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보금자리 (1)
“세상에나….”
주군이 내민 족자가 일반형 공간 법기라 생각한 소우자.
족자 내부로 들어온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어찌….”
수행을 쌓고 묘립성의 성주가 될 때까지, 당연히 그도 공간형 법기를 다뤄본 적이 있었다.
다른 수사들과 교류하며 흔히 영보라 불리는 공간 법기도 몇몇 구경한 적이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주군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라는 공간 법기 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내부 중심에 우뚝 솟은 탑과 근거리에 자리한 오두막과 버드나무. 거기까진 일반적인 공간 법기의 규모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끝없이 펼쳐진, 물론 끝은 존재했지만, 시야에 한꺼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내부의 크기에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이런 것이 정녕 존재할 수 있다니.”
게다가 주군의 설명에 따르면 족자 내부인 이 공간은 대화성 근처 비경과 이어진 장소라고 했다.
“실존하는 공간 법기라니….”
그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나 묘립성과 대화성을 오랜 기간 운영한 소우자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실존하기에 그곳에 거처를 마련할 수도 있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동시에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면 족자를 통해 어느 대륙에 있든지 간에 곧바로 이동해 올 수 있다.
준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화성이 천신라에게 털린 것처럼, 대부분 수성(守城)에 실패하는 이유는 최고 고위 수사들의 빈자리 때문.
그 약점이 보완된 순간, 방비의 허점이 대부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대황대륙에서 들려온 소문대로 주군이 규선 중에서도 상위 수사라면, 대부분을 넘어 조금의 허점도 남지 않게 되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설명 듣기로, 공간 법기와 이어진 비경의 외부 역시 주군의 특수한 힘으로 가려져 있기에, 허락되지 않은 이는 절대 찾을 수 없다 했으니 더더욱.
“정말 대단한 걸 손에 넣으셨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비경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본 소우자는 주군이 어째서 믿을 수 있는, 올곧은 자들을 선발하라 했는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내부의 배신자가 생기지 않는 이상. 천신라가 온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곳이다.”
정말 그럴지는 모르지만, 소우자는 분명 그럴 거라 여겼다.
잠시 후, 준혁이 확인하라고 한 몇 가지를 실험한 그는 품에서 주먹만 한 옥패를 꺼내 영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공간 한쪽에 틈이 생겨나며 비경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어?! 성주님? 언제 나가신 겁니까요? 분명…. 주군과 함께인 줄 알았는데.”
비경을 확인하고 돌아온 소우자를 본 그의 직속 수하의 반응이었다.
“사람이 들고 나가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다니,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했거늘.”
“죄, 죄송합니다.”
소우자는 잘못 없는 수하의 기강을 한번 잡아주고, 준혁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잠시 후, 좌선 중이던 준혁이 반갑게 맞이해주자 그 앞에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확인해보라고 한 것들을 점검했습니다.”
“말해보게.”
“어떤 방법을 써도 제 실력으로는 버드나무 내부나 탑 내부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주군께서 주신 물건을 사용했음에도 말입니다.”
“흐음, 그렇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준혁.
“또한 주군께서 신호를 보내시는 시간 외에도 공간 내 영기의 분포도가 일정하게 유지됐습니다.”
소우자를 족자 안으로 들여보낸 후. 무영기를 사용해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도 했고, 여러 공법을 번갈아 사용하며 공간 내부의 기운을 조절하려고도 했다.
외부와 달리 공천귀의 내부는 인위적인 공간이었기에, 준혁은 그곳의 영기가 어떤 식으로 유지되는지 실험한 것이다.
‘결국, 내 상태와는 별개로 하나의 세상이라 생각해야겠군.’
“마지막으로 외부로 나간 뒤, 전해주신 탐지기를 발동해도 비경 외부에서 작은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곳에 비경이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저조차, 정말 존재했는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살짝 들뜬 듯한 소우자를 향해 준혁이 피식 웃어 보였다.
“어때? 마음에 들던가?”
“예! 대단합니다! 그곳은 주군의 세상, 아니, 주군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보금자리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허면, 지금 뭐 하고 있는가?”
“예?”
“당장 움직이게. 그곳에 들일 이들부터 선별하도록 하고. 탑을 중심으로 일정 공간을 비우고 나머지 구역에 터전을 닦도록 하게.”
“예!”
잠시 후, 소우자가 사라지자, 준혁은 용천과 천무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들을 각각 진산문의 소화여와 주서령의 부친인 주백강에게 보냈다.
그런 후에 여유를 가지다, 기약 없이 밖에서 대기 중이던 교호홍과 청교장을 불렀고, 그들과 짧은 면담을 마치고 제무무를 불러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엄청난 변화가 밀려오는 중이었다.
***
“한창 바쁜데, 무슨 일이시지?”
“바쁘다고 전갈 넣을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분께서 부르시는데 당장 가봐야지.”
제무무는 자신을 돕던 이를 타박한 후, 급히 전송진으로 향했다.
몇 주 후,
대화성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준혁을 찾아갔고, 엄청난 얘길 들어야만 했다.
“예?! 대황대륙까지 연장하란 말씀입니까?”
“그렇네. 우선 백랑족을 필두로, 사휘족까지만 연결하면 되네.”
“말씀을 들어보니…. 그게 끝이 아니군요.”
“아마도 그럴 테지.”
별것 아니란 듯, 준혁이 건넨 물건을 받아 든 제무무.
그 안엔 전송석 여덟 개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필히 팔왕이 접촉할 터. 재량껏 행동하지 말고 곧바로 나에게 보고하고.”
“명대로 행하겠습니다. 스승님.”
스승이란 말에 준혁이 피식 웃었다. 첫 만남에 제자로 받아달라는 요청을 무시한 지 오래.
조금 가까워졌다고 농을 내뱉는 제무무의 태도가 어처구니없는 한편, 즐겁기도 했다.
“나는 자네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
“아직은 안 되나 보군요.”
“대신 이것을 받게나.”
제무무는 전송석 여덟 개를 공간대에 집어넣고, 잽싸게 다음 물건을 낚아챘다.
“이건…?!”
그리고는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계면 간 전송진을 만드는 게 꿈이라 하지 않았나? 내 실험 삼아 만들어본 전송석이네. 하지만 부족한 게 많을 것이야. 한번 실험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면 다시 만들어보지.”
“가! 감사합니다! 이 으, 은혜를 어찌!”
넙죽 엎드리는 제무무의 귓가로 준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하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알지?”
***
용천의 방문을 받은 소화여는 준혁의 전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가능할까?’
대라멸진을 연구하는 진산문 수사들 틈바구니에서 엄청난 속도로 진법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지 오래.
현재는 자유자재는 아니라도 어설프게나마 마선 봉인진을 사용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그러는 와중에 준혁에게서 온 전언은 반갑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했다.
‘진산문 전체를 설득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로 데려오라니…. 참 어려운 걸 원하시는구나.’
새로운 보금자리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진산문 수사들을 이용해 방어를 위한 결계를 만들 생각인 듯 보였다.
과연 자존심 높은 진산문 수사들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한 번 고개를 숙이긴 했다지만, 이미 갈구하던 대라멸진을 얻은 그들이 준혁 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아무리 준혁에게 약점이 잡혀있다고는 해도, 이들도 엄연한 삼선급 수사를 가진 종문이었다.
물론 보금자리란 곳으로 이주하기만 한다면, 그의 곁에서 진법을 연구할 수 있으니 자신에게는 최고였지만 말이다.
“어? 이건?”
준혁의 전언을 곰곰이 곱씹던 소화여는 용천이 건네주는 옥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주인님께서 이 안에 담긴 내용을 이용해 적절히 운을 띄우면 진산문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
용천의 손에는 한 뭉텅이의 부적도 함께하고 있었다.
“데려오기 전에 사상검증도 하시라고 전하셨습니다.”
옥간 안에 담긴 것.
그건 대라멸진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닫게 된 진산문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만한 의문과 그 해결책이 담겨있었다.
-과연 36방 대라멸진이 끝일까?
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해법.
물론 미끼로 사용할 것이기에 알짜 내용은 전부 빠진 껍데기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진법에 미쳐있는, 특히나 대라멸진에 미쳐있는 진산문의 문주를 비롯한 수사들이라면 껍데기에도 낚일 게 분명했다.
***
천무의 방문을 받은 주백강.
그는 옥간과 부적 꾸러미를 말없이 바라보다 옥간을 이마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경직된 채 주먹을 불끈 쥐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복수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사위의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으니, 믿을 수 있는 자들만 추려, 그곳에서 새로운 주가를 만드시지요. 준비가 끝나면 서령이를 구하러 갈 테니,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
절벽이 어우러져 천혜의 요새처럼 보이는 장소.
그곳엔 작은 정자가 있었다.
정자 위엔 두 남녀가 말없이 차를 마시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헛기침을 했다.
자주 왕래하진 않았지만 서로의 처지가 비슷했기에 이상한 친밀감이 형성된 상태였다.
“제가 요즘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여인의 말에 사내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해보란 듯 턱 끝을 까딱거렸다.
“최근 대화성의 주요 인사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고 있는 걸 아시나요? 그것뿐이 아니지요. 엄청난 재화가 대화성으로 모여들고는 소리소문없이 증발하기도 한답니다.”
“흐으음….”
“아랫것들을 통해 들어보니, 모든 게 그자의 거처로 들어간 순간 증발해버린다고 하더군요.”
여인이 콧소리를 내며 말을 마치자, 사내. 청교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쳤습니까?”
“아뇨. 거짓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봤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교호홍 수사 당신이 미쳤냐는 말입니다. 설마 그자…. 그분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겁니까?”
“우리 적루가 하는 일이 뭔가요? 수사들과 몸을 섞고 뒹굴다 보면 자연스레 소식이 들려오기에 기억하고 있을 뿐. 뒷조사라뇨? 불쾌하네요.”
청교장은 괜한 얘길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교호홍은 그의 태도에 의미심장한 교태를 흘렸다.
“호호, 왜요? 동맹이라고는 하나, 가느다란 선 하나 걸친 것에 불과할 뿐인데. 청교장 수사도 여전히 부문주에 머물러있지 않나요? 문주 자리에 오르는 걸 도움받기로 한 거로 아는데….”
“어찌 그 사실을!”
“맞네요. 혹시나 하고 찔러봤는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청교장은 대화가 길어져 봐야 자신만 손해란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교호홍이 살짝 입을 가리고 웃다가 손을 살짝 저었다.
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천천히 움직이란 신호였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있죠.”
“그게 뭡니까?”
“선마궁을 치리라는 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청교장은 문주 자리에 오르는 걸 목표로 수련에만 매진하기에 모르겠지만, 교호홍은 저잣거리까지 소문이 난 준혁의 얘기를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여인을 위해, 전생을 넘어 찾아온 사랑 이야기.
물론 준혁이 들었으면 어리둥절할 내용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많은 포장을 거쳐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여수사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 자라면 자신의 여인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겠지.’
교호홍도 진실은 몰랐지만, 퍼진 소문으로만 본다면 준혁의 행보를 예측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많은 인적자원과 물자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다?
그녀 생각에 그건 분명 전쟁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교호홍은 불쾌한 얘길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청교장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말 믿으세요. 분명 그리될 테니까.”
“…….”
“그러니 우린 결정해야 해요. 만약 선마궁과 그자가 전쟁을 치른다면…. 동참할지, 말지를.”
혹은 뒤통수를 칠지, 아니면 그의 발아래로 들어갈지를.
당연히 선마궁에 비한다면 준혁의 세력은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에 그 전쟁에서 준혁이 승리한다면?
그땐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혜택을 부여받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난… 보상이 큰 도박을 좋아하는 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