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제10화
「정마대전 발발 시기, 금무력 579년 정유(丁酉)년 신해(辛亥)월 계축(癸丑)일. 발발 연유는 무림맹 청해 지부, 사천 지부, 섬서 지부 모두 연락 체계의 미흡과 전선을 담당한 무사들의 허술한 경계태세.」
그 외에도 다양한 정답이 나올 수 있지만, 배단아는 이 정도의 정답에도 점수를 후하게 줄 터였다.
다만.
“푸핫.”
하나의 시험지에 적힌 내용에 배단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방심해서.」
첫 줄에 그렇게 적혀 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적었을까.
이름을 살펴보니, 가장 먼저 제출했다는 17번 후보생이었다.
최근에 가장 화제의 인물. 몰라보게 바뀐 모습에 이론 수업 위주로 하는 배단아의 귀에도 들려온 후보생.
그런 그가 써 낸 기상천외한 정답에 배단아는 그만 크게 웃어 버렸다.
그러나 시험은 시험.
발발 시기에 대한 정답을 이와 같이 마구잡이로 썼다면 얄짤 없이 퇴관이 될 터.
“어디 보자.”
하지만 그 다음 줄에 적힌 문장이 배단아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정마대전 발발 시기, 금무력 579년 정유(丁酉)년 신해(辛亥)월 임자(壬子)일.」
그 답에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고 있는 배단아의 옆에서 시험지를 힐끗 본 다른 교관들이 입을 열었다.
“뭐야, 배 교관님. 이놈은 아예 상식조차 없는 놈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 임자(壬子)일? 그토록 가르쳤는데 점수를 주려고 낸 문제를 틀리다니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로 퇴관이지.”
“괘씸하게 이따위 정답을 적어 놓고 가장 빨리 제출을 해?”
부교관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무식하게 써 놓은 답이라고 판단했다.
그에 비해 백리후, 진무양, 낭소소, 명진.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답.
빼곡하게 채운 정답은 하나같이 걸출했다.
뿐만 아니라 실전 대련에서의 점수는 뒤떨어지지만 필기 점수만큼은 상위권에 도달해 있는 송무. 그리고 후송도 필기에서 특출 난 실력을 선보였다.
교관들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단아는 심각한 얼굴로 천무린의 정답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일필휘지(一筆揮之).
지우다가 쓴 흔적 하나 없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썼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수업에서 단 한 번도 임자일에 대해 이야길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임자일이라고 작성한 천무린은 정말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
절대.
확신이 들었다.
“실제 정마대전의 발발일은 임자일이 맞아.”
“예?”
배단아의 말에 부교관들이 술렁인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정확히는 임자일에서 계축일로 넘어가는 시간이지. 윗선에서는 조금이라도 무능함을 덜어 내기 위해 계축일이라고 일축해 버렸지만 말이야.”
그녀의 말에 부교관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반문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배 교관님, 그럴 리가요. 저희도 교관 생활만 무려 5년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정마대전을 몸소 겪은 이들도 여럿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윗선에선 입단속을 했던 거지. 그리고 너희가 모르는 것을 보면 그게 잘 먹혔단 소리일 테고.”
배단아는 당시 정마대전 지휘부에 속해 있던 인물들 중 하나였다. 비록 그 지위나 역할이 중추적이진 못했어도 보고 들은 눈과 귀가 있었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천무린의 정답지를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이게 우연인지 혹은 정말로 알고 적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조차도 이 녀석의 운이지 않을까.”
드르륵.
꾹.
그리고 배단아는 책상 위에 놓인 도장에 인주를 찍더니 정답지에 꾹 눌렀다.
* * *
“허.”
대자보를 크게 붙인 연무장 게시판 앞에는 8기 후보생들로 득실거렸다.
비교적 간단한 쪽지 시험이었을지라도 성적으로 인한 경쟁과 다른 누군가로부터 우위를 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근데.
모두 한 사람에게 시선이 모아진다.
탄식과 함께.
「1등 – 천무린
2등 – 백리후
3등 – 진무양
4등 – 설화린
5등 – 낭소소
6등 – 명진
7등 – 송무
…….
52등 – 황태」
시험 결과가 나왔고, 역시 8기 후보생들은 술렁거렸다.
“씨X!”
부르르 떨던 황태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고, 그의 무리도 함께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뿐 아니라.
빠득.
검정색 비단에 금색실로 수놓은 영웅건을 멋들어지게 이마에 둘러맨 백리후가 무표정한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역시나 그 뒤를 따르는 진무양, 낭소소, 명진.
“뭐, 뭐냐, 넌? 대체.”
송무와 후송이 입을 뻐끔거리며 갓 붙여진 대자보 옆에서 불과 몇 개월 전 천무린의 시험 성적과 비교했다.
「1등 – 백리후
2등 – 진무양
3등 – 설화린
4등 – 명진
5등 – 낭소소
…….
51등 – 황태
52등 – 천무린」
만년 꼴찌.
그런 그가 단숨에 51명을 제쳤다고?
입이 떡 벌어진 8기 후보생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태연자약한 한 명.
“뭐, 뭐, 이 새끼들아.”
* * *
사천(四川)의 사천무관.
섬서(陝西)의 섬서무관.
산동(山東)의 산동무관.
정파 무림맹(武林盟) 직속 기관이자 정파 무림을 결속시켜 주는 3대 무관.
무관마다 좁게는 세 지역, 넓게는 다섯 지역이 넘는 범위를 관장하며 고루 퍼진 후기지수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불렸다.
각 무관마다 대표하는 대문파는 대문파라는 이름답게 적정선에서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도맡아 무관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무림맹의 입김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처럼 기반도 다져지지 않은 무관에다가 자금과 인력을 투자하는 것을 낭비라고 비난하던 대문파들도 무림맹의 꾸준한 회유와 압박으로, 즉 당근과 채찍의 적절한 조화로 자기 지역에 속한 무관에 집중해야 했다.
또한, 그런 결속을 보이는 데에는 무림맹의 숨겨진 전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존에 규합되어 있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무관의 소속으로 뿔뿔이 흩어 버려는 의도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이의 신경전이 곧 무관에 소속된 문파들끼리의 신경전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무관 체계를 중심으로 그곳을 졸업한 후기지수만이 무림맹에 입맹할 수 있도록 무림맹이 단호한 결정을 내리자, 각 무관에 속한 문파들은 안으로는 각종 교육체계를 갖추고 교관들을 고용하고, 밖으로는 주변 상권을 차지하고 있는 상단과의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왈패와 산적 등으로부터 보호 조치를 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기존의 틀을 모두 깨부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경쟁, 올바른 경쟁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천무관은 사천당가, 점창파, 공동파, 아미파뿐 아니라 근접해 있는 새외삼궁과 분타에 있는 무당파, 화산파, 종남파 등이 포함돼 있었고.
섬서무관은 화산파, 종남파, 소림사, 제갈세가 등으로 구파의 주축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 문파들이 고루 퍼져 있었고.
산동무관은 황보세가, 하북팽가, 남궁세가, 개방 등으로 주로 오대세가의 주축을 이루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었다. 또한 무림맹은 1년에 전반기, 후반기로 나눠 무투대회를 개최하여 서로 자웅을 겨루도록 하였는데, 이는 곧 무관의 명예이자 속해 있는 모든 문파들의 명예이기도 했다.
이렇듯 줄줄 설명하던 송무와 후송의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뭐, 어차피 너네한텐 다 먼 이야기잖아.”
무관을 대표하여 무투대회를 출전한다?
허무맹랑한 꿈이다. 검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놈들이 뭐, 무투대회?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송무와 후송의 꿈을 개박살을 내 버렸다.
“무공이나 단련해. 곧 실전 대련 시험이라며.”
내 말에 두 사람은 입술을 비죽였다.
필기시험에도 쪽지 시험이 있듯이, 무투 시험에도 각종 대련들이 평가로 반영되었다.
2차 진급에 따른 평가는 1차 진급 때처럼 그저 탁월한 무공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필기시험은 몇 차례에 걸친 쪽지 시험의 결과로 3할.
실기 시험은 총 3차례에 걸친 무투 시험으로 3할.
최종적으로 2차 진급시험으로 4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어 버렸다.
내가 한 잔소리에 표정이 좋지 않던 녀석들이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언제 표정이 안 좋았냐는 듯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그래서 말인데…… 무린아.”
“왜?”
두 녀석이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 남자 안 좋아한다니까.”
그 말에 황당하다는 듯 쳐다본 두 사람의 눈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뀐다.
“아니, 그럼 뭔데?”
“우리…… 무공 좀 가르쳐 줘.”
“에?”
갑자기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무린아, 너는 한 번만 봐도 모든 무공을 바로 익힐 정도의 천재라고 하던데…….”
후송의 말에 내가 송무에게 시선을 줬다.
그러자 되레 뿌듯한 눈빛으로 ‘나, 잘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새끼가 또 입을 나불나불.
하!
“그게 무슨 개 같은…….”
“하긴! 그 정도 재능이 아니고서야 갑자기 이렇게 강해질 리 없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갑자기 강해진다는 게 이 녀석들에겐 단순히 노력으로 메울 수 없는 크나큰 간극으로 느껴지나 보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
괜스레 헛웃음이 나왔다.
“근데, 너희들.”
“응?”
“스승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배움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뜻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떤 뜻이 있어?”
역시 아무것도 모르나.
강호 무림만큼 비정한 세상이 없다. 그러니 그 누가 가르침을 아무에게나 주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스승과 제자라는 사제지간이 있는 것이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문파가 있는 것이다.
거기다 송무는 종남파. 후송, 이 녀석은 사천에서 유명한 청룡표국의 부국주 아들이다.
제법 괜찮은 배경들을 가진 놈들이 내게 선뜻 배움을 요청한다는 건 아직 순수한 아이들이란 소리다.
강호 무림의 비정한 세상에서는 얼마나 불가능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알 텐데.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은 녀석들이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에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매정하고 혹독한 천마신교에서 80여 년을 살아왔던 내가 이런 순수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거겠지?”
내 미소를 본 녀석들이 되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시무룩해진 두 사람과 달리 나는 꽤 긍정적이었다.
송무와 후송은 배경으로 보나 인성으로 보나 꽤 괜찮은 인재들이었기에.
내가 키워서 충분히 쓸 만한 녀석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할까.
“좋아. 내 부하로 삼아 주지.”
원대한 계획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