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천신라의 술수
중괴의 부탁이자 강요를 거부하지 못한 준혁.
그는 중괴를 흡수하고 곧장 공천귀의 권능을 발동했다.
소화여가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당장은 한시가 급한 상황.
최대한 빨리 법문으로 이동해 마규보를 지켜야만 했다.
그랬기에 주서령은 족자를 통해 거처로 보내버리고, 소화여는 그녀의 요청대로 남겨두고 떠났다.
-최대한 빨리 따라갈게요. 저는 도움이 될 거예요.
파앗-
선마궁에서 대륙의 경계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면 나오는 법문.
공천귀의 능력으로 단번에 초장거리를 도약한 준혁은 곧이어 적마의 권능으로 단거리를 주파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다행히 늦진 않았군. 태왕 그대의 말이 맞다면 당장 손을 씁시다.”
각 종족의 비술로 공간을 도약해, 준혁보다 살짝 먼저 도착한 팔왕이 거대한 성채를 이루고 있는 법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신라는?”
“조금 전, 안으로 들어섰네.”
“그럼 가시지요.”
기다리고 있던 팔왕이 은근슬쩍 준혁을 앞세우자, 그는 두말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애초에 도착하자마자 천신라를 가로막을 수 있었음에도 준혁을 기다린 이유가 그것 때문임을 알았으니까.
잠시 후, 성채로 진입해 가장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한 준혁과 팔왕 무리.
그들은 당장이라도 일이 벌어질 것처럼 흉흉하게 대치하고 있는 천신라와 마규보, 그리고 마규보 뒤에 벌떼처럼 모여 있는 마선들을 볼 수 있었다.
***
“여어, 팔왕이 이곳까지 찾아와주시고. 오늘 무슨 날이랍니까? 이 빌어먹을 궁주를 본 것만으로 충분히 피곤한데?”
검은 장복을 입고 검은 두건을 머리에 두른 사내.
한없이 음침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청량함이 느껴지는 수사.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마규보가 준혁 일행을 보고 입술을 비죽였다.
준혁은 상대가 오해하지 않게 천신라를 경계하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마규보 선사. 저는 최준혁이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저자를 막기 위함이니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오호, 인족이 태왕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었군. 마선이란 말도 있던데. 흐음. 잘 모르겠는걸?”
“그런 얘긴 나중에 나누시고. 우선 저희와 힘을 합쳐 저자를 상대하시지요.”
“내가 왜?”
아직 천신라가 방문한 이유를 모르는지, 마규보는 특별히 경계하는 모습이 없었다.
게다가 천신라를 어쩌지 못해 세력을 키우는 데 열중하면서도, 자존심은 있는지 힘을 합치자는 말에 불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준혁은 천신라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마선들을 잡아먹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직전의 대화들이 떠올랐다.
-힘을 빌려올 수는 있지만, 거리를 둔 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힘을 사용하지 못하네.
-아 참. 도망치기 전에 이상한 소릴 하더군. 식사나 하자고 했던가?
-기억력하고는. 하자는 게 아니라 하겠다고 했네. 사라지기 전, 식사가 끝난 후 다시 보자고 했지.
거리를 둔 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타인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천신라의 제약.
만약 그 제약이 공천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짧다면? 아니면 일정 시간이 아니라 거리를 두면 바로 힘을 잃는다면?
그래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유인한 거라면?
깨달음은 번개처럼 지나갔고, 준혁은 즉시 마규보에게 외쳤다.
“당장 저자와 거리를 두십시오! 저자가 마선들을 흡수할 수 있는 권능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준혁의 외침은 느린 감이 있었다.
그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이미 천신라는 준혁을 향해 눈과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마치 와줘서 고맙다는 듯이.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술술 풀린다는 듯이.
촤르르륵-
그 순간 천신라를 중심으로 검은 실타래 열여섯 가닥이 미친 듯이 뻗어 나오더니 마규보를 비롯한 법문의 마선들을 덮쳤다.
몇몇 마선은 그 즉시 실타래에 꿰뚫리며 흔적도 없이 소멸했고.
몇몇은 각자의 능력으로 실타래를 피해 몸을 날렸다.
마규보도 준혁의 외침과 동시에 천신라에게서 퍼지는 파장을 눈치챘다.
그래서 직선으로 뻗어오는 실타래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며, 풍선이 터지듯 ‘펑’하고 사라졌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신라와 준혁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뭐? 방금 뭐라 했지? 마선을 흡수해?”
하지만 준혁은 마규보의 반문에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당장 움직입니다!”
이미 팔왕과 함께 뇌둔술을 발동하며 천신라에게 쏘아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팔왕과 준혁의 협공에 천신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피했다.
동시에 똑같이 생긴 열여섯 분신을 만들어 절반은 팔왕에게, 나머지 절반은 마규보와 나머지 마선들을 향해 쏘아 보냈다.
“혼자서 모두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걸 보고만 있을 팔왕이 아니었기에, 그들도 각자 운용할 수 있는 최대수의 분신을 만들어 대응했다.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 한쪽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천휴림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전함을 소환해 안으로 사라지더니 굵은 광선을 연달아 쏘아 보냈다.
‘저치가 이득만 챙기려고 하는군.’
그 모습이 준혁은 달갑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전함의 공능을 이용해 맹공을 퍼붓는 것 같지만, 안전을 고려해 전함 안에 꼭꼭 숨어있는 것이었다.
“림주! 장난하시오!”
과묵하던 웅왕도 그 모습이 역겨웠는지, 비난과 함께 전함을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개판이군.’
팔왕의 분신들이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천신라를 어쩌지 못하는 모습에, 준혁은 그가 한 단계 더 발전했음을 느꼈다.
아마 수십의 마선을 흡수하며 짧은 순간에 마선기가 엄청나게 증폭했기 때문이리라.
준혁 역시 천신라를 막아서며 마선들을 흡수했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증폭하는 기운을 감지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황은 준혁 일행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깟 분신으로 우리 전부를 막겠다고?!!”
당연하게도 천신라의 분신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대도 팔왕 개개인을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마규보도 수준은 낮지만, 등급만 놓고 비교하자면 천신라와 같은 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천휴림주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때, 마규보를 잡아먹기 위해 회피와 추격을 이어가던 천신라가 갑작스레 모든 공격을 멈추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리고는 황홀한 표정으로 좌중을 내려보다가 양손을 활짝 폈다.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검은 원이 나타났고, 검은 원은 천천히 회오리치며 미증유의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게 무어란 말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준혁을 포함한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방비 태세를 갖췄다.
분신은 분신대로 상대하며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했다.
누가 보아도 천신라는 최후의 한방을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검은 원이 회전을 멈추자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검은 원에선 손 하나가 튀어나왔고, 그것을 신호로 수십 개의 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허, 설마?’
다른 이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지만, 준혁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동안 마선들의 능력을 융합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얼마인데.
천신라가 보여주고 있는 원에서 튀어나온 손. 그건 그가 흡수한 각각의 마선의 권능이었고, 거대한 원은.
“마선기?”
바로 마선기가 유형화돼 형체를 갖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멸하라!”
천신라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고, 원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개의 손들이 제각각 권능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천귀가 알지 못했던.
아니, 누구도 파악할 수 없었던.
진정한 지배자의 권능이 발동되려 하고 있었다.
***
시작은 태백랑이 맡고 있던 천신라의 분신이었다.
천신라에게서 명령이 떨어진 순간, 분신의 등 뒤에도 똑같은, 하지만 크기가 작은 원이 생겨나더니 그곳에서도 수십 개의 손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분신은 수십 가지 권능을 자유자재로 펼치며 태백랑을 밀어붙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천신라의 모든 분신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윽!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상대하던 팔왕은 힘에 겨운 듯 밀리기 시작했고, 마규보는 당장이라도 붙잡힐 듯 아슬아슬 줄타기를 시작했다.
나머지 법문의 마선들?
그들은 천신라의 분신이 작은 원을 만든 순간부터 속절없이 제압당하고, 바로바로 흡수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준혁은 상대를 칭찬하는 게 아닌, 능력에 대한 순수한 감상평을 내렸다.
천신라의 능력은 그야말로 모든 마선을 하나로 다룰 수 있는 권능.
처음부터 모든 마선이 천신라를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전장의 중심에서 천신라가 유유히 내려와 준혁 가까이 마주 섰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돌려 주변 상황을 눈에 담고는 입을 열었다.
“어떤가? 그대가 보기엔.”
“무엇이 말입니까?”
“식아의 능력이 누구에게 어울리냐는 말일세.”
준혁이 입을 꾹 닫자, 천신라가 고요한 눈으로 준혁을 응시했다.
“그대와 나. 우린 천혈족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지. 그건 알고 있나?”
뜬금없는 과거사에 준혁은 말없이 침묵했다.
하나 천신라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 마규보는 점점 위태해졌고, 팔왕도 연신 밀리고 있었지만, 천신라의 말을 기다려야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기다림의 끝엔 왠지 그동안 품어왔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마선들은 아무도 모르더군. 하지만 난 느낄 수 있었지. 내가 태어난 이유를 말이야.”
과거를 떠올리듯 몽롱한 시선의 천신라.
“천혈족은 거인족을 이겨야만 했어. 그래서 최후의 방법으로 마선을 만들었지. 그들이 가진 마선기로부터 말이야. 헌데 웃기지 않나? 애초에 모든 힘이 하나 된 마선기로도 어쩌지 못한 승부를, 그것을 잘게 쪼개서 어찌 이길 수 있던 말인가?”
“…….”
“처음부터 그들은 마선을 이용해 승리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네. 그들이 주목한 건 한 가지. 바로 성장 속도지.”
“…….”
“극에 이른 자는 한걸음 성장하기도 힘들다는 걸 깨닫고, 마선기를 마선으로 분리해 낮은 수행부터 차근차근 성장하게 만든 것이네. 그다음은 뭔지 알겠지?”
“그 후에 하나로 통합한다 그 말입니까?”
준혁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천신라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이 정답이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천혈과 마선기가 거인족을 압도할 수 없다고 여기고, 마선기를 백여 개로 쪼개어 다시 성장시키기로 한걸세. 훗날 성장한 마선을 하나로 합친다면 그땐 거인족을 압도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
준혁이 다시 침묵하자, 천신라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헌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지. 훗날 마선기를 하나로 모아야 할 존재가 그 힘을 잃어버린 것이지.”
“…….”
“바로 나 말일세.”
“식아가 원래는 당신 힘의 일부라 그 말입니까?”
“맞네! 맞아. 바로 맞췄어! 원래 나는 나머지 마선들이 성장한 후, 그들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역할이었지. 헌데? 웬걸? 내가 내 존재에 대해 깨달았을 때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네? 왜인지 아나? 나는 그들의 능력을 따라 할 수 있을 뿐.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 가장 중요한 게 빠져버린 것처럼.”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그때! 허무함에 빠져 더는 발전할 의욕이 없을 때! 그때 그 아이가 태어났네. 마치 기다렸단 듯이 말일세.”
‘독고제의 말과는 너무 다르구나.’
독고제는 본인이 천혈족을 부흥시킬 운명이라 말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최후에 준비된 안배가 틀어졌고, 그 모양 그 꼴이 됐다고 말이다.
“그때부터였네. 나는 다시 의욕을 불태웠지. 내가 마선기에서 태어날 때 작은 문제가 발생했고, 내가 가졌어야 할 핵심 능력이 마지막에 태어난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언뜻 듣기에 그럴싸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식아의 능력을 천신라가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는 이미 모든 마선을 흡수해 천혈족이 그렸던 존재가 되었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제가 가진 식아를 온전히 넘겨주길 원하십니까?”
준혁의 반문에 천신라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1차 융합이 끝나니 더 확실히 느껴지거든. 다른 이들의 권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그리고 깨달았다고는 할까?”
“??”
“처음부터 식아는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이었네. 그 아이는 모든 걸 먹어 치우도록 설계된 아이거든. 그 주인이 되어야 할 나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