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천신라 (2)
식아와 똑같이 생긴 식검을 소환한 천신라.
‘식아가 둘?’
먼저 든 생각은 천신라의 권능이 식아와 같은 걸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세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설마…?!’
다른 마선의 힘을 가져간단 말인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준혁은 곧바로 내면을 확인했다.
다행히 식아는 자신의 단(丹)속에서 평소보다 더 강한 식욕을 드러낼 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식아와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거늘. 도대체 저건….’
마선기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모든 마선은 제각각의 권능과 제각각의 파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아니, 비슷한 권능이라 해도 파장은 천차만별, 완전 달랐다.
그 예로, 천신라의 가장 가까이서 무심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거구의 사내.
그자는 공천귀와 더불어 공간을 다루는 마선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공천귀가 가진 기운과는 판이한 파장을 흘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천신라가 소환한 식검은 준혁에게 충격과 의문을 가져왔다.
그때, 준혁의 궁금증을 일부 해소해주려는 듯 천신라가 또 한 번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말했다.
“하아, 직접 소환해보니 조금 전과는 또 다르구나. 좋구나. 좋아.”
‘조금 전?’
처음 모습을 드러낸 천신라가 숨을 들이켜며 황홀해하던 게 준혁의 뇌리로 스쳐 지나갔다.
그 생각에 미치자, 천신라의 권능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당신. 설마 마선들의 권능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겁니까?”
준혁의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천신라가 아닌 주변 마선들이었다.
‘저들도 여태껏 몰랐단 말인가?’
몰랐다기보다는 어렴풋이 알던 걸 이제야 깨닫게 됐다는 표정이었다.
천신라는 인심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움찔거리는 옆의 거구 사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그리 놀라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 않았나? 공화룡(空化龍)?”
“예, 주군께서 제 권능을 사용하시기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거구의 사내는 준혁에게 고정돼있던 시선을 풀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천신라가 양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식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자네 눈에 이건 어떤 힘일 거 같나? 저기 저자의 권능인데, 한번 맞춰보게.”
“저는 명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알려주신다면 새겨듣겠습니다.”
거구의 사내가 장난을 받아주지 않자, 천신라는 뻘쭘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쳇, 재미없구먼. 그래. 그럼 알려주지. 이건 말일세.”
푸욱-
말을 이어가던 천신라가 손을 가볍게 흔들자, 그의 손에 안착해있던 식검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구의 사내, 공화룡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게 무슨?”
의외의 상황에 눈살을 찌푸린 거구의 사내가 천신라를 향해 의문을 드러냈다.
하지만 심장에 박힌 식검을 빼려는 행동도, 어떤 방비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처럼.
“주군?”
“흐음…. 잠시만 기다려보게. 자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데. 이게 참. 의외로 어렵군.”
그러길 한참.
“오호라. 이런 식으로 운용하는 거군.”
심장에 박힌 식검을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천신라. 그가 웃음 짓자 공화룡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 순간.
슈우욱-
거구의 사내가 마치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공화룡이 사라져 주변 모든 마선들이 깜짝 놀라 당황하는 사이.
천신라는 식검을 불러들여 손에 쥐며 잠시간 희열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가 부르르 떨던 몸을 멈춘 순간.
준혁의 입에서 경고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앙-
“모두 피하시오! 저자에게 잡아먹히기 싫다면!”
천신라가 진정 식아의 능력을 도둑질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로 인해 뒤에 시립해있는 마선들을 전부 먹어 치운다면?
그땐 팔왕이 돕든 림주가 돕든 승부의 향방은 매우 어두웠다.
그 즉시 삼지행으로 온몸을 둘러싼 준혁이 번쩍이는 뇌전의 잔상만 남기며 사라졌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선 수십의 분신이 쏟아져 나갔다.
동시에
“천신라가 각성하려 하니 당장 참전하시오!”
팔왕을, 그리고 천휴림주를 부르는 목소리가 넓게 퍼졌다.
***
준혁으로부터 경고가 터져 나온 순간.
씨익 웃은 천신라는 이미 본인의 식검을 발동하고 있었다.
공화룡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그렇다고 준혁이 가진 식검의 능력을 온전히 파악하지도 못했지만, 우선은 먹이들을 먹어 치우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지금이야 공화룡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파악하지 못한 마선들이 가만히 있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뿔뿔이 흩어지고 말테니까.
그들을 하나씩 찾아 흡수한다는 건, 세상 귀찮은 일이었다.
촤르륵-
천신라의 의지가 움직이자, 그를 중심으로 신선의 한계치라는 열여섯 분신이 각각 식검의 기운을 담은 채 검은 실타래로 변해 주변을 덮쳤다.
그중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마선경은 천신라가 눈독 들인 첫 번째 먹이였다.
“으어어!”
공화룡이 사라진 순간, 모든 이들이 의문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선경은 의문이 아니라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화룡과 연결된 감응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기 때문.
그랬기에 천신라가 덮쳐오려는 순간, 간신히 한 발짝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란 마선경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죽을 운명은 아니었을까?
차장-
“어? 어?”
검은 실타래처럼 변한 천신라의 분신에 마선경이 잡아먹히려는 순간.
뇌전이 번뜩이나 싶더니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든 사내가 앞을 막아섰다
“당장 피하시오!”
사내, 준혁은 천신라의 공격을 막아내며 곧장 성광지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중력을 이용해 천신라가 사방으로 뻗은 분신들의 행동을 방해했다.
“하하하, 내 심장을 가져왔구나! 내가 새로운 힘에 심취해 이 냄새를 못 맡다니.”
그 순간, 다른 마선들을 잡아먹기 직전에 실패한 천신라가 흥에 겨운 듯 외쳤고.
촤르르륵-
중력에 의해 궤도를 벗어나던 천신라의 실타래가 또 한 번 왜곡되더니 원래로 돌아와 마선들을 꿰뚫어버렸다.
푸푹- 푹푹-
천신라의 실타래에 꿰뚫린 마선들은 마치 소멸하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준혁이 막아선, 마선경을 공격하던 실타래도 다시 살아난 것처럼 크게 휘며 쇄도했다.
그 찰나의 순간 준혁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였다.
“그댈 도와주려 했으나 이 방법밖에 없겠소!”
푸욱-
천신라가 먹기 전에 먼저 먹는다.
동의 없이 마선을 흡수하는 걸 꺼렸었으나, 천신라가 모든 이들을 잡아먹고 괴물이 되게 할 순 없었다.
어느새 준혁의 몸에서 튀어나온 식검이 활어처럼 퍼덕거리며 마선경의 심장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준혁의 발끝에서 수백 가닥의 금빛 실이 휘황찬란하게 뻗어 나오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미 다른 마선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한 천신라보다 한참이나 느렸다.
“욕심이 지나치구나. 내가 지금껏 모은 먹이들을!”
준혁의 행동에 천신라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지휘하듯 흔들자, 검은 실타래의 속도가 가속하기 시작했다.
“응용력이 부족하시군요!”
하지만 준혁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검은 실타래보다 느리게 퍼져가던 수백 가닥의 금빛 실이 공간을 격해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나더니 마선들을 뚫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화여와의 밤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보며 깨달았던 작은 심득.
그것이 불안전한 마선의 융합을 조금은 오래 유지하게 만들고 있었다.
“윽.”
하지만, 천신라보다 빠르게 마선을 먹어 치우던 준혁은 심장에서부터 느껴지는 고통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다 전신으로 퍼져가는 미증유의 기운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마선경….’
그 고통의 원인이 모든 마선들과의 감응을 가진 마선경 때문임을 깨달았지만, 고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지상으로 추락하는 준혁의 눈에 식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거울 형태의 법기로 변한 마선경을 공중에서 즐겁게 물어뜯는 식아의 모습이.
쿵-
그리고 거대한 충격음과 동시에 지상에 추락한 순간.
“상공!”
크아아아앙-
소화여의 외침과 태백랑의 사자후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
눈을 뜬 준혁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화여였다.
“상공! 정신 차리셨군요!”
뒤이어 핀잔을 던지는 태백랑과 팔왕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중요한 시기에 그리 편히 자는 사람은 처음이군.”
“태왕. 팔자 좋습니다. 뒷일은 우리에게 맡긴다 그 말입니까?”
정신을 차린 준혁은 내면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지금까지 식아 외엔 느껴지지 않던 수많은 마선들의 목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이게 마선경의 힘인가….’
마선기록방을 먹었을 때도 식아가 한차례 각성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듯 완벽하게 마선들이 자아를 되찾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장 급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준혁이 천신라에 관해 물었다.
자신이 기절해있는 동안 팔왕과 림주가 천신라를 처리한 것인가?
“도망쳤네.”
“도망이라니요? 천신라가 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태백랑의 설명에 소화여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어진 태백랑의 설명.
준혁이 기절한 직후, 팔왕과 천휴림주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바로 합류했다.
그들이 보았을 땐 준혁이 천신라를 상대하다 쓰러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
그 후 팔왕이 비장의 결계를 발동하는 사이 천휴림주가 합세해 천신라를 몰아갔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천신라는 그들을 상대하기보다는 계속 도망 다니며 본인의 수하들을 하나씩 없애는 것에 몰두했다.
‘당연하다. 원래 그게 목표였을 테니.’
처음부터 계획한 건지, 아니면 준혁을 만난 후인지는 모르지만.
천신라는 마선들을 흡수하는 데 조금 급한 모습을 보였다.
‘혹 지배자의 권능과 관련된 것인가?’
자신이 쓰러진 후 벌어진 일에 대해 귀를 기울이던 준혁은 결국 천신라의 진짜 권능이 무엇인가로 생각이 모였다.
하지만 그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
“그리고 우리 공격에 쩔쩔매더니, 결국 도망쳐버리더군.”
“아 참. 도망치기 전에 이상한 소릴 했었지?”
“이상한 소리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준혁은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신경이 곤두섰다. 마치 뒷얘기를 알 것만 같았다.
“음…. 뭐라더라. 식사나 하자고 했던가?”
“기억력하고는. 하자는 게 아니라 하겠다고 했네. 사라지기 전, 식사가 끝난 후 다시 보자고 했지.”
식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불안한 예상과도 맞았다.
“당장 법문으로 가야 합니다!”
“법문? 뜬금없이 법문은 왜?”
심드렁한 태백랑과 팔왕의 반응에 준혁은 식검에 대한 건 비밀로 하고 입을 열었다.
“천신라가 수하들을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잘못 보신 겁니다.”
“잘못보다니?”
“처리가 아니라 그들을 흡수한 거란 말입니다.”
놀라는 팔왕을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가 여러분의 합공에 쩔쩔맨 것이 아니라, 흡수한 마선들을 소화시키는 과정에서 휴식이 필요했던 겁니다.”
준혁의 말에 팔왕은 각자 자신의 기억을 되새겼다. 설명을 듣고 보니 천신라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단 걸 깨달았다.
준혁은 그런 그들이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법문의 마선들과 마규보를 흡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세상의 규칙이 달라질 겁니다.”
“저, 정말인가? 그가 다른 마선들을 먹어 치운다는 말이? 설마 그로 인해 수행까지?”
준혁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가진 성광지력으로 그를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비술로도 말입니다. 그러니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잠시 후, 팔왕은 심각성을 깨닫더니 각자의 비술을 이용해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사라지자 준혁은 곁에 있던 소화여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곳 어딘가에 중괴 어르신과 그녀가 있을 것이오. 그대가 대신 찾아주겠소?”
“네. 그리할게요.”
그리고는 떠나간 팔왕과 함께하기 위해 적마의 권능을 움직였다.
“윽.”
하지만 권능이 발동하기 직전.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에 준혁은 적마의 권능이 아닌 적마 자체를 소환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선경으로 인해 그대들이 자아를 완전히 회복한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얘길 나눌 때가 아닙니다. 당장 천신라를 막지 않…!”
준혁은 내면에서 자신을 닦달하던 적마를 쏘아붙이려다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소환된 적마.
식아에게 흡수된 후 처음으로 자아를 되찾은 적마가 한 행동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적마는 소환되자마자 소화여의 멱살을 잡아끌며 분노를 표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이썅냔!!! 네년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이 됐다고! 뭐?! 잠깐 쉬고 있어?! 이 시바아아알!!”
적마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