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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91화 (391/408)
  • 391화. 태왕의 흔적 (1)

    ‘아쉽군.’

    사휘족 수사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한바탕하려 했다.

    하지만 준혁의 생각과 달리. 사휘족 수사들은 그의 등장과 동시에 전원이 바닥에 부복했다.

    삼경급 수사들은 하나같이 한 손을 머리에, 나머지 손은 반대편 어깨에 올린 후, 반 무릎 자세로 공경을 보였고,

    그 아래 하위수사들은 바닥에 웅크린 채 오체투지를 했다.

    말 그대로 족장을, 아니 사휘족의 선조를 맞이하는 격이었다.

    준혁은 그런 수사들을 말없이 내려보다가, 가장 앞에 나와 있는 자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대가 현 사휘족의 대표인 몽호야(夢虎夜)인가?”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준혁의 목소리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본 것처럼 눈빛 하나는 귀신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저것이 사휘족의 명안(明眼)인가.’

    준혁이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는 사이, 몽호야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선사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건 새로운 태왕이 탄생했다는 말이니…. 대표는 선사시지요.”

    ‘오호, 생긴 것과 다르군.’

    웅왕보다 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듣기 좋은 말로 고분고분 대답하자,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겨, 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미리 준비하고 기다린 것을 보니, 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나 보군.”

    “마음을 먹다니요. 당연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저 아이가 전 태왕이 살아있을 때도 사휘족의 대소사를 맡았던 아이입니다.

    지왕의 목소리에 준혁이 ‘오호라’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척 보기에도 눈치가 빠른 것이 실무를 담당하기엔 적합해 보였다.

    -꽤 똘똘한 아이인데….

    -왜 말을 멈추시는 겁니까? 마저 하시지요.

    -오랜 시간 수행이 오르지 않아 스스로 족 내의 대소사를 맡기 시작했다 들었습니다.

    ‘스스로라….’

    보통 수행이 오르지 않는다면, 전보다 더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게 순리.

    ‘다른 돌파구를 찾는 것인가?’

    준혁이 의문을 드러내는 사이, 몽호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뒤에 자리한 사휘족 수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수천의 수사들이 절도있게 동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를 맡고 싶은데. 어찌하실는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심성이 묻어났다.

    “좋지. 안내하게. 어디 이름 높던 태왕의 영토를 둘러보세나.”

    준혁은 몽호야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감으로 사휘족 전원을 빠르게 검사했다.

    “가시지요. 먼저 전 태왕께서 머무시던 왕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잠시 후, 몽호야를 따라 몸을 날리던 준혁은 의문이 섞인 얼굴로 사휘족 수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

    준혁은 몽호야의 뒤를 따라 태왕의 영토를 둘러보며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웅왕의 진심이었다.

    삼선급 수사들이 전부 귀천한 후, 사휘족은 점차 영토가 좁아지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장소를 하나씩 주변에 빼앗기고 있었다.

    당연히 위에서 시킨 일이 아닌, 아래 하위수사들 사이에서 잡음이 일며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일이었다.

    물론 타 종족에 빼앗긴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당장은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말은 수도 자원이 적어진다는 말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휘족 수사의 질이 점점 떨어진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리고 해가 더해갈수록 그 경향은 심해질 테고 말이다.

    웅왕이 왜 그렇게 자신을 태왕의 자리에 앉히려 하나 의구심을 가졌던 준혁은 사휘족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웅왕이 염려하던 건 팔왕의 위엄이나, 연계의 허점 같은 것이 아닌, 언젠가는 찾아올 사휘족의 멸족이었음을.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웅왕이 직접 나서서 사휘족을 보호하면 안 되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특정 종족에게 종족 번식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원래 영수족은 견제와 전투를 거듭하며 서로 성장하는 자들.

    그것 자체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앞으로 성장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았다.

    ‘중요한 건 제지가 아니라 균형이지.’

    준혁의 생각대로, 사태가 이렇게 돼버린 건 태왕이라는 천장과 그 천장을 받치던 기둥들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

    그랬기에 일정 선에서 티격태격하며 나아가고 물러서기를 반복해야 하는 일이, 사휘족이 계속 물러나기만 하는 일로 변질하였을 뿐이었으니까.

    ‘균형이라. 딱히 어렵진 않지. 헌데 과연 누가?’

    대천경까지는 준혁의 뒷받침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삼선에 오르는 건, 오롯이 본인의 능력.

    아무리 중괴의 힘으로 기운을 압축하고 지목족의 힘으로 돕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삼선은 말 그대로 천기를 읽어 하늘과 맞닿아야 하는 일.

    절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나 진선을 넘어 규선에 오르는 건 대천경 수사 열 명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힘든 일.

    한동안 상념에 빠져있던 준혁은 쓰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든 건지 눈을 번쩍 뜨고는 급히 몽호야를 불렀다.

    “이제 중요한 곳은 다 돌아보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사휘족이 바람의 기운을 수련하는 통곡의 절벽만 들리면 됩니다.”

    ‘통곡의 절벽이라, 이름만 들어도 마음에 드는군. 청호를 그곳으로 보내야겠어.’

    준혁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통곡의 절벽이라. 그곳은 천천히 들르도록 하고. 우선 그곳으로 가보는 게 좋겠군.”

    “그곳이라 하심은….”

    “그곳 말일세.”

    ***

    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 언덕.

    그 위에는 준혁과 몽호야, 그리고 태백랑이 서 있었다. 지왕은 준혁과 차후 면담하기로 한 후 자신의 영토로 돌아간 후였다.

    세 수사는 말없이 언덕 아래 펼쳐진 파괴의 흔적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풍기는 기운을 느끼려는 것인지 다들 기감을 잔뜩 끌어올린 상태였다.

    몽호야를 따라 사휘족의 영토를 가볍게 훑어본 준혁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

    “왜…. 이곳에 오자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곳은 전 태왕이 강제로 수행을 올리다 귀천하고, 그의 강제 수행 상승을 유도하다 반서로 죽어버린 진선급 수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준혁은 몽호야의 질문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후,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기감으로 주변을 살폈고.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며 황금눈을 드러냈다.

    그 순간, 그의 시야로 황금빛 격자로 이루어진 광활한 세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황금빛 격자 사이로 핏빛 줄기가 빠르게 번져나가더니 곳곳에서 이상 반응을 일으키며 파바박- 핏빛 불꽃을 일으켰다.

    ‘역시. 아직 남아있구나.’

    사휘족 영토에서 나오는 각종 재화에는 관심도 없던 준혁이 전 태왕이 수행을 올리던 장소에 관심을 보인 이유.

    그건 바로 혈맥의 힘 때문이었다.

    혈맥은 혈맥 보존의 법칙에 따라, 세상에 항상 일정량이 존재하는 법.

    일반적으로는 수사가 귀천하는 순간 혈맥의 힘이 세상으로 흩어져 새로운 혈족에게 발현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자신 앞에 부복하고 있던 수천 명의 수사들을 기감으로 확인해본 준혁은 그만큼의 강렬한 혈맥을 가진 이가 없다는 걸 눈치챘다.

    규선급에 오른 태왕이 죽고 혈맥의 힘이 누군가에게 발현됐다면, 그것이 몇 갈래로 나뉘었다 한들 꽤 강렬해야 정상.

    준혁은 이곳이 그 이유일 거라 어림짐작한 것이었다.

    ‘신선에 도전한 규선이라 이건가.’

    전 태왕이 너무 강력했기에, 그 힘이 완전히 흩어지지 못하고 ‘혈맥의 힘’ 자체로 세상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

    물론 전 태왕이 죽기 전과 동일한 질량의 힘은 아닐 테지만, 그뿐 아니라 나머지 진선들의 힘들도 곳곳에 남아 흔적을 남기고 있었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마치 너무 큰 힘에 이끌려 주위를 맴도는 지구의 달처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혈맥의 힘을 여실히 느끼던 준혁은 중괴의 중력의 힘으로 파괴의 흔적과 그 주위에 뻗쳐있던 기운들을 한곳으로 압축했다.

    그리고는 압축된 힘을 손안으로 끌어와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중괴가 직접 와도 할 수 없는, 오직 중력의 힘과 천혈의 힘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우웅-

    엄청난 기파와 함께 사휘족 혈맥의 힘이 광채를 빛내며 모여들자, 몽호야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준혁과 그의 손에 모여드는 기운을 계속해서 반복해 쳐다보았다.

    “이, 이런 게 가능하다니….”

    몽호야라고 몰랐을까?

    그도 전 태왕과 진선급 수사들이 귀천한 후,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물론 원영을 이루지 않은 모든 아이를 모조리 조사했다.

    당연히 강렬한 혈맥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색출해, 텅 비어버린 혈족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혈맥의 힘이 강할수록 사휘족이 사용하는 술법이나 비술에 통달할 가능성이 컸기에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수행 상승 속도도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수족이 길고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해올 수 있던 원동력이었고.

    하지만, 새롭게 혈맥이 발현한 이가 없음을 깨닫고 좌절해야만 했다. 하늘이 사휘족을 버렸다고 여겼다.

    “왜? 탐나나?”

    준혁은 그런 몽호야를 보고 피식 웃더니 쉬지 않고 힘을 모았다.

    어느새 몽호야는 삼경 이하의 수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서, 선사! 부디! 사휘족의 영광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드디어 입에 발린 말이 아닌, 본심을 외치고 있었다.

    ***

    ‘내가 독식한다 생각하나 보군.’

    지금 준혁의 눈빛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여길 터였다.

    그는 중괴의 힘을 이용해 혈맥의 힘을 끌어모아 압축함과 동시에 천혈을 자극해 혈맥이 가진 고유 능력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눈이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면서 광채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고, 그 사이로 핏빛 기운이 드문드문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당장이라도 손안의 기운을 삼킬 것같이 욕망이 넘치게 보였다.

    준혁은 바닥에서 울부짖는 몽호야를 외면한 채 정신을 집중했다.

    ‘이게 명안이구나.’

    환영을 뚫어보는 사휘족의 명안.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진 것인지 파악하며 희열을 느꼈다.

    그러면서 손안에 모인 혈맥의 힘을 조금씩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백랑족이 백호족과 비슷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사휘족이 더 가깝구나.’

    한참 동안 혈맥의 힘을 흡수하던 준혁은 ‘명안’뿐 아니라 사휘족이 지닌 사자후가 백호 혈맥의 힘과 유사함을 깨달았다.

    아니,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판박이라 해도 좋았다.

    ‘호오. 이 정도면 삼선급 수사에게도 통하겠어.’

    사자후에 담긴 능력을 하나씩 따져보던 준혁은 새로운 발견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칠주야를 압축에만 매달리던 준혁이 깊은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후우…. 대단하군.”

    그리고는 손안에 든 구슬처럼 빛나는 회색 기운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서. 선사. 아, 아니 태왕이시여…. 부디….”

    그렇게 얼마나 고민에 빠져있었을까.

    준혁은 입맛을 다시다가 혈맥의 힘이 뭉친 그것을 몽호야에게 내밀었다.

    “왜? 그대가 이것을 가진다면 당장이라도 진선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저희 사휘족….”

    “족? 진심을 보이면 생각을 달리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몽호야를 빤히 쳐다보던 준혁은 그의 눈동자가 떼굴떼굴 굴러가는 걸 보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당장이라도 먹어 치울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그러자 엉거주춤 서 있던 몽호야가 또다시 바닥에 넙죽 엎드리려 했다.

    “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새 터져 나온 속마음에 준혁은 손을 살짝 저어 몸을 낮추고 있던 몽호야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의 눈앞에 혈맥의 구슬을 내밀었다.

    “그래? 그럼 그대가 진선에 오를 수 있게 내가 도와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대신 말일세. 자네는 나에게 무얼 줄 텐가?”

    이미 혈맥의 힘을 절반이나 꿀꺽한 준혁의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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