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제13화
정직하다.
곧고 묵직하고 빠르다.
그리고 안정감이 느껴지며 차근차근 차오르는 기운에 온기가 있다.
정파의 무공들을 섭렵하면서 느낀 점이다.
패도적이고 파괴적인 무공, 누구보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무공만을 익히던 내겐 전혀 익숙지 않았던 무공의 결(決).
하지만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나에게 어울리는 결.
나를 구속하고 있는 금제, 금살.
빌어먹을 금제 때문에 나는 살의를 일으킬 수도, 누군가를 살인멸구를 할 수도 없는 몸이 되었다.
내 손에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거늘, 이 무슨 운명인지 이젠 내 손에 피를 함부로 묻힐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몸에 걸맞고 나를 지켜 줄 무공을 진득하게 익힐 필요성을 느꼈다.
다양한 무공에 대한 해석과 경험, 지식으로 수많은 무공을 섭렵하고 파훼법까지 알고 있지만, 과거 무신이었던 내 육체와 달리 지금은 나약한 몸뚱어리뿐.
먼저 택한 무공에 몰두하면서 차근차근 넓혀 나가는 것으로 생각의 전환을 한 나는 곧바로 하나의 무공을 떠올렸다.
소림.
첫 무공은 바로 소림의 무공이었다.
소림의 외공과 내공은 정파뿐 아니라 중원 무림 전체를 놓고 봐도 최고 수준이었다. 금강석과 비견될 지고한 경지, 금강불괴의 몸으로 만들어 준다는 무공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고, 실제로 나도 본 적이 많았다.
어디 그뿐이랴.
백 보 밖에서도 주먹을 날려 바위를 깨부순다는 백보신권.
부처님의 손바닥과 같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장법, 대력금강장 등.
상승 무공도 남다르다.
꽈악.
넘실거리는 살덩이들에 힘을 주자, 섬세한 근섬유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 벌써 소림의 구결을 읽은 덕이었다.
지방을 불태우고 살을 빼려고 X랄 발광하던 시기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말이다.
이러려고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하지만 그 노고도 모르고.
“엑? 그게 훈련이야? 무린아?”
이 새끼는 또 눈치 없게 말을 꺼낸다.
“불만이냐?”
“아무리 그래도 당장 남사익을 상대하려면 제대로 된 무공에 집중해야지…….”
염려 가득한 말이었지만, 다 개소리다.
넌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마교에도 이와 같은 외공과 내공을 단련하는 수련법으로 패왕력(霸王力)이라고 불리는 수련법이 있었다.
당시 마도관에서 가장 처음으로 익히는 수련법이었고, 교관들은 내게 소림의 72절예보다 뛰어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나 역시 기본적인 묘리를 마도관 생활 때 익혔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겠다.
태양 앞에 반딧불과 같았음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소림.
중원 무림 내 북소림(北少林), 남무당(南武當)이라고 불릴 만큼 정파 무림의 가장 견고한 성벽이자 보배.
나 역시 소림을 봉문시키기 위해 수많은 인력을 낭비해야 했고,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백팔나한(百八羅漢)과 평범하게 숨어 지내던 소림의 은거 기인들의 대거 출현은 천마신교의 검은 물결을 며칠이나 막아 냈던 것이다.
특히 마교의 마공과 상극인 불가의 무공과, 심심찮게 외워 대는 나무아미타불은 정말 소름이 끼쳤다.
거기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밖에 통하지 않는 돌덩이 같은 녀석들은 내력이 아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부딪쳐 왔다.
나라도 질려 버릴 수밖에.
그래서 감탄했고, 나는 봉문하는 즉시 소림의 온갖 비전절기와 상승 무공을 털어 버렸다.
후후.
직접 몸으로 느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소림 72절예(少林七十二絶藝)는 매우 특이했다.
형과 식이 있는 무공과는 궤를 달리했다.
누가 보면 그저 건강 증진을 위한 운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훈련.
그 방법이 무식하고 매우 괴랄해서 사람들이 보면 과연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 맞느냐고 의심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역근경이라는 희대의 무공을 모를 때의 이야기다.
역근경(易筋經)을 운용하며 72절예를 단련하면 그것이 곧 금강불괴(金剛不壞)로 가는 직진 선로가 되니까.
아마 내가 역근경 비급을 털었기 때문에 지금의 소림은 겨우 입에서 입으로 차기 장문인에게만 겨우 전달되지 않을까 싶다.
우웅!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역근경의 내공구결을 줄줄 외웠다.
금빛 서기가 은은하게 풍길 때, 나는 주저 없이 움직였다.
이마를 단단한 나무에 처박고.
바위에 검지를 찌르고.
송무를 통해 나무판으로 내 온몸을 두들기게 하는 등.
미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무, 무린아, 이거 정말 맞아?”
송무는 애써 미소를 잃지 않으며 미친 짓을 하는 나를 지켜봤다.
그나마 녀석은 뭔가 내게 생각이 있겠지,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설화린과 태강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저게 훈련이라고요?”
“남사익과의 대련을 대비한 훈련이라. 난생처음 봅니다. 어느 누가 저렇게 무식하게 훈련한답니까?”
“그냥 무서우면 무섭다고 포기하지. 우릴 대표하는 사람이 저런 사람이라니, 쯧.”
설화린은 멀쩡하게 생긴, 아니 좀 많이 잘생긴 내 외모가 아깝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생긴 건 귀공자인데, 하는 짓은 파락호에 가깝다.
고개를 내젓는 그 모습에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니들이 뭘 알아.
소림의 십팔나한, 백팔나한은 그냥 만들어지는 줄 아냐.
호흡을 내뱉고 상승 무공만 익히는 게 아니라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여야만 하는 소림의 특성은 지금의 내게 최적의 무공이다.
체질상 조금만 먹성 좋게 먹어도 살이 금방금방 불어나 버리니까.
무인에게 살덩이는 그저 방해만 될 뿐. 불어나는 살덩이를 막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다.
먹는 걸 줄이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어디 쉽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래 봬도 중원 무림에서 최고의 자리에 섰던 나다.
입맛이 웬만큼 까다로워야 말이지. 오직 산해진미(山海珍味)만 찾아 먹던 나다.
지금이야 무관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리고 체질을 위해 식도락도 내려놓고 살지만, 사람이 가진 3대 욕구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소림의 역근경과 72절예를 몸소 체득하며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했다.
하지만 그게 단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응?”
“무공 가르쳐 달라며?”
근데 이건 좀.
송무의 표정이 아찔해졌다. 이걸 따라 하라고?
“싫어?”
“아, 아니.”
황태에게 죽도록 얻어맞을 때까지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하던 미련한 놈이기에 미리 단련시켜 놔야 했다.
“요즘도 건드린다며?”
잔뜩 독기를 품은 황태는 빈약해진 자기 무리를 이끌고 여전히 송무를 괴롭혔다.
아마 나한테 화풀이를 할 수 없으니 송무에게 하는 거겠지.
그렇다고 매번 내가 나서서 막아 주거나 혼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의 간악함까지 내가 어찌 다 막아 주리.
“…….”
그토록 말이 많던 놈이 내 적나라한 말에 그만 고개를 떨궜다.
아마 말은 안 했어도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감당하기 버거울 거다.
여린 놈이다. 그리고 단단해지기엔 정이 많은 놈이다.
그놈들도 송무가 이런 성향인 걸 알기에 계속해서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이겠지.
그러니 그럴수록 더욱.
“견뎌 내지 못할 거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응?”
고개를 드는 송무였다.
천무린이라면, 기적 같은 일들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지만.
“싸워서 이겨야지.”
“……무린아, 황태야. 황태라고. 무공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비록 내게 무참히 짓밟히고 밟혀서 후보생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아직도 활개치고 다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네가 쉽게 이겨서 몇몇 녀석들이 맘먹고 달려들었다가 개박살이 났단 말이야.”
그랬나.
나로 인해 황태에 대한 거품설이 심하게 돌았고, 그 거품설은 많은 후보생들에게 용기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후보생들의 용기 아닌 만용은 참사를 불렀고, 꺼져 가는 황태의 촛불을 다시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부하 1호 놈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놔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뭘 보고만 있어? 어서 따라 해.”
“엥, 나보고 이걸 따라 하라고? 바위에 손가락으로 찌르다가 잘못하면 부러지겠어!”
금방 울상이 되어 버린 송무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몸에 때려 박아 줄 테니 내공의 흐름을 네가 알아서 기억해 내고 또 기억해라. 그리고 이 수련법을 펼칠 때마다 내가 때려 박아 준 걸로만 수련을 하는 거야.”
역근경의 구결을 알려 주면 바로 알아듣기도 힘들거니와, 굳이 소림의 상승 무공을 알려 줄 필요도, 차후에 생길 의혹을 더욱 키워 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편한 방법을 선택했다.
가부좌를 튼 송무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입술이 꾹 닫힐 정도로 억지로 막아 놓고 나는 씩 웃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송무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주 나긋나긋한 말투로 이야길 꺼냈다.
“잠깐이야. 아주 잠깐. 다 지나갈 일이잖아? 포기하면 편해.”
그리고 나는 뒤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는 양손을 송무의 등에 얹었다.
살포시.
“아 참, 말했나? 입 열면 너 죽어.”
씨익.
내 말에 송무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아야만 했다.
“읍읍!”
“야야, 대신에 강해질 수 있어. 어때?”
당근과 채찍이다.
금방 고분고분해지는 송무였다.
강해질 수 있다는데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렇게 송무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넘어가 강제로 주입되는 내력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절로 벌어지는 입을 굳게 닫고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삼켜야만 했으며, 식은땀이 맺히고 맺혀 흘러내려도 버텨야만 했다.
행하고 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그렇지.
사실 이 작업은 행한 자와 받는 자 모두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어지간한 내력의 운용에 뛰어난 이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
더군다나 보잘것없는 적은 내공으로 이를 행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
단 하나다.
무신 천무린이니까.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송무에게 이것을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나마 내 옆에 있는 놈이라곤 이 녀석이 가장 믿을 만하다는 점.
정파 무림의 무공으로 단시간에 강해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절절이 느낄수록 내 옆에 이 녀석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천마 천무린의 시절에도 수많은 위협이 있었고 나를 잡겠다고 펼친 천라지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부하들이 나를 위해 처절하게 싸워 주었다.
천마신공을 익힐 때도 그랬는데.
이토록 더딘 백도 무공으로 강해지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일신의 무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눈먼 칼에 맞을 수도,
천라지망과도 같이 수없이 공격해 오는 이들에게 지쳐 버릴 수도 있었다.
세상사가 모두 내 맘 같을 순 없으니 말이다.
내력은 송무의 혈도를 마구 헤집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송무에게 역근경의 묘리를 때려 박는다.
“끄으으읍.”
입을 꽉 다물고 파도처럼 파고드는 내력의 흐름을 기억하는 데 열중하는 송무의 눈이 충혈되었다.
투둑. 투두둑.
실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벌게진 두 눈은 송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격통!
그럴수록 머릿속이 하얘져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을 때.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진짜 죽는 거야.”
내 말에 송무는 억지로 정신줄을 붙잡고 이가 부서져라 꽉 깨물었다.
몸속을 샅샅이 파고드는 내력은 백회혈부터 회음부, 손끝부터 발끝까지 노도처럼 휘몰아쳤다.
투둑. 투둑.
울컥하고 치솟는, 목에 걸리는 무언가.
비릿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그게 불쾌하다고 입에 뱉었다간.
“그럼 조지는 거야. 알지. 황태 쥐어 패러 가야지.”
……그래, 황태 쥐어 패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