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제12화
“귀찮은데.”
그저 말뿐이 아니라 정말 귀찮았다.
조장을 해서 점수를 얻을 시간에 무공 한 구결을 더 외우는 게 훨씬 이득이다.
시간이 금인 셈이다.
“나 좀 내버려 두지.”
그 반응에 부아가 치민 건지 표정이 샐쭉해진 설화린은 대담하게 손을 들었다.
“아니, 당연히 제가……!!”
자신에게로 시선을 끌려는 설화린의 시도는 태강이 입을 열면서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넘어갔다.
“최근에 인상 깊은 모습들을 많이 봤는데, 천무린 정도면 납득 가능하지.”
꾸깃.
그나마 조원으로 믿고 있던 태강마저 자신이 아닌 천무린의 손을 들어 주다니.
그녀는 표정을 구기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태강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같은 조니까 편하게 말할게. 화린아. 저래 봬도 뒤뚱거리던 모습을 탈바꿈해서 노력하는 자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고, 거들먹거리던 황태 일행을 완벽하게 꺾어서 뛰어난 무공 실력도 증명했어.”
뒤뚱? 그거 칭찬이냐.
내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마친 태강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뿐이겠나.
대문파 소속이 아닌 태생에도 불구하고 필기와 무투 성적 모두에서 최우수 성적을 거두고 있는 천무린은 날이 갈수록 8기 후보생들 사이에선 백리후와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었다.
특히 군소 방파 후보생들은 의당 그를 밀고 있었다.
대문파 출신의 백리후나 그 일행처럼 콧대가 높지도, 다른 이들을 깔보지도 않았다.
태강은 그런 사실을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굳이 뒷말을 잇진 않았다.
제아무리 태강이 말을 해도 설화린의 꾸깃꾸깃한 표정과 불편해진 심기는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았기에.
자신의 미모에 홀려 허우적대던 송무와 태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천무린의 손을 들어 주자, 설화린은 초조한 나머지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조장이 되면 자연스레 가산점이 붙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조장 자리를 차지하려 했지만, 이 굳어진 여론을 억지로 뒤집을 순 없었으니.
비단 이 조뿐만이 아니라 각 조에서도 분란이 많아 보였다.
하긴, 쉽게 양보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조장이라는 자리를 맡기만 해도 가산점을 준다는데.
“조장은 내일까지 정해서 각 조의 교관들에게 보고할 것. 한번 정해진 조장은 바꿀 수 없다.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하도록. 조장의 개인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
어쩌면 저 인간은 이런 분란이 일어날 줄 알면서 조장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가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겠지.
미리 언급을 해 줬겠지.
하지만 악교운은 그 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아서 하라는 듯한 얼굴을 했고, 그를 필두로 다른 교관들도 각 조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호기심 많은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번쩍!
송무가 해맑은 얼굴로 손을 든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평소 참지 못하는 그에게 익숙한지 악교운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또 뭔가, 29번 후보생?”
“조장의 개인 능력이 왜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그거야 그때 가서 알려 주는 게 백미 아니겠나. 미리 알면 재미가 없지.”
대답을 한 악교운은 송무의 옆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녀석을 응시했다.
조장이라는 자리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듯한 반응.
악교운은 자연스레 눈에 이채를 띠었다.
또 저 녀석이 눈에 띈다.
17번 후보생, 천무린.
분명 북해빙궁의 금지옥엽이 저놈보다 존재감이 덜하진 않았다.
가진 배경하며, 이름값하며, 하다못해 성적을 놓고 봤을 때도 설하린이 천무린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저 녀석이 또 사고를 칠 거 같다.
그래서 즐거웠다.
근래 들어 자신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고 있는 존재이니까.
그러다가 악교운 역시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고개를 천천히 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과도한 관심은 별로 좋지 않을 테니.
벌써 반각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내 눈엔 벌써 몇몇 조에서 조장이 벌써 정해진 것이 보였다. 불협화음이 크게 일어난 곳은 별로 없어 보였다.
방금까지 설화린이 설쳐 댔지만, 송무와 태강이 자신의 손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푸념 어린 푸념을 하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적색의 머리칼과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설 소저!”
나는 간만에 듣는 호칭에 고개를 들었다.
와, 여기서 후보생이 아닌 호칭을 쓰는 놈이 다 있네.
대가리가 빈 것이거나 아예 생각이 없는 놈이겠지.
후보생들 사이에는 소저 따위의 호칭은 생략하도록 했으나, 그런 규칙을 무시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로 눈앞의 적색 머리칼의 후보생이었다.
아직 뭔가를 잘 모르는 놈인가 본데, 여기 총교관은 나보다 더한 놈이라 한 소리 들을 텐데?
……근데.
악교운이 별말 없이 넘어간다.
에? 불공평하다. 왜 그냥 넘어간대?
그런 의문을 갖고 있는데, 악교운은 정말로 못 본 척하고 넘어갔다.
스쳐 지나가는 파락호 같은 후보생을 슬쩍 바라보는데.
“오호, 제법.”
느껴진다. 관자놀이 부근의 태양혈이나 거친 투기가 황태 이상의 기운을 가진 놈이라는 게.
“남사익 후보생?”
“남사익이면 남해태양궁의?”
남해태양궁?
새외삼궁에 있는 놈들이 죄다 몰려왔구먼.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했지만, 설화린은 남사익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와 반대로 남사익의 두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지만.
안 봐도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
한쪽에 치우쳐 있는 애정 전선, 뭐 그런 거 아닐까.
이때쯤 등장할 때가 됐는데.
“큼큼, 여기서부턴 내가 등장할 차례인 거 같은데. 새외삼궁의 끈끈함은 익히 알고 있지? 설화린은 북해빙궁주이자 빙천검(氷天劍)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설종량의 셋째 딸, 남사익은 남해태양궁의 태양궁주 남선의 둘째 아들인 만큼 두 사람이 곧 혼인을 할 거라는 풍문도 돌고 있어.”
역시 정보통! 송무였다.
기가 막힌다. 척하면 착이었다.
그 말에 남사익이 타오를 듯한 적발을 휘날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맞아. 거참, 자네 이름이 뭐랬지? 아주 마음에 드는구먼. 들리는 풍문? 아니야, 그건 진짜라고.”
만족스레 말을 꺼내는 녀석이었고, 말이 참 많은 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일을 갖고 걸고넘어지지 마세요! 전 동의한 적 없으니까.”
뾰족한 목소리로 말하는 설화린의 말에 남사익은 그저 꾀꼬리가 지저귄다는 느낌으로 들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말이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거라오. 설 소저.”
“당신, 대체!”
잘들 논다.
나는 그 모습에 그만 혀를 찼다. 굳이 더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한 차례 고개를 젓고는 송무와 태강에게 말했다.
“아무튼 너네들끼리 놀 거 놀고, 조장도 알아서 정해서 이름 적어.”
연무장에서 벗어나려는 내 모습에 남사익이 힐끗 바라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조장? 당연히 설 소저의 차지가 아닌가?”
당연한 사실을 왜 자신만 아느냐는 반응을 보이던 그는 자연스레 송무와 태강에게 따졌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설 소저보다 위라고 생각하는 겐가, 정녕?”
말투 하나 참 거슬린다.
쥐어 팰 수도 없고.
분명 쥐어 팰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아, 황 뭐시기인가 그놈들 손봐 줬다고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보게, 자네는 사천무관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말이야, 이곳을 나가면 더 큰 세상이라는 게 있단 말이지.”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그러니 욕심일랑 부리지 말고 격이 맞는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그대의 조를 정녕 살리는 길 아닐까.”
마치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씨불거리는 녀석의 표정은 한껏 뿌듯해 보였다. 설화린의 앞에서 내게 한 소리를 한 게 그리도 좋은지.
근데.
“염X하지 말고 꺼져.”
나는 빠꾸가 없다.
“하하하! 거참, 듣기 좋게 말을 해 줘도 영 알아먹지를 못하는군그래. 자네, 내 뜨거운 맛을 한번 볼 텐가?”
남사익은 씩 웃었다.
그리고 나는 따라 씩 웃었다.
제 발로 와 줘서 고맙다. 드디어 손 좀 풀겠네.
나는 당장 주먹을 꽉 쥐었지만 송무는 내 앞에서, 설화린은 남사익을 바라보며 제지했다.
황급히 뛰어 들어온 두 사람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싸움을 말렸다.
“무린아, 이건 아니야.”
“퇴관당하고 싶어서 아주 난리군요. 둘 다 싸우고 싶으면 정식으로 교관님께 허락을 받으세요.”
설화린의 말에 남사익이 눈에 힘을 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 설 소저가 그리 말하니 내 이번만큼은 손속에 자비를 두겠소. 어이, 천둥벌거숭이 놈아. 알아서 조장 자리를 설 소저에게 넘겨준다면 내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겠다.”
“X랄하네.”
황태 이후로 내 앞에서 까부는 놈은 처음이다.
참교육 들어가야겠네.
“무, 뭐? X랄?”
여태 살면서 이런 욕지거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을까.
남사익은 난생처음 받아 본 모욕에 양손을 뜨겁게 태워 올렸다.
주변에 부는 바람으로 화끈한 열기가 내 피부에 닿았다.
역시 제법이네.
황태보다 절대로 아래가 아닌데?
좋게 봐주면 백리후와 비등한 정도랄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야?
그런 궁금함도 잠시.
“내 당장 교관님을 통해 허락을 받겠다.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 주지.”
나를 응시하는 남사익은 거두절미하고 말을 꺼냈다.
“염X하네.”
나는 남사익을 마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둘 사이를 막아서고 있던 설화린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조별 수업 때문에 정신없으실 텐데 허락해 주시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지만.
“설 소저, 남아로 태어나서 제 여자를 위협하는 이를 그냥 보고 넘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오. 날 그런 못난 놈으로 남겨 둘 작정이오?”
그래, 씨X. 내가 악역이다, 악역이야.
남가 놈의 말에 설화린은 오글거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제발……. 헛소리 좀!”
그런 설화린의 구박과 타박에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에 남사익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고집스럽게.
설화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교관을 통해 악교운에게 나와의 대련을 신청했다.
그런 남사익에게 혀를 차면서 설화린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절대 허락 안 해 주실 걸요? 악 교관님이 어떤 분이신데!”
설화린은 결단코 이뤄질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거 참 재밌겠군.”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 거라던 모두의 예측은 악교운의 미소 한 방에 빗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칠 주야 뒤로 천무린과 남사익의 대련이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