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제1화 - 서(序)
천마(天魔) 천무린.
천마라는 별호를 가진 그는 정, 사, 마, 새외 할 것 없이 무(武)의 일대 종사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별호는 바로.
무신(武神).
강호 무림의 정파 세력을 쓸어버리고,
발악하는 사파 놈들을 짓밟았다.
어디 그뿐이랴.
새외삼궁이 규합하여 달려들었으나, 그래 봤자 소용없음을 이 두 손으로 보여 주었다.
휘이잉!
십만대산(十萬大山) 위.
전 무림의 일통(一統)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수많은 천마신교 교인들의 함성이 십만대산을 떨어 울렸다.
이른바 마도천하(魔道天下).
마도천세!
천천세!
천천……세?
번쩍!
어……?
마, 마도천세 천천세……!
그 울림을 듣고 있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 * *
“그대는 무림 일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혈겁(血劫)을 일으킨 데 대한 죗값을 치르라.”
허여멀건 얼굴에 검게 칠해진 눈가를 한 검은 옷을 입은 환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씨X. 힘이 강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람을 등선시켜도 되는 거요?”
입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무림 일통(一統)을 눈앞에 두고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니?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잠도 오질 않는다.
아니, 눈앞에 있는 이 저승사자를 죽일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찢어발겨 버렸을 텐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환영 같은 형체밖에 없는 신선, 아니 마선(魔仙)이 되어 버렸으니까.
“네놈으로 하여 태평해야 할 천하가 역천(逆天)의 세상으로 물들 뻔했으니까. 물론 강제로 너의 인과에 관여한 것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치러 줄 터이다.”
“보상은 지X이고 염X이다! 씨X, 다시 돌려놔! 그거면 돼!”
“불가하다.”
으득.
이가 절로 갈렸다.
“씨X!”
“고얀 놈이로고.”
저승사자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절로 숨이 턱 막혀 왔다.
“네놈의 행동과 생각을 보아하니 곧장 육체에 넣었다가는 또 혈겁을 불러일으킬 모양새로구나.”
“읍! 읍!”
“살인을 하지 못하는 금살(禁殺)을 각인시켜 놓겠다. 그리하여 네가 역천의 세상을 행하지 않을 마음가짐이 될 때 비로소 네가 가진 마(魔)의 무공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읍읍!”
씨X! 뭐라고 말이라도 하게 해 주든가!
금살이고 나발이고! 내 무공을 못 쓰게 한다고?!
열불이 터져 당장이라도 저승사자에게 천마신권(天魔神拳)을 먹여 주고 싶었지만.
손가락을 까닥이는 가벼운 행동조차 저승사자의 손짓 한 번에 제지당하고 말았다.
“어디 보자……. 오호, 우연인가. 네놈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남아(男兒)의 육체가 있다. 앞으로 잘 살아 보도록 하라.”
그런 말을 남기고 먼지처럼 흩어지는 그와, 희미해져 가는 나의 의식.
그런데 저승사자의 마지막 미소는 대체 뭐였을까.
* * *
하아…….
며칠째 나는 동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볼을 당기고 때리고 꼬집었다.
아프다. 그리고 또 아프다.
십칠 세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이다.
비록 땟국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얼굴이긴 하나, 정광이 넘치는 눈과 꼬질꼬질함 속에 보이는 허여멀건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다 붉은 꽃잎을 연상케 하는 입술.
아주 기생오라비의 정석이다.
딱 얼굴만.
얼굴만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출렁, 출렁.
정상적인 길이의 팔과 다리마저 짧게 느껴질 정도의 불어 버린 비곗덩어리.
무릎을 주춤하게 만드는 뱃살의 향연에 그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몸이 무거웠다.
씨X.
얼굴과 몸이 따로 논다는 표현은 원래 이럴 때 쓰는 게 아닌데.
관절이 삐거덕거리는 게 정상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마도천세(魔道天世)를 통해 무림의 격변기를 끝내고 일통하기 직전이었거늘.
마치 모든 게 꿈인 양 나는 고도비만의 십칠 세 소년이 되어 있었다.
천마신교 내에 여러 대법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대망각(大忘閣)이 있긴 했는데 본 교의 자금만 줄곧 낭비하는 기관이었으니 아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과는 관련이 없을 터.
그럼 대체 어찌 된 노릇이란 말인가.
천마이자 무신으로 칭송받던 과거가 한낱 꿈에 불과했단 말인가?
절레절레.
그건 아니다.
이 포동포동하고 고사리 같은 손만 보아도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쓸어버리며 피를 흠뻑 뒤집어쓰던 게 생각난다.
오감, 그 이상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가 단순히 꿈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오싹.
허여멀건 얼굴에 진득한 눈빛을 했던 남자의 미소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저승사자.
정말로 그놈이 말한 대로 내가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우화등선을 하였고, 이 몸뚱어리로 들어온 게 맞단 말인가.
“……씨X.”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눈앞에서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기분.
무림 일통을 눈앞에 두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자연스레 저승사자에게 살기(殺氣)를 품었고.
두근!
“커억……!”
아, 아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몰려오는 격통에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단순히 죽이고 싶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그 와중에 뒤뚱거리는 몸 때문에 팔다리가 허우적거릴 뿐.
내 몸 전부가 감싸지지도 않았다.
참담함에 왠지 모를 고통이 정신적으로 타격을 주는 느낌이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두들겼고, 나는 이를 악문 채 무려 일각을 그 고통 속에서 버텨야만 했다.
맞다. 그놈이 뭐라고 했더라.
아, 금살……?
살인을 하지 말라니.
그렇다면 서, 설마?
나를 무신(武神)으로 만들어 준 무공이자 천마신교의 교주만이 익힐 수 있는 강호 무림의 최상승 절기, 천마신공(天魔神功).
……떠오르지 않는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항시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천마신공의 구결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개 같은 인생무상(人生無常).
한 손엔 천마신권을, 한 손엔 천마신검으로 세상을 모조리 쓸어버리던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허망하기 그지없는 느낌으로 자조적인 생각에 머무를 즈음.
……잠깐.
근데, 천마신교는 지금 무림 일통을 한 상황인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나는 몸을 겨우겨우 일으켰다.
이크……. 살기 한 번 뿜었다고 몸이 이토록 괴로울 줄이야.
뭔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
힘든 몸을 이끌고, 나는 내가 묵고 있는 숙소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압!”
타닥! 탁!
“왼발에 힘을 싣고, 검을 뻗을 때는 허리를 이용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교관님!”
엥?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연무장?
그것도 천마신교의 수많은 교인들이 대련하던 연무장에 비하면 개미 똥구멍만 한 연무장이긴 했으나, 어찌 되었든 형태는 갖추고 있었다.
그런 연무장에 옹기종기 모인 또래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은 목검을 갖고 대련을 하고, 또 다른 한쪽은 교관이라고 불리는 작자들과 박투술로 손발을 어지러이 주고받고 있었다.
“어이! 저기 돼지 새끼 왔다!”
“큭큭, 돼지 새끼 왔네. 어이!”
어이? 어이가 없네. 이 개X끼가.
누가 봐도 내 꼬라지를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어휴, 참자. 애X끼들한테 화를 왜 내냐.
근데 그런 내 앞에 성큼성큼 다가온 교관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천무관 17번 후보생 천무린, 뭘 하고 있나? 남들 다 하는 훈련에 기절하고 푹 쉬었으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벌떡 일어나서 훈련에 임해야지.”
사천무관?
17번 후보생?
그건 뭐야, 대체.
그리고 뭐?
남들 다 하는 훈련에 기절을 해?
저 애송이들이 주고받는 저런 장난질을 못 따라가서?
하, 나 쪽팔리게.
이 몸뚱어리의 주인은 대체 얼마나 허약한 거야.
근데 그걸 다 떠나서 이놈은 뭔데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단 말인가.
“뭐래, 거지발싸개 같은 놈. 비켜라. 어딜 본좌의 앞에 서서 길을 막는가?”
“…….”
“……헙.”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정적이 왜 흐르는지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드디어 어떤 존재인지 깨달은 게냐.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당장 머리를 조아리고 삼보일배를 하면 봐주겠다.
……하지만 그건 짧은 내 생각이었음을 반각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퍼억! 퍼억!
교관이란 놈에게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흠씬 두들겨 맞고는 방금까지 누워 있던 침대 위에서 다시금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구나. 나는 천마였던 천무린이 아닌 평범한 남아에 불과하구나.
“킥킥, 미친 돼지 새끼. 아직도 정신이 안 깼나 봐.”
“푸흐하하하! 저 돼지 새끼 때문에 내가 산다, 진짜로!”
밖에서 나를 비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꼴받게 하네. 저것들이.
“제깟 놈도 사람이니 볼썽사나운 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훈련으로 심신이 지친 후보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는 어릿광대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어쩌겠나.
힘이 없으면 원래 당하고 사는 거다.
그걸 알기에 과거, 나는 과거 힘을 길렀다.
그것도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피나는 노력 끝에 말이다.
일단 두 번 사는 인생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심지어 이미 한 번 걸어온 무신의 삶과 경험이 온전히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비록 천마신공이라는 절세의 무공을 당장 쓸 수는 없을지라도.
과거 괜히 무신이라고 불렸겠는가.
수많은 정파, 사파, 새외를 단숨에 깨부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절세의 비급들을 괜히 훔쳐 왔겠는가.
무공 말고는 딱히 관심이 없는 내게 약탈을 통한 다른 무공 비급을 읽는 것은 유희이자 가장 큰 재미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나.
잃은 것이 많을지언정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길은 원래 고독하고 따분하다. 무림 일통이라는 목표가 없었다면 등선을 했어도 진즉에 했을 것이다.
수십 년의 노력 끝에 쌓은 내공과 몸이 곧 무기요, 무기가 곧 내 몸이었던 몸뚱어리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손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의지예를 추구하는 정파 놈들의 각종 무공과, 사마외도랍시고 각종 기이한 술법과 무공을 갖고 있던 사파의 무공.
심지어는 북해빙궁의 빙공과 남해태양궁의 열공, 포달랍궁의 단엽공까지 세세하게 기억난다.
그 모든 역사와 무공의 근간은 내 머릿속에 고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살을 빼는 무공은 없었다.
제대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려야 무공을 연마라도 할 텐데.
후우.
제아무리 보검을 갖고 있어도 제대로 휘두를 수 없다면 없느니만 못한 법.
내가 아무리 무공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 각종 구결을 깨달아도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차근차근.
하나둘씩 익히고 다시 연마한다.
출렁출렁.
출렁이는 뱃살을 꽉 쥐고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먼저 내공부터.”
첫 시작이 가장 중요한 만큼 첫걸음은 내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