?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흠칫.
“아, 아닙니다!”
노려보는 악교운의 눈매에 송무는 그저 바들바들 떨며 내 뒤에 휙 하니 숨었다.
악교운의 강렬한 눈빛에 나는 한 걸음 나서며 헛기침을 했다.
“네, 저도 좋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근데, 17번 후보생의 그 몰골은?”
악교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후보생에게 지급하는 무복이 거의 넝마가 되다시피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팔꿈치, 무릎, 어깨 등 어지간하면 노출되지 않을 부위들이 죄다 노출되어 있었다.
“아, 예. 뭐. 그냥 열심히 단련 좀 했습니다.”
정말로 소림 72절예에 푹 빠져 칠 주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단련했다. 아마 송무가 아니었으면 오늘도 정신없이 단련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아쉬웠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역근경에 대한 이해도가 더욱 깊어졌을 텐데.
아마 이 대련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레 조별 과제에 임하느라 정신없을 테니 말이다.
“단련이라……. 본 무관에서 가르쳐 준 적 없는 훈련법인데.”
가뜩이나 전에 악교운에게 여러 가지 활용했던 무공들을 들킨 바 있었는데, 이번에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뭐 어때.
어쩔 건데? 그걸 빌미로 나를 자르기라도 할 거야, 뭐야.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걸로 훈련했습니다. 자, 얼른 시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반응하는 놈은 눈앞에 따로 있었다.
“후후, 이 몸하고 대련한다니까 무섭더냐. 어디 산짐승이랑 산에서 뒹굴기라도 한 게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테니까.”
“뭐래?”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네가 행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든 내게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대신에 아프지 않게 살살할 것이다.”
“하, 뭐 이런 병X이.”
혼자 지껄이면서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빡치네.
“한껏 두들겨 패서 네 머리 색깔로 만들어 주지. 그리고 X같은 머리를 들이밀면서 꼰대 같은 말투 좀 그만 썼으면 좋겠단 말이지.”
그 말에 바로 표정이 굳는 남사익이었다.
“허? 한껏 두들겨 패? X같은 머리? 꼰대? 허허.”
눈빛이 돌변하며 고개를 돌려 악교운을 바라보는 그였다.
“교관님, 정말로 이번 승부에서 이기면 조장직은 설화린 소저……. 아니, 23번 후보생에게 돌아가는 게 맞습니까?”
의당 그래야 할 거라는 표정을 짓는 남사익에게 악교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버릇없는 후보생의 모습에 악교운 역시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 새끼, 상황 파악 더럽게 못 하네.
표정 관리는 더더욱 못 하고.
악 교관한테 처맞아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지만.
“이기면 뭔들.”
그 말에 남사익이 씨익 웃었다.
“후회하지 말도록.”
양손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넘실거리다 못해 열양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남해태양궁이 자랑하는 열양장이자, 남사익이 자랑하는 무공이다.
황태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자유 연무이기에 본신절기를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악교운의 말 덕분에 남사익은 자신의 내공을 마구잡이로 개방했다.
후와아아악!
“와……. 정말 주변의 공기가 후끈해졌어. 이게 남해태양궁인 거야?”
송무의 말에 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남해태양궁. 저 정도 공력이면…… 위험할 것 같은데.”
태강의 말에 송무는 남사익과 대치하는 천무린을 바라봤다.
“히히.”
“왜 웃는 거야? 송무.”
“위험하다는 말이 과연 무린이에게 어울리는 말인가 싶어서. 봐 봐. 저 표정이 남해태양궁이란 이름에 질겁한 표정인지 또는 열양장에 당황한 표정인지 말이야.”
힐끔.
시선을 돌린 태강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좋게 표현하자면.
“싸움광. 혹은…….”
나쁘게 표현하자면?
“양아치 같은 눈빛이랄까.”
말 그대로 천무린의 눈빛은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