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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403화 (403/408)
  • 403화. 최후의 승부 (2)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왜곡하다니.

    준혁은 천신라가 거짓을 말한다고 여겼다.

    ‘말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지배자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마규보쯤 되는 마선의 권능을 그리 쉽게 융합한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그건, 수백 년간 마선들의 권능을 융합하기 위해 시도했던 준혁이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완벽하게 거짓이라 하기엔 진정으로 소화여의 기운이 일절 느껴지질 않았다.

    ‘시험이라고 했지?’

    빠르게 앞뒤 상황을 유추해본 준혁은 천신라가 의미 없이 내뱉었던 말속에서 그의 진심을 읽고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저자도 본인이 사용한 권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아마 마선봉인진이 껄끄러워 불안전한 권능으로 그녀에게 손을 쓴 것일 테지.’

    시공간의 틈 속에 처박았다는 표현은 특수한 시간과 공간의 봉인에 가둬놨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그것이 짐작 가능한 이유는,

    다른 이들은 느낄 수 없을 테지만, 준혁만이 느낄 수 있는 마선기의 파동 때문이었다.

    마규보를 흡수하기 전까지 안정적이었던 천신라의 마선기가, 지금은 주체하지 못할 만큼 요동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련의 상황은 한가지로 귀결되고 있었다.

    ‘반드시 흡수한다.’

    소화여를 되찾기 위해선 사라지게 한 방법을 아는 게 먼저.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천신라를 흡수해 융합의 권능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준혁은 즉시 겁먹은 듯 보이는 팔왕에게 신호를 보냈다.

    -시간이 없습니다. 보셨다시피 시간을 끈다면 그는 더 강해질 겁니다. 그의 횡포 아래 숨죽이며 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도망치십시오.

    영수들을 움직이는 데는 용기를 불어넣는 것보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더 효과적.

    준혁에게서 도망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순간적으로 돌변한 기운에 준혁은 빠르게 방위를 밟으며 허공으로 치솟았고.

    “모두!”

    곧이어 팔왕이 제각각 번쩍하며 사라져 천신라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나타났다.

    천휴림주와 준혁까지 포함해 아홉 명이 자신을 둘러싸자, 천신라는 마지막 남은 봉인진의 잔여물을 소멸시키며 좌중을 둘렀다.

    그리고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합공이라. 그것도 재밌겠지.”

    예전이었다면 팔왕의 합공에 몸을 사렸을 천신라가 자신감에 차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도 얼마 가지 못했다.

    준혁을 중심으로 팔왕과 림주가 진법을 발동하자 인상을 구기며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 뭐지?”

    천신라의 반문에 준혁은 대답해주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진대라멸진! 발동!”

    준혁의 외침과 동시에 천신라를 빙 두르고 있던 팔왕과 림주의 깃발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그리고는 그들의 머리 위로 각각의 색을 가진 서른여섯 개의 기둥이 생겨났다.

    서른여섯 개의 기둥은 서로의 구역을 확인한다는 듯 파동을 퍼트렸고, 서로 간의 영역을 침범하면 그 즉시 기운이 증폭되며 성장했다.

    그리고 그 성장점의 최고점은 당연히 천신라가 자리한 진법의 중심이었다.

    “이깟 대라멸진.”

    눈살을 찌푸린 천신라가 주변 대기를 일그러트리더니 양손을 지휘하듯 흔들었다.

    파팡- 콰앙!

    그러자 대라멸진의 발동 속도가 느려지면서 주변이 뒤집히듯 터져나갔다.

    “흐음…. 제법이군.”

    하지만 이미 발동해버린 진대라멸진을 어쩌지는 못하는 상황.

    준혁은 충분한 기운이 모이자 첫 번째 단계를 진행했다.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다, 손을 내리며 천신라를 향해 말했다.

    “대!!”

    직후, 준혁의 입에서 ‘대’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이 반으로 갈렸다.

    동시에 팔왕과 림주 머리 위에 떠 있던 서른여섯 기둥에서 황금빛 기둥이 솟구쳐 올라갔다.

    그리고 황금빛 기둥이 갈라진 하늘 사이로 모습을 감춘 순간.

    쿠웅-

    무시무시한 중압감과 함께 하늘에서 ‘대’라고 새겨진 황금빛 문자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흐음….”

    천신라는 떨어지는 ‘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고, 곧장 양손에 각기 다른 권능을 담더니 풍선을 터트리듯 세게 손뼉을 쳤다.

    콰앙!!

    그러자 ‘대’의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더니, 조금씩 뒤로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혁이 들고 있던 깃발을 세차게 흔들며 팔왕에게 신호를 보내자, 다시 가속이 붙은 ‘대’가 천신라를 향해 밀쳐 들어갔다.

    그리고,

    쑤욱-

    천신라가 각종 보호구로 몸을 방어했음에도,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고 그의 이마를 파고들었다.

    “아직 부족한가.”

    천신라에게서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준혁이 다음 단계를 밟았고.

    “라!!”

    쿠웅-

    갈라진 하늘 틈에서 ‘라’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라’가 황금빛을 빛내며 하강을 시작하자. 천신라의 얼굴이 처참하게 짓이겨졌다.

    대라멸진의 2단계에 불과했지만, 그 위력은 일반적인 36방 대라멸진을 아득히 넘어서는 위력.

    신선의 끝에 달했다는 천신라도 힘겨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참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천신라가 갑작스레 피식 웃었다.

    “할 수 없군. 혹시 몰라 사용하지 않으려 했더니.”

    그리고는 혼잣말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묵왕, 움직이시게.”

    푸욱- 쿵-

    천신라의 입에서 묵왕이란 단어가 나온 순간, 파열음과 함께 조왕이 힘없이 꼬꾸라졌다.

    묵왕은 조왕의 원영을 움켜잡은 체 천신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주군이시여.”

    ***

    “묵왕!! 이게 무슨 짓이냐!”

    챙강-

    묵왕이 조왕을 제압하자, 상황은 단번에 반전되었다.

    대라멸진은 묵왕과 조왕 두 자리가 비며 8방이 무너졌고, 그 즉시 원형으로 천신라를 둘러싸고 있던 기둥이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하늘의 틈도 자취를 감추었고, 떨어져 내리던 ‘라’는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제법이었다만, 준비는 네놈만 한 건 아니거든.”

    이어지는 천신라의 말에 준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황대륙의 영수족에 손을 써뒀을 줄이야.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

    그렇다면 왜? 여태껏 눈엣가시 같던 대황대륙을 두고 봤단 말인가?

    준혁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천신라가 말했다.

    “왜? 아, 내가 묵왕을 거둔 뒤로 왜 그들을 그냥 두고 봤느냐고? 사실 식아의 존재를 깨닫기 전까진 팔왕을 이용해 수행을 올리려 했지. 그들이 가진 비술을 하나로 모은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으니까. 헌데 자네도 느꼈을 테지만 저들이 너무 고지식해서 말이야.”

    영수족들은 대대손손 물려받은 지식을 절대 공유하지 않았고, 고문이나 세뇌를 통해서도 알아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첩자를 이용해 조금씩 상대의 비밀을 캐내려 했다는 말.

    그사이, 조왕을 제외한 팔왕은 배신자 묵왕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고, 천신라는 분신을 보내 묵왕을 도왔다.

    림주는 다시 전함으로 도망간 상태였다.

    ***

    천신라와 둘만 남은 상황.

    준혁은 전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식검을 소환해 그 위로 붉은 광검을 만들어냈다.

    “오호라. 그런 식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거였군.”

    회심의 한 수였던 대라멸진이 붕괴된 이상, 남은 건 식검으로 인한 흡수가 최선.

    어느덧 준혁 주위로 자아를 온전하게 갖춘 마선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어, 공천귀 자네…. 그자와 함께 있었던 것인가?”

    “오랜만입니다. 주군. 욕심을 내려놓을 때도 됐거늘…. 여전하시군요.”

    천신라가 공천귀를 비롯한 마선들의 등장에 깜짝 놀라는 사이, 준혁은 전신에 성광지력을 둘렀다.

    “다들, 저자의 발을 묶는 데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예전과 달리 분신 하나하나를 조종할 필요가 없었기에, 준혁은 모든 걸 그들의 개인 의지에 맡기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용천무의 날개를 발동하며 뇌둔술을 이용해 말 그대로 번개처럼 움직여 식검을 찔러넣었다.

    스걱-

    식검이 천신라를 꿰뚫자, 천신라는 검은 구름이 되어 먼 곳에서 나타났다.

    그 순간 적마가 번쩍하고 나타나 거미줄을 던졌다.

    극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선들의 권능을 융합한 공격.

    하지만 천신라는 적마에 이어, 공천귀, 인지경, 분광소 등. 모든 공격을 가볍게 무력화시켜버렸다.

    회피와 방어는 기본이었고, 대부분은 주변이 왜곡되며 천신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공격이 실패할 때마다.

    쇄애애액- 팡-

    단번에 머리나 몸통이 터져나가며 분신이 역소환돼 사라져 버렸다.

    ‘영력 소비가 엄청나구나.’

    그 과정에서 준혁은 끝이 없을 줄 알았던 자신의 영력이 조금씩 유실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직은 무리가 없지만, 이런 식의 공방은 결국 필패로 이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공방이 이어지길 한참.

    “더 볼 게 있을 줄 알았더니, 이게 다인가 보군.”

    준혁의 귓가로 천신라의 무시하는 말투가 들렸고.

    파징- 팍팍-

    규극마의 가시로 만들어진 구속 팔찌가 나타나더니 준혁의 손과 발을 허공에 묶어버렸다.

    동시에 준혁의 영력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없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모든 방비가 천적을 만난 것처럼 허물어졌다.

    적마의 권능도, 공천귀의 이동술도. 또한 귀원패와 전영술의 보호막까지.

    ‘성광지력이 환원된다?’

    심지어 전신에 두르고 있던 성광지력이 삼지행으로 변해 겁에 질린 것처럼 쭈그러들었다.

    ‘이게 어르신이 말한 왜곡의 힘인가?’

    그리고 완전한 무방비가 되었을 때.

    “식아는 곁에 둬야 하니 원영만 구속한 채로 살려주지.”

    쇄애액-

    가까이 다가온 천신라가 가볍게 손을 저었고, 그 순간 회오리처럼 생긴 창이 만들어지며 준혁을 꿰뚫어 버릴 듯 쏘아져 나왔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콰앙!!!

    그때, 지옥의 불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운석 같은 것이 어딘가에서 날아와 지면을 강타했고,

    “누가! 큰둥이를 괴롭혀!!”

    지면을 강타한 운석이 붉은 여우의 형상으로, 곧이어 귀여운 꼬마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준혁의 앞을 막아섰다.

    푸욱-

    그리고 나타나기가 무섭게 회오리 창에 관통당하며 준혁을 대신해 산산조각 분쇄돼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산들!!!”

    그 모습에 준혁의 눈이 피가 맺힐 듯 부릅떠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린 건 분명 산들바람.

    숨이 턱 막혔다.

    ‘빨리 중력을 이용했어야 했거늘!’

    준혁은 비록 상대에게 휘둘려지긴 했지만, 최선을 다한다면 벗어날 수도 있었을 상황을 방치한 것이 너무 후회됐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행동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사이 천신라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허어. 비록 전력은 아니었지만, 가진 권능의 대부분을 융합했거늘…. 이걸 막아서다니.”

    비록 목숨을 바쳐 막아선 것이긴 하지만 대단한 건 대단했다.

    “천신라!! 반드시 죽인다!”

    이어진 준혁의 외침에 천신라가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회오리 창을 만들었다.

    “그런 소리는 이걸 막아낸 후에나 해야 하지 않겠나? 이제 도와줄 이도 없을….”

    “왜 없어요? 우리가 있는데!”

    그때 운석이 떨어진 자리에서 태풍 같은 바람과 수증기가 피어나더니 하얀 호랑이 한 마리와 작은 도마뱀 두 마리가 뛰쳐나왔다.

    산들바람과 함께 떠났던 청호와 용천, 천무.

    그들은 각각 사람의 형상을 갖추더니 준혁과 천신라를 두리번거렸다. 그중 청호가 침통한 표정의 준혁을 보고 생글생글 웃었다.

    “걱정 말아요. 주인님! 누님도 이제 세다구요!”

    잠시 후, 청호는 품속에서 성냥개비처럼 생긴 나무 조각을 한 움큼 꺼내더니 사방으로 던졌고.

    화르르륵-

    성냥개비처럼 생긴 나뭇조각은 수백 배 크기로 커지며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어찌나 뜨거운지 법문의 성채가 용암 속 일부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무렵.

    끼요오오옷-

    주변을 모조리 태울 것 같던 불들이 한곳으로 밀집하더니, 그 안에서 화염에 휩싸인 붉은 새가 날아올랐다.

    “아! 염화신족!”

    그 순간 준혁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염화신족이 가진 힘.

    그것은 불이 존재하는 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능력.

    하늘로 날아오른, 화염을 머금은 붉은 새는 허공에서 몇 바퀴 선회하더니, 다시금 붉은 여우로 모습이 바뀌었고, 곧이어 귀여운 여자아이로 변했다.

    “헤에? 나 걱정했어? 걱정 마. 난 이제 안 죽는다고. 헤헤.”

    악동처럼 웃는 산들바람.

    그 모습에 준혁은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천신라를 상대할 수 있는 비장의 수가 남아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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