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보금자리 (2)
“역시 소우자가 일은 잘하는군.”
이름값만 성주였던 건 아니었던지, 소우자는 일을 맡기 시작하자 엄청난 속도로 작업을 진행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방문하면 마을은 도시가 되어 있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아직 비경 내부에서 활동하는 인원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는 것.
그건 조심성이 많은 준혁보다 더 까다롭게 인원을 뽑는 소우자 탓이었다.
솔직히 소우자에겐 강조해서 말하긴 했지만, 준혁은 어느 정도 딴생각을 품은 이들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사람 마음이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가 다르듯이.
올곧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변할 수 있고,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뭐, 알아서 잘하겠지.”
그렇다고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하는 소우자에게 딴지를 걸 생각은 없었기에, 준혁은 수많은 수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비경 중심에 초라하게 자리한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두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화아악-
주변의 풍경이 바뀌며 버드나무 창고 내부로 이동됐다.
“시작해볼까?”
창고에 도착한 준혁은 입가를 끌어올리며 최상층으로 유유히 날아갔다.
그리고는 고이 보관해 두었던 좌무란의 원영을 꺼냈고,
“합!”
사방을 점하며 수백 번의 수결을 진행하다 합장으로 마무리했다.
그러자 좌무란의 원영이 천장에 달라붙으며 그로부터 수많은 거미줄이 뻗어 나왔고, 거미줄은 버드나무를 타고 지면으로 향하더니 비경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쿠르릉-
작은 진동이 비경 전체를 흔들고 지나갔다.
준혁은 비술을 사용한 후, 영역 공간의 일부가 돼버린 비경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자네도 지금 그런가? 영기를 흡수하는 속도가 증가했네!
-증가하기만 할 뿐인가?! 당장 공법을 운용해 보겠나?
-헛! 수행 속도가!
비경 곳곳에서 들려오는 수사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에 준혁의 시선이 좌무란의 원영으로 향했다.
“좌무란 수사.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당분간은 좌무란의 영력을 흡수하는 게 준혁에게 독이었다.
그랬기에 사용처를 생각해보던 중 비경 전체에 발동하려 한 지목족 혈맥의 힘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방법을 찾게 됐고, 임시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버드나무 창고 밖으로 나가자, 놀라서 날아오는 소우자가 보였다.
“주, 주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준혁은 그런 그에게 지목족 혈맥에 대해 알려주고, 그걸 미끼로 수사들을 설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설득이라니요!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누구라도 합류하고 싶어 할 겁니다! 사특한 마음 따윈 수행을 올리고 싶은 욕심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만도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희열에 찬 듯 토로하는 소우자를 지나친 준혁은 탑 내부로 이동했다.
예전엔 거인족이 봉인되어있던 탑.
지금은 준혁의 개인 공간이자, 수련 장소였다.
거인족과의 전투에서 보였듯이, 탑의 견고함은 그 어떤 결계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
그곳이 준혁의 수련 장소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진정한 거처가 정해진 준혁은 내실을 다지기 위해 대외 활동을 줄이기 시작했고,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
50년 후.
제무무를 통해 팔왕과의 거래가 끝나고 정식으로 대황대륙을 관통하는 전송진이 열렸다.
바야흐로 뇌명숲을 제외한 전 대륙을 몇 주면 관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준혁의 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 사실에 천휴림 림주마저 사람을 보내 축하선물을 보낼 정도였고.
남운대륙 남부의 처음 보는 세력들도 앞다투어 나타나 준혁에게 각종 보물을 진상했다.
새로운 전송진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이를 통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
100년 후.
준혁의 도움을 받은 청교장이 드디어 청심문의 문주 자리를 꿰찼고, 그걸 계기로 청심문은 정식으로 준혁 아래로 들어왔다.
그 사건에 발맞추어 교호홍 역시 적루를 준혁에게 바치며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당연히 ‘영원’이란 말을 믿지 않은 준혁은 두 사람에게 금제를 가했고, 그 소식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번지며 수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준혁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특수한 장소를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고, 그곳에선 수행 속도가 빨라진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수사의 재능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수 배에서, 어떤 이들은 수십 배는 빨라지기도 한다 했다.
심지어 천휴림주 역시 자신의 방계 혈족 중 한 명을 준혁에게 보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건으로 그 소문이 진실이라는 얘기가 빠르게 퍼지는 중이었다.
***
150년 후.
제무무의 역량과 진산문의 진법이 만나, 뇌명숲과 불타는 사막까지 전송진이 설치됐다.
그 사실에 선계가 발칵 뒤집혔고, 태왕문도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진 뇌명숲은 뇌기 때문에 어떤 공간 이동 비술도 통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무리 고위 수사라도 비행으로 몇 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고, 그걸 해결한 준혁의 능력에 혀를 내두른 것이다.
태왕문이 뒤집힌 이유는 전송진 설치가 성공하면서 더는 뇌공지신 공법을 이용해 뇌명숲을 이용한 돈벌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태왕문의 문주 태식은 정식으로 준혁 아래 합류했다.
다만 그런 작은 문파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말이다.
***
200년 후.
오직 준혁만 출입할 수 있는 비경 내 탑.
“큰둥아, 청호랑 저기 저 두 녀석은 내가 데려갈게.”
“결국 떠나려고 하느냐.”
“응. 불의 근원에 대해 더 알아야겠어.”
준혁의 몸속에서 완벽히 회복한 산들바람은 진선 수준의 수행을 지닌 규선급 강자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수행과 경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해 제 실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수행을 올리는 과정에서 본인이 아닌 타인이 천겁을 대신 견뎠기 때문.
“자신 있느냐?”
준혁의 물음에 산들바람은 청호와 용천, 천무를 한 번씩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신 없어도 해야지. 아니, 해낼 거야. 그자의 기억 속에 있던 근원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얘들도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흐음….”
산들바람이 가려고 하는 곳은 초태해였다.
예전처럼 재미 삼아 초태해에 자리한 괴수들을 사냥하기 위해서가 아닌.
염화신족의 기억 속에서 찾은 초태해 깊은 곳의 근원을 가진 괴수들을 잡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초태해가 그저 감당할 수 없는 수행을 지닌 괴수들이 즐비한 곳이라는 인식뿐이었지만, 염화신족의 기억 속에선 아니었다.
현 대륙의 모든 것들은 사실 초태해에서 기원했고, 그곳이 선도의 시발점이었다.
그랬기에 고대의 종족들은 초태해에 관해 깊이 연구했고, 각각의 속성을 극한까지 보유한 괴수들에 대해 알게 됐다.
산들바람이 잡으려는 건 바로 그 괴수 중 불의 근원을 가진 괴수.
그리고 가는 김에 청호가 가진 바람의 기운이나, 용천과 천무가 지닌 물의 기운을 가진 괴수들도 사냥하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맘 같아서는 준혁이 함께해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나 걸릴지, 아니 끝이 보이기는 할지 알 수 없는 일에 함께할 수는 없는 법.
“이걸 받거라.”
잠시 후, 준혁은 네 영수에게 어울리는 영보급 보물을 각각 전해주었다.
그리고는 산들바람에겐 추가로 한 쌍으로 된 팔찌를 건넸다.
“이건?”
“천영보 옥천이다. 하나는 네가 착용하고,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너와 떨어지게 될 아이에게 주거라.”
옥천을 받아든 산들바람은 법기의 기능을 파악하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와! 이런 게 있었다니! 좋았어!”
그리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준혁의 품에 덥석 안겨 왔다.
준혁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주었다.
“다녀올게.”
“몸조심하거라. 그리고 지금도 충분하니 언제든 그만두고 싶으면 돌아오도록 하고.”
“응.”
***
250년 후.
준혁은 이질적인 파동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산들바람을 포함한 영수들이 전부 떠나고 완전한 폐관에 돌입했고, 처음으로 누군가의 방문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찾지 말라 했거늘.’
자신의 명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기에 그는 손을 가볍게 저어 탑 내부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열린 틈 사이로 제무무가 ‘헉’하며 튀어나왔다.
제무무는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이동돼서 그런지 놀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준혁을 발견하고는 급히 바닥에 몸을 붙였다.
“해냈습니다! 스승님!!”
“아직도 그리 부르느냐. 끈질긴 놈.”
준혁은 여전한 제무무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그사이 제무무는 품에서 팔뚝만 한 원형 법기를 꺼내더니 준혁에게 날려 보냈다.
“명하신 대로 완성했습니다… 만.”
“‘만’?”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 한 번 발동할 때마다 초극영석 다섯 개가 소모됩니다.”
초극영석 다섯 개라면 어마어마한 재화였다. 그게 어떤 술법이나 비술이라 할지라도.
“호오. 안정성은?”
“확실합니다. 원영기 수사들도 압박을 견뎌낼 겁니다.”
준혁은 제무무의 설명을 들으며 손안에 쥔 원통형 법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규선의 수행도 완벽히 자리 잡고, 거처까지 마련되자, 그가 가장 먼저 하려 한 것은 하계면의 인연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면 간 통로를 열다 보니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바로 정식통로가 아닌 하계면에 생긴 통로는 일반적인 수사가 버텨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준혁은 마족의 전영술과 귀원패 등 각종 술법으로 몸을 보호했기에 살아있을 수 있던 것이지, 일반적인 인족은 공간 압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제무무가 염원하던 계면 간 전송진이었다.
그 후, 제무무를 돕는 한편 엄청난 양의 재화를 투입했고, 결국 지금의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비록 초극영석 다섯 개를 소모해야 하는 일회성 통로에 불과하지만, 준혁에겐 그것이면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 정식으로 통로를 만드는 건, 오래 걸리든 말든 그에게 별 상관없었다.
“좋아. 그럼 확인해 보러 이동하지.”
“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
이동은 신속하고 간편했다.
대화성부터 주운대륙과 뇌명숲을 넘어 흑석대륙까지 이어진 전송진.
모든 게 준혁의 통제하에 있었기에, 재발동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바로 발동하기 위해선 영석 소모가….”
“상관없다. 발동하라.”
진법이 안정되기 전, 전송진의 재발동은 몇 가지 자잘한 문제를 불러왔지만, 상관없었다.
시간은 금보다 귀한 것.
준혁은 하계면에 방문해 인연들을 불러온 후, 다시 폐관에 돌입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하루라도 빨리 천신라와 맞설 만한 상태로 수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부웅-
겨우 이틀 만에 흑석대륙까지 날아온 그는 곧장 옛 구지대륙과의 경계에 자리한 서봉산맥으로 향했고.
“주군을 뵙습니다!”
“최 선사를 뵈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산문 진법가들과 제무무의 수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준혁의 등장에 당장이라도 바닥에 부복하려 했으나, 가벼운 손짓에 제지당한 후 전송진 발동을 시작했다.
“시작하겠습니다!”
투웅-
‘허어…. 이 정도 파동이라니.’
진법이 발동되자 규선에 오른 준혁조차도 놀랄 정도의 영기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고, 잠시 후엔 샛노란 황금빛 기둥이 흐릿하게 비추다 사라졌다.
“직접 오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제무무는 전송진이 발동하자 준혁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고,
“직접 가지.”
준혁은 가볍게 손을 저어 분광소로 분신을 만들어내 전송진법 위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가족을 맞이하는 일인데. 당연히 내가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