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삼청의 좌
“이곳은 무어란 말인가?”
허허벌판뿐인 대지 위.
준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시야를 아무리 멀리 퍼트려도 아무런 지형지물도, 생명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북쪽이라 짐작되는 곳에 자리한 거대한 세 개의 봉우리가 전부였다.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밟고 있는 대지도, 멀리 보이는 세 봉우리도 마치 환상처럼 느껴졌고, 또 한편으론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렇게 주변을 눈에 담으며 고민에 빠지길 한참.
준혁은 이곳이 일종의 의식공간임을 깨달았다.
“설마…. 그것이 이곳으로 연결된 거란 말인가?”
천신라를 상대할 최후의 수단으로 천겁을 불러온 준혁.
그는 애초에 천겁을 이겨내고 수행을 올릴 의도가 아니었기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방관자의 입장을 유지했다.
반대로 천신라는 천겁이 시작되자 벼락 맞은 쥐처럼 그것을 방비하기에 바빴다.
식아를 통해 서로 공명과 융합이 번갈아 일어나며 특수한 공유상태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는 준혁을 해할 수도, 그렇다고 천겁을 피해 멀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
오직 준혁과 힘을 합쳐 천겁을 이겨내는 게 최선이었다.
당연히 준혁이 손을 놓자,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천겁의 횟수는 중첩되어갔고, 열여섯 번째가 넘었을 때 천신라는 꽤나 지친, 하지만 승리자의 표정으로 기고만장해했었다.
하지만 열여섯 번이 끝일 리가 없었다.
이어지는 천겁에 천신라는 당황할 새도 없이 전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계속되던 천겁이 서른두 번을 넘어 계속되던 중간, 준혁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분명 규선에 오를 때 잠시 느꼈던 그 감각이라 여겼거늘.”
매우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갔지만 한 번 느꼈던 감각을 포착했고, 방관자로 있던 준혁은 그 감각에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의지를 뻗었다. 그 감각을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결과.
의식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지금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것이었다.
“우선 저곳으로 가봐야겠군.”
아무리 기감을 확장해도 허허벌판뿐인 세상.
멀리 보이는 세 개의 기둥만이 유일한 표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면 이곳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
세 개의 봉우리를 향해 날아가길 수십일.
준혁은 아무리 빠르게 날아가도 거리가 좁아지지 않자 의아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거리에 상관없이 같은 모양, 같은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게 다시 날아가길 또 수십일.
“아!”
주변 환경에 완벽히 익숙해진 준혁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동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세 개의 봉우리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을 담자,
화하학-
세 개의 봉우리가 눈앞까지 다가오더니 어느새 집채만 한 의자로 변했다.
의지를 움직이기 직전 혹시나 했던 준혁은 세 개의 봉우리가 거대 의자로 변하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삼청의 좌’구나.”
삼청의 좌.
신선에 오른 이들 중 선별 과정을 거친 이들에게만 허락된 자리.
“헌데 왜 나에게?”
준혁은 신선에 오르기 위해 천지 영기를 불러 모으긴 했으나, 아직 완전한 신선이 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준혁이 알기로 삼청의 좌는 신선의 경지를 공고히 한 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때, 집채만 한 의자와 반응하며 준혁의 머리 위로 왕관이 나타났다.
동시에 심장 부근에 새겨진 기운이 꿈틀거리며 전신으로 퍼졌다.
“왕의 정수와 독고제에게 받았던 권좌. 이것들이 삼청의 좌를 불러온 것인가….”
의자와 공명하듯 요동치는 기운을 가라앉힌 준혁은 조심스럽게 거대 의자로 다가갔다.
우우웅-
그때 공간 자체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그 진동엔 하나의 뜻이 담겨있었다.
“의자에 앉으라는 건가?”
정확히 사람의 언어로 표현된 건 아니었지만, 삼청의 좌가 존재하는 공간의 의지가 준혁을 부추겼다.
이윽고 준혁은 의자 가까이 다가갔고,
“흐음….”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움찔하다가 급히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잠시 후, 조금 전에 느꼈던 감각이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의자 가까이 다가갔고,
“그런 것이었나….”
다시금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감정을 지우는 건가.”
삼청의 좌라 여겨지는 거대한 의자.
그 위에 앉기 위해 다가갈수록, 감정이 희석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품어왔던 가족에 대한 정과 수많은 지인을 만나 가지게 된 감정.
주서령, 조호랑, 소화여 등 함께하기로 했던 여인들에 관한 생각.
또한 현재 자신의 모든 걸 빼앗아 가기 위해 혈안이 된 채 수를 쓰고 있는 천신라에 대한 감정까지.
삼청의 좌는 그 모든 걸 빼앗아 가려 하고 있었다.
아니, 감정에 치우치지 않게 서서히 지워버리려고 했다.
“아! 그래서!”
그제야 준혁은 삼청의 좌가 정확히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왜 현시대에 삼청의 좌를 얻고 대라에 오른 이가 없는지도 알 수 있었다.
삼청의 좌란 세상을 관조할 힘을 부여하는 자리.
그것을 얻는다는 건 곧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격이 필요한 것이었구나.”
그런 자리에 특정 사상을, 혹은 사심을 가진 자가 앉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 차고, 풍랑 속을 헤매게 될 게 분명했다.
천신라가 마선을 통합해 대라에 오르려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 몰랐다.
자신이 가진 욕망과 감정을 잃지 않고 수행을 올리기 위해서.
우우우웅-
그때 또다시 공간이 울음을 토해냈다.
어서 빨리 의자에 앉으라고 강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감정을 잃고 싶지 않은 준혁은 오히려 의자에서 멀어지며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내 삶의 목적은 수행을 올리는 것이 아니오! 관조자가 되어 세상을 굽어살필 생각도 없소!”
허허벌판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나는 나로서 존재할 것이고! 내 의지를 움직이는 건 오직 내 신념뿐이오!”
준혁이 가진 신념.
그것은 가족에 대한 정과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처음 수도계에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본인이 정한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이번도 마찬가지.
준혁은 삼청의 좌를 거부하며 의지를 일으켰다.
그러자 눈앞의 거대한 의자들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허허벌판뿐인 세상도 점차 일그러졌다.
우우웅-
동시에 세상이 또다시 울었다.
마치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듯이.
“후회라. 나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오! 덧없는 수행의 길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그 길을 말이오!”
쿠우우웅-
잠시 후, 준혁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공간 전체가 흐릿하게 변하며 소멸하듯 사라졌다.
그 순간 그곳에 있던 준혁의 의식 역시 어딘가로 빨려들 듯 천천히 지워져 갔다.
‘저건!’
그때 완전히 소멸한 의자에서 빛무리가 하늘로 치솟는 걸 본 준혁은 강렬한 기파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저었다.
스르르-
손끝 마디에 작은 빛 알갱이가 잡히는 걸 느끼자마자, 준혁의 모습이 공간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
잠시 끊어졌던 의식이 원래로 돌아오자, 준혁의 시야에 잡힌 건 일그러진 천신라의 얼굴이었다.
천신라는 흉신악살 같은 표정으로 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어…. 분명 수십 일을 넘게 헤매고 다녔거늘. 찰나에 불과했단 말인가.’
자신이 천기의 끈을 부여잡고 삼청의 좌가 만들어낸 의식공간에 다녀온 기간이 찰나와 같음을 인지했다.
동시에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삼청의 좌에서 쫓겨나기 전 낚아챈 빛 알갱이.
그건 삼청의 좌가 가진 의지를 담고 있었다. 세상에 관여할 수 있는 의지를.
‘이것을 사용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구나.’
빛 알갱이는 딱 한 번 의지를 움직일만한 수준의 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콰콰쾅!!
준혁이 생각을 정리하며 주변을 눈에 담는 사이, 다음번 천겁이 내려쳤다.
천신라는 정말 피똥을 싸는 표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천겁을 막아냈다.
이미 법문이 존재했던 자리는 초토화된 지 오래였고, 주변 지형도 완전히 변해있었다.
“진정 가만히 있을 것이냐!!”
몇 번째 천겁이 진행 중일까?
천신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준혁을 향해 윽박질렀다. 이미 공동운명체가 되었으니, 준혁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자신도 손을 놓겠다면서 말이다.
그 모습에 계속해서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던 준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을 쓰려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 가득 찬 오색 영기구름과 그 가운데 뻥 뚫린 틈을 향해 손끝의 빛 알갱이를 날려 보냈고,
쿠우웅-
그 순간 하늘이 이상 현상을 보이며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천신라는 준혁이 천지현상에 변화를 불러왔음을 감지하고 물었다.
“수사께서 고생하는 것 같아 도와드리려고 한 겁니다.”
“도와?”
“계속되는 천겁에 힘겨워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로 압축했습니다.”
“?!”
“이제 이 지겨운 상황에 종지부를 찍으시지요.”
준혁의 입에서 ‘종지부’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쿠오아왕!!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천겁이 떨어져 내렸고, 천신라를 비롯한 준혁을 단숨에 녹여버렸다.
아니, 범위에 들어선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
법문이 자리한 장소.
그곳에는 인세에 보기 드문 거대 구덩이가 패어 있었다.
구덩이는 아직도 열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 끝은 땅이 녹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천겁의 기운이 얼마나 강했는지, 대지를 녹여 용암으로 만들었고, 인근에는 풀 한 포기조차 남지 못하고 모든 게 사라진 후였다.
“나를 그리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커억.”
그런 구덩이 위,
만신창이가 된 천신라가 힘겹게 허공에 떠 있었다.
기력이 쇠했는지 떠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실시간으로 영기를 회복하며 신체 역시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엔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천겁으로 인해 서로를 무한 흡수하며 강제로 공명상태가 되었던 상대.
그가 현재는 눈앞에 없었지만, 어딘가 존재한다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항상 틀리는 법이 없었다.
끼요오오오옷-
부글대던 용암이 출렁하더니 그 안에서 붉은 새가 날아올랐다.
새는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더니 준혁으로 변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지막 선물이.”
준혁은 천신라와 달리 멀쩡해 보였다.
그런 그가 아무 말 없이 방비 태세를 갖추는 천신라를 향해 피식 웃더니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진짜 마지막이란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갈라져라.”
쓰악-
그 순간 준혁의 눈빛에 핏빛이 돌며 천신라가 자리한 공간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어딜!”
천신라는 지쳐 보이는 외관과 달리 마선들의 권능을 융합해 갈라진 공간을 비켜나게 했다.
그리고는 반격을 가하려는 듯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이, 이게 어찌?”
몸을 날리려던 천신라는 어느새 자신의 양팔과 다리가 은회색 기운에 구속되어 있단 걸 알아차렸다.
“삼지행이라 불리는 능력인데,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천신라는 그제야 상대의 수행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너. 설마…?”
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준혁은 구속된 천신라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선사께서 제 대신 천겁을 버텨주지 않았습니까? 해서 운이 좋게도 수행이 올라버렸군요.”
물론 수행이 완벽히 오른 건 아니었다.
예전 산들바람이 준혁의 도움으로 반강제로 수행이 올랐던 것처럼, 준혁도 정확히 그 상태와 같았다.
수백, 혹은 수천 년이 넘을지 모르는 시간을 수행 안정화에 힘쓰고 나서야 진정한 신선이 될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작은 한 걸음을 올라간 것만으로 본인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더불어 천신라와 공명상태를 유지하며 권능의 융합에 대해서도 완벽히 깨달았다.
그랬기에 예전과는 어마무시한 수행 차이가 났다.
이제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도 천신라와 맞수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물며 천신라는 이미 천겁으로 인해 기력이 쇠해있는 상태.
“선사께서 원하던 마선들의 융합의 끝. 그건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천혈족을 대표하여.”
푸욱-
말과 함께 검은 식검이 소환되더니 천신라의 심장을 꿰뚫었다.
당연하다는 듯 천신라는 반항 한 번 못 하고 허무하게 식검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하아.”
준혁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고양감과 황홀감에 취해 눈을 감았다.
“이것이 진정한….”
그렇게 한동안 고양감에 취해있던 준혁은 천천히 눈을 뜨며 멀리 구석구석으로 의지를 전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돌아가도록 합시다.
팔왕을 비롯한 림주. 그리고 엄청난 격변에 몰려들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시하던 이들.
그들에게 알렸다.
이제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