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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97화 (397/408)
  • 397화. 결전의 시작 (3)

    준혁은 천신라와의 승부에서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진 않았다.

    하지만 주서령과 중괴를 구하는 건 문제 없다 여겼다. 본인의 안전 역시.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소화여의 말대로 참혹한 상황이 발생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수도계의 삶이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가득한 법.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인해 모든 게 어그러지고, 본인 역시 한 줌 재로 변해버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소화여를 밀어낼 수 없었다.

    달빛 사이로 별빛이 아스러지는 밤하늘.

    “아아….”

    달뜬 목소리가 숨을 죽였고, 뜨거운 열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준혁은 조각배 법기 위에 대자로 뻗어 가쁜 숨을 내쉬었고, 그런 그의 몸 위로 소화여가 살포시 몸을 덮고 있었다.

    샤르륵-

    어디서 날아왔는지 푸른 법의가 둘의 나신을 일부 가려주었기에, 상체의 굵은 땀방울에만 달빛이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이었다.

    “상공…. 이라 불러도 되죠?”

    “아니 될 게 무엇이오. 진작 그리 불렀어도 상관없었소.”

    준혁의 팔뚝에 얼굴을 기댄 채 수줍게 그의 몸을 안고 있던 소화여가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소화여에게서 느껴지는 떨림에 슬쩍 웃어 보이던 준혁은 어느새 천신라를 상대하는 일과 그와 관련된 상념들이 떠오르자 재빨리 날려버렸다.

    ‘그래, 오늘 밤은 그녀 말대로….’

    팔왕이 준비를 마치고 전송진을 이용해 이동해 오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용기를 낸 소화여에게 전부 사용하고, 그 후 자리를 잡고 수행을 최고 상태로 끌어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이유 없이 준혁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소화여가 고개를 살짝 들며 준혁과 눈을 맞췄다.

    “상공…. 저, 듣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보시오.”

    “상공께서 살아온 삶에 대해 알고 싶어요.”

    “삶?”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요목조목 발설한 적은 없지만, 조호랑이나 소화여나 대충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주서령을 대화성으로 데려오기 전, 그에 대한 얘길 나눴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화여의 요구는 여자, 남자를 떠나있음을 느꼈다. 말 그대로 진짜 살아온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네. 상공께서 수도계에 첫발을 들일 때부터. 공법을 익히고, 살아온 모든 것. 모든 것이 알고 싶어요.”

    “그런 것이 궁금하단 말이오?”

    “네…. 안 되나요?”

    소화여의 궁금증에 준혁은 청룡가의 광산에서 일하던 범인 시절을 떠올렸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때를.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내 과거를 돌이켜 보기보단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 가득했구나.’

    그 순간. 준혁은 문득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며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자신을 잠시 채우다 사라짐을 느꼈다.

    깨달음이라 부르기엔 너무 미약하지만, 마음 한편에 가득했던 긴장의 벽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상대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건가?’

    준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소화여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정말 준혁의 살아온 궤적이 궁금해 물어본 것이었지만, 준혁은 아주 잠깐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그때와 변했는지,

    또 그때와는 다른, 어떤 종류의 중압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원한다면 알려주겠소. 나는 다른 인족들과 달리 영근이 없이 태어났다 알고 있었소. 그래서 수도자가 되겠다는 생각 따윈 일절 없이 범인들처럼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살아갔지….”

    그런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평생 자신에 대해서 숨기기 급급했던 준혁은 처음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에 대한 모든 걸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범인이던 시절 여서령을 만나 수행을 쌓기 시작한 일부터.

    경매장에 처음 방문했을 때의 즐거움.

    신비경에서 식검을 만났을 때의 놀라움.

    그리고 청룡가에서 도망쳤을 때의 서러움.

    산들바람을 만나고 혈단법을 만들었던 그때.

    인연이 쌓여가며 마선문을 만들고 사신과 독고제를 만난 사실까지.

    이야기보따리가 풀리기 시작하자, 적마를 비롯한 수많은 마선들을 만나 그들을 휘하에 두고 수행을 올린 일도 술술 흘러나왔다.

    천균과 함께하며 진정한 수도계의 술법들을 익혔던 일과 아마르곤이라는 친구이자 동료를 종속으로 맞이한 것까지.

    또한 지금 수행에 생각하자면 웃긴 일이지만, 원영기 수사들과 결단기 수사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 도망쳤던 나날들까지.

    심지어 능력을 눈치챈 중괴를 제외하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식아에 대한 비밀과 능력까지.

    모든 이야기가 거짓 하나 없이 흘러나왔고, 아침이 오고 다시 밤이 찾아오는 긴 시간 동안 준혁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이야기를 더해갔다.

    “어머머!”

    “정말요?!”

    “세상에나!”

    그 사이사이마다 소화여의 적절한 반응이 그런 준혁을 더 자극했고,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거짓 하나 없이 자신의 모든 걸 풀어내고 말았다.

    ***

    원래라면 선마궁 근처에서 팔왕을 기다리며 수행을 끌어올리려고 했던 준혁.

    하지만 그는 소화여와의 뜨거운 밤과 이어진 수다스러운 날이 끝난 직후.

    그 자리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깊게 침잠해 들어갔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속 얘길 풀어내고 나니,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됐고.

    그 감정의 끈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동안 막혀있던 벽이 허물어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준혁은 평생을 자신을 감춘 채 조심스러운 삶을 살았다.

    수행을 숨긴 건 물론이거니와 가진 능력도 대부분 감춘 채 살았다.

    그랬던 것이 해금되며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해방되었고, 그것이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며 깨달음의 끈을 부여잡게 된 것이다.

    그렇게 팔왕이 도착하기 전까지.

    준혁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한없이 내면 깊은 곳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물론 이것이 수행 상승을 불러오거나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진 못했다.

    하지만 양의 변화를 끌어내진 못했어도 질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

    천운대륙 동남쪽 끝자락.

    약속의 시간이 다가오자, 깊이 침잠해있던 준혁이 알을 깨고 나와, 소화여를 찾았다.

    둘은 곧장 선마궁을 향해 날았고,

    머지않아 웅장하지만, 한없이 어두운 왕성을 마주하게 되었다.

    소화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의문에 찬 소리를 냈다.

    “상공. 왜 아무도 안 보이죠? 팔왕…. 림주…. 모두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니겠죠?”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고갤 저었다.

    그들이 기척을 완전히 감추고 있지만, 준혁의 기감을 완벽히 피해 갈 순 없었다.

    심지어 신선에 오른 천휴림주 또한 미약하지만, 존재감이 멀리서 느껴지고 있었다.

    “다들 아직 확신이 안 서는 모양이구려. 그럼 내가 확신을 가지게 만들어줘야지.”

    피식 웃던 준혁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진지해지자, 주변 대기가 미약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서슬 퍼런 눈으로 왕궁을 내려보다 한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왕궁을 가렸다.

    그리고는.

    “터져라.”

    콰아아앙!!

    작지만 의지가 담긴 목소리에 왕궁을 감싸고 있던 결계 일부가 터져나갔고, 준혁은 즉시 손을 연달아 저으며 폭발을 유도했다.

    콰쾅! 쾅!쾅!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일반인 열댓 명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수십 명의 수사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준혁은 그 모습에 입가를 끌어올리며 손짓을 멈췄다.

    “시작은 한 놈인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 수사 무리.

    그중 한 명만이 마선이었다.

    규선급 수행을 가진.

    “재밌군, 뻔히 내가 왔음을 알 텐데. 설마 저자로 나를 시험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

    눈그늘이 얼굴 전체를 뒤덮은 듯, 규선급 마선은 얼굴이 칙칙하다 못해 썩은 것처럼 보였다.

    그와 어울리게 음침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마선이 아니라 마족이라 해도 믿을 터였다.

    “오호라. 마족과 계약한 것이구나.”

    준혁은 상대를 살피다, 동화되기 전 상대의 원형이 마족임을 알아내고는 놀란 눈을 했다.

    지금까지 본 적은 없었지만, 중괴에게 들은 게 생각나서였다.

    마선은 인족, 그중에서도 심영근을 가진 자와 가장 동화율이 높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족과 계약을 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대신 마족과는 최악의 상성이라 웬만해선 계약하는 이가 없다고 했었다.

    “신기하군.”

    그런데 그런 최악의 상성임에도 규선에 올랐다는 말은 둘 중 하나였다.

    규선에 오른 후 마선과 계약했거나, 아니면 마선이 천신라, 중괴와 맞먹을 만큼 상위급 마선이거나.

    “너는 뭐 하는 놈이길래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지?”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준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옆에 있는 소화여를 보고 혀를 할짝댔다.

    그리다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성광지력? 웬 잡놈인가 했더니 성광지력을 사용하는 자라니.”

    잠시 후, 키득거리던 마족 마선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생겨나더니 그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두 눈이 회색으로 변하더니 머리 위로 거대한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마선경의 붉은 눈동자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기분 나쁘고 불쾌한 눈빛.

    “그런데 그따위 힘을 믿고 난동을 부리다니. 이곳을 다른 곳과 착각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 순간, 준혁은 대기의 질이 변하며 성광지력이 확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 확장은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가까이 있던 소화여에게서였다.

    “기분 나쁜 능력이군요.”

    대기의 질이 변하는 걸 느낀 순간.

    쇄애액-

    어느새 회색 눈동자로 변한 소화여가 파뢰를 창처럼 들어 준혁의 심장을 찔러오고 있었다.

    차앙-

    그 찰나의 순간, 준혁은 곧장 귀원패로 전방을 보호해 파뢰를 막았지만, 혹시 모를 반발력에 소화여가 다칠까 봐 조심했다.

    그 결과 파뢰는 보호막을 깨부수며 몸을 관통하기 직전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준혁의 표정은 평온했다.

    “멈춰라.”

    준혁의 머리 위에 오색기운이 찬란한 왕관이 떠올랐고, 공격해 들어오던 소화여는 꼭두각시 줄에 걸린 인형처럼 공격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섰다.

    “허. 인족 중에 권좌를 얻은 이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군. 왜 그런 사실이 여태 알려지지 않은 거지?”

    놀라는 마족 마선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준혁은 멈춰있던 소화여의 이마에 손끝을 가져갔다.

    태앵-

    그러자 소화여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오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을 기억하는지 표정엔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제, 제가 상공께….”

    “심려치 마시오. 저자의 미혼술에 당한 것뿐이니. 이제야 저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 것 같소.”

    준혁은 소화여를 의지로 감싸고는 마족 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중괴가 말한 적 있지. 천신라만큼이나 조심해야 할 놈 중에 괴뢰종(傀儡棕)이란 자가 있다고.”

    자신이 언급되자, 마족 마선이 실실거리며 좋아했다.

    “남의 정신에 깃들어 조종하는 걸 넘어서, 결국 자리를 차지하고 주인행세를 한다고.”

    “중괴가 입이 싸군. 근데 그걸 알면서 그렇게 태평하다고? 크큭,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네놈은 얼마나 버텨내는지.”

    말을 마친 괴뢰종이 조금 전 소화여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장난 가득한 얼굴로 사악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회색 눈동자가 더욱 진해졌다.

    그 순간 준혁은 무언가 자신의 머릿속에 접촉하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힘이구나.’

    영혼에 직접 접촉하는 것처럼 영력을 이용해 막을 수가 없었다.

    마선기를 다루지 않는 한 절대 피할 수 없는 힘이라 여겨졌다. 마선기가 있다 해도 힘으로 밀린다면 결국 정신력 승부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천신라 밑에 있다고? 흠, 그럼 저 마족의 신체는 이런 식으로 빼앗은 건가?’

    의문이 연달아 떠오르는 사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기운이 점점 강해졌다.

    “크크큭, 제법 버티는군. 하지만 지금껏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누구도 내 능력을 막아선 이가 없었지.”

    준혁은 상대의 말에 그 한 명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재미난 생각이 난 건지, 입꼬리를 올리며 마선기를 강제로 거둬버렸다.

    그 순간 준혁의 눈동자가 빠르게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괴뢰종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승리의 미소를.

    헌데 그가 감히 예상이나 할까?

    세상에 명혼단을 백 개 가까이 먹어 치운 이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상대에게 침투한 게 아닌, 침투를 허락받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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