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400화 (400/408)
  • 400화. 인연의 시작과 끝

    알 수 없는 적마의 말에 준혁이 급히 손을 저어 두 사람을 떨어트렸다.

    “적마! 지금 무슨 짓입니까?”

    “이 시바아아알! 저년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니 그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습니까? 천천히 말해보십시오.”

    준혁의 설득이 통한 걸까.

    적마는 씩씩대며 조금씩 화를 누그러트렸고, 곧이어 설명을 시작했다.

    “후우…. 네놈이 날 만난 게 어딘지 기억나지?”

    “당연히 모를 리가 있습니까?”

    처음 만난 적마가 봉인에서 풀려나며 준혁을 죽이려고 했던 신비경.

    지금도 그곳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래. 거기. 거기에 날 봉인한 년이 바로 이년이란 말이야!”

    설명하며 또 한 번 화가 치미는지 적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뭐?! 뭐가 말이 안 돼! 내가 당한 당사자인데!”

    “......”

    준혁은 다시금 적마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소 소저는 호란대륙 출신입니다.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고 말입니다. 적마 당신은 구지대륙에 봉인돼있지 않았습니까?”

    “뭐?! 호란대륙을 벗어난 적이 없어? 내가 그딴 거짓말에 속을 거 같아?!”

    “...거짓이 아니고 진실입니다. 적마 수사. 식아를 통해 저와 감응해 보십시오. 지금 제가 거짓을 말하는지.”

    “하라면 못할 거 같아?!”

    잠시 후. 감응을 마친 적마는 당황한 눈으로 소화여와 준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난 건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래! 다른 이들을 불러와 봐! 그들도 나와 같은 자에게 당했으니까!”

    준혁도 오래전부터 신비경에 마선들을 봉인한 존재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다. 다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에 참았을 뿐.

    당장 법문으로 가야 하지만, 적마의 말에 준혁 역시 마음이 동했고, 즉시 공천귀를 포함한 분광소와 인지경, 그리고 삼청조 등을 불렀다.

    잠시 후, 시장통처럼 각자의 얘길 내뱉던 마선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소화여가 자신을 봉인한 자라고.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성광지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여인. 게다가 마선봉인진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수사.

    적마의 말에 따르면 외관뿐 아니라 모든 게 자신들을 봉인한 자와 소화여가 일치한다고 했다.

    “봐! 여기 이년이 사용하는 이 법기! 그때도 이걸 썼다고!”

    ‘파뢰? 아!’

    그러다 적마의 지적에 준혁은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파뢰는 요마족 심천군주의 본명기.

    그녀 역시 성광지력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였다.

    “적마 수사. 내가 보기에 이건 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오해? 무슨 오해?”

    “여기 소 소저가 사용하는 법기는 파뢰라는 물건으로, 원래는 요마족 심천군주의 본명기입니다. 제가 빼앗아 그녀에게 준 건 얼마 전이고 말입니다.”

    “......얼마 전이 얼마지?”

    “수사. 저와 처음 봤을 때 제 수행을 기억하십니까?”

    “......”

    “제가 소 소저를 처음 만난 건 삼경에 오른 후입니다. 게다가 파뢰를 넘겨준 건 더더욱 시간이 지난 후고요.”

    흔들리는 적마의 눈동자.

    “그러니 절대 소 소저가 그대들을 봉인한 이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심천군주를 만나보진 못했으나. 아마 그녀의 외관과 비슷해 오해하신 듯합니다.”

    “끄응. 아닌데…. 분명 그년인데.”

    “그리고 제 여인이니 호칭 좀 조심해주시면 고맙겠군요.”

    “...젠장.”

    결국 여러 가지 증거가 속속들이 나오자, 소화여와 봉인은 아무 관련 없음이 증명되었다.

    당연하게도 소화여가 흉수임이 성립하려면 소화여의 나이는 아비인 소우자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아야 했다.

    반대로 심천군주는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심천이라는 세력의 대표를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성광지력과 파뢰를 포함한 것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물려내려 왔을 테고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느 말이 이치에 맞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준혁은 마선들을 통제하고 법문으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행동에 옮기기 전, 공천귀와 대화를 이어 가야만 했다.

    준혁이 무영기를 다루게 된 뒤로는 외부의 정보를 얻지 못해서,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훌륭하게 컸구려, 공자.”

    “의식공간에서 뵙고 처음 보는군요.”

    만통방이 만들어낸 의식공간에서 짧은 만난 후, 처음으로 대면하는 두 사람.

    그럼에도 준혁은 그가 낯설지 않았고, 그건 공천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천신라를 상대하려 하는 것 같던데. 내 조언 하나 해도 되겠소이까?”

    급하게 움직이려던 준혁은 공천귀의 말에 그가 어떤 자였는지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공천귀는 천신라의 최측근, 도움이 될 정보를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을 터였는데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당연히 먼저 여쭤봐야 했었는데. 말씀해주신다며 경청하겠습니다.”

    “흘흘, 무슨 경청씩이나. 딱히 도움은 안 될 테니 그냥 흘려들으시구려.”

    이어지는 공천귀의 말은 천신라의 권능과 한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자는 언제나 자신을 숨겨왔소. 나를 비롯한 누구도 믿지 않았지.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지배자의 권능이라 불리는 그의 능력은….”

    지배자의 권능.

    그것은 말 그대로 ‘지배자’라는 권능을 담고 있었다.

    심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충성을 약속받는다면, 그자가 가진 힘의 일부를 빌려 사용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은 종족을 가리지 않았고, 기운의 본질도 가리지 않았다.

    마치 임의의 ‘종속의 인’을 새기는 것 같은 효과였다.

    특히 마선에게는 압도적인 효능을 발휘했는데,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기에 본인보다 후순위로 태어난 이들은 전부 지배자의 권능이 자연스럽게 발동되었다.

    “아무 제약도 없는 것입니까?”

    공천귀의 말에 준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그는 세력이 커질수록, 수하가 많아질수록 강해진다는 말이 아닌가?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파악한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지.”

    이어진 공천귀의 설명.

    천신라는 수하들 혹은 마선들의 능력을 빌려와 사용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빌린다’라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상대의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능력 중 핵심만 따라 할 수 있었다.

    또한 근접한 이들의 능력만 사용할 수 있었고, 거리를 둔 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힘이 사라져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천신라는 선마궁에 들어온 마선들을 항상 곁에 두었다고 한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가?”

    공천귀의 질문에 준혁은 천신라가 공화룡을 흡수했던 상황을 말했다.

    “수하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왜 식아의 능력을 이용하나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그 이율 알게 되었습니다.”

    공화룡을 흡수한 천신라는 황홀경을 겪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핵심만 따라 할 수 있던 공화룡의 능력을 온전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고,

    식아의 능력으로 흡수를 마치고 나면 거리의 제약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었다.

    삼선급 수하가 사라진다는 건 손발이 잘리는 것과 마찬가지기에 어떤 이유로도 손해나 마찬가지였는데, 천신라의 능력이 공천귀의 말대로라면 그건 손해가 아닌 확실한 이득이었다.

    “허면, 그자의 약점 같은 건 없습니까?”

    “약점이라….”

    준혁의 질문에 고뇌에 찬 듯 공천귀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딱히 없었지만, 이제는 생긴 것 같구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자는 능력의 일부, 핵심만 빌릴 수 있다고.”

    “아! 그렇군요!”

    공천귀의 선문답에 준혁은 원영 근처에서 배를 두드리며 신나하는 식아를 떠올렸다.

    공천귀의 말대로라면 천신라가 사용한 건 식아의 능력이 아닌, 식아가 가진 능력의 일부분.

    그 말인즉, 마선들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준혁처럼 완벽한 융합이나 공명은 불가능하단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발이 되어줄 상위 수사들을 전부 잃었다?

    천신라는 모든 마선을 흡수해 완벽해지고 싶은 욕심에, 결과적으로는 제힘을 깎아 먹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개인은 강해지고 있을 테지만, 준혁은 그를 개인 대 개인으로 상대할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 생각에 빠진 준혁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한마디 거들지.”

    중괴의 등장이었다.

    ***

    중괴는 예전과 다르게 처참한 모습이었다. 고문을 당한 건지 피폐한 모습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반대로 주서령은 잡혀가기 전보다 피부가 맑고 눈이 생기가 돌았다.

    ‘다행이구나. 둘 다 무사해서.’

    준혁은 빠르게 기감으로 두 사람을 살피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쁨과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분명 천신라에 의해 구속된 상태였는데 스스로 모습을 보이다니?

    그런 준혁의 낌새를 눈치챈 주서령의 설명에 모든 게 해소되었다.

    마선에 의해 각각 분리돼 감금당하고 있던 그들은 담당 마선이 흡수당해 사라지자, 권능이 사라지며 자연스럽게 풀려난 것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려.”

    준혁의 관심이 주서령에게 몰리자 중괴의 주둥이가 댓 발 튀어나왔다.

    “나는 죽나 사나 관심도 없나 보군.”

    “그러겠습니까? 당연히 잘 계실지 알았지요.”

    “참나.”

    중괴는 공천귀와 적마 등을 주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나를 속인 게 있나 본데, 얘길 나누기 전에 하나만 묻자. 혹시 내 친구도 마찬가지인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지 알았기에, 준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모든 걸 말해드리기엔 제 능력이 위화감을 불러올 수도 있다 여겼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지, 거기다 네놈의 사정과 상관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건 적지주 그 친구 아닌가. 암튼 불러주면 좋겠군.”

    잠시 후, 준혁의 가벼운 손짓에 적지주가 나타나 중괴와 마주하고 섰다.

    적지주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불만이 많아 보였다.

    “낚였어.”

    “...잘 지냈는가?”

    “낚였다고.”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 몰랐거늘, 반가우이.”

    “낚였다고, 스벌.”

    오랜만에 해후한 두 마선은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며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귀원패도 난리 치겠군.’

    적지주의 반응에 준혁은 걱정이 밀려왔다.

    귀원패나 적지주 같은 경우, 계속되는 영원한 삶에 허무함을 느끼고 흡수되길 택한 것이었기에, 다시 자아를 찾은 걸 반가워할 리 없었다.

    특히나 예전과 다르게 준혁에게 종속돼버렸기에 흡수되기 전과 비교하자면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돼버렸으니까.

    -그 생각 그대로입니다. 이런 식으로 귀결될 줄 몰랐군요. 저를 속이시다니 실망입니다.

    그때 귀원패의 생각이 전해지자, 준혁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소환하려 했다.

    하지만.

    -저는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최 수사. 최 수사께서 제 능력을 사용하는 건 관여할 수 없겠으나…. 저를 다시 잠재울 수는 있을 거라 느껴집니다.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대신 원할 때 다시 나오실 수 있도록 문을 만들어 둘 테니.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마지막 대답으로 더는 귀원패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준혁은 씁쓸함을 느끼며 그의 존재를 무영기로 감싸 의식 깊은 곳으로 보내버렸다.

    그때, 친구와의 해후를 끝마친 중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본론을 얘기해보지.”

    ***

    쉬지 않고 정보를 뱉어낸 중괴.

    그의 말이 끝나자 좌중은 말을 잃고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중괴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그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군.”

    중괴의 말에 의하면 천신라는 식아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흡수당한 마선들이 자아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지만, 식아를 통한다면 마선들의 권능을 흡수할 수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처음부터 주서령을 계약자로 데려간 것이 아니라 준혁을 꾀어낼 미끼로 보호하고 있었다.

    “나를 속인 것이지, 나는 정말 저 아이가 위험해진 줄 알고 너를 불렀다.”

    그의 최종 목적은 마선들의 권능을 모두 모아 신선을 뛰어넘어 ‘대라’가 되는 것.

    흔히 대라신선이라 불리는 존재.

    현세에 존재하는지, 존재하는 게 가능한지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세상의 유일한 자가 되려 했다.

    “그가 말하더군, 대라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그게 무엇입니까?”

    “공간과 시간을 왜곡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에 공존하는 게 그 시작이라고.”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과거와 미래에 공존한다는 게?”

    “낸들 알겠어? 혼잣말하는 걸 들었을 뿐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걸 위해 천신라 그자가 무슨 행동을 하려느냐지.”

    중괴의 말에 준혁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심주를 꺼냈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왜곡.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무얼 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다.

    공간을 다루는 가장 강한 마선은 공화룡과 공천귀.

    그리고 유일하게 시간에 간섭할 수 있는 마규보.

    마지막으로 왜곡을 불러일으키는 심주.

    천신라는 세 능력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것이고, 그중 두 개는 이미 능력을 가로채 간 후였다.

    ‘마규보를 지켜야 한다.’

    그때, 생각을 정리하며 다짐을 되새기는 준혁을 중괴가 불렀다.

    “최 선사.”

    “말씀하시지요.”

    갑자기 무게를 잡는 중괴의 행동에 준혁이 의문을 드러냈다.

    “천신라의 왜곡에 맞설 수 있는 건 오직 중력뿐이다. 하지만 내 눈을 전부 가져갔음에도 네놈의 수준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군.”

    “......”

    “그러니. 나도 흡수해라. 그럼 원하지 않아도 진정한 중력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무게를 잡던 중괴가 씨익 웃어 보였다.

    “어차피 흡수된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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