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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90화 (390/408)

390화. 태왕(颱王) (3)

오두막 내부.

산들바람이 좋아하던 선식으로 가득 차 있던 상은 치워진 지 오래였고, 그곳엔 통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의자 여덟 개가 놓여있었다.

당연히 각각의 통나무 위엔 팔왕을 포함한 준혁이 동그랗게 배석한 상태였다.

“난 여전히 반대야. 아무리 영수의 피가 섞였다 한들 이자가 인족임은 틀림없는 사실. 어찌 우리와 함께할 수 있겠나?”

착석한 후, 가벼운 인사가 오갔다.

그 후엔 곧바로 준혁이 태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문제가 거론됐다.

암왕의 반대에 조왕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 모습에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주도하고 있던 웅왕이 말했다.

“나는 찬성한다. 확인해본 결과 그는 그 누구보다 태왕에 어울린다. 아니 인족의 피가 섞였다고는 하나 그는 영수의 본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웅왕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준혁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묵왕에게 옮겨졌고,

“......”

묵왕의 침묵에 그를 대변하기라도 한 듯 웅왕이 말을 이었다.

“여전히 중립인가 보군. 그럼 찬성 세 표 반대 두 표, 중립 한 표. 최 선사가 태왕의 자리를 잇는 것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무리하지.”

그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준혁이 입을 열었다.

“헌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인가?”

준혁의 의문에 웅왕이 말해보란 듯 궁금증을 나타냈고,

“태왕을 잇는 것도 좋고, 잇지 않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헌데 제 의견은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준혁의 발언에 당연히 그가 수락한 줄 알고 있던 웅왕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럼 나와 왜?”

왜 대결을 치렀냐는 물음.

준혁은 웅왕을 포함한 팔왕을 한 번씩 눈을 맞추었다.

반대하던 암왕과 조왕마저도 궁금한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팔왕이란 이름은 그저 수행이 높은 자리가 아니었다.

전 대륙에 명성을 알리는 걸 넘어, 하나의 권력이자 범접할 수 없는 위엄.

그걸 마다할 자가 나타날 거라곤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를 증명해 보이라기에 그저 증명했을 뿐입니다만?”

준혁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웅왕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까놓고 말씀드리지요. 제가 태왕의 자리를 받아들인다 한들, 제 혈족의 자리도 아닌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자리가 제게 무슨 이득을 안겨주겠습니까?”

전 태왕이 죽고 빈자리가 돼버린 태왕의 자리.

웅왕이 준혁에게 제안한 건 그 자리를 준혁의 혈족으로 채워주란 말이 아니었다.

사휘족의 하위 수사들이 태왕의 자리를 대체할 만큼 성장할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란 뜻.

물론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영원한 삶을 보장받은 준혁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영원토록 태왕으로 있을 순 있었다.

하지만 굳이?

한 종족의 수장이 된다는 건 그저 가장 강하다고 인정받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삶을 보살펴야 했고 이끌어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준혁 입장에서 각종 수도 자원이나 수행을 올릴 수 있는 기타 재료들은 차고 넘치다 못해 창고에 그득 쌓여있는 상황.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다만 준혁이 웅왕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무식한 대결을 받아들인 의미.

그건 팔왕의 결속, 팔왕들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툴 때도 있고, 거리를 두기도 하지만, 한 가지 상황에선 조건 없이 협력했다.

바로, 존재를 위협할 적이 나타났을 때.

그리고 그 말인즉.

‘천신라를 상대하는데 이만한 동맹이 없긴 하지.’

주서령과 중괴를 구하기 위해선 천신라를 상대하는 게 필수인 상황에서, 어설픈 동맹인 천휴림주만 믿고 있을 순 없는 일.

때마침 웅왕이 태왕의 자리를 제안하자 확답은 하지 않은 채, 뭉그러트리며 수락한 척 받아들인 것이었다.

준혁이 가진 동맹이라 해봐야, 진산문이나 청교장이나 교호홍이 속한 청심문과 적루뿐.

심지어 청교장은 청심문의 부문주라 실제 동맹이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교호홍은 애초에 전투력으론 도움이 되질 않았고.

그랬기에 태왕의 자리는 어떤 금은보화보다 값어치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충 자리를 넘겨받을 순 없지.’

준혁의 반문에 태백랑은 혀를 차고, 명왕과 웅왕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암왕과 조왕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흐음…. 이득이라. 그 자리를 그런 식으로 논하다니….”

“내 뭐라 했습니까? 인족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익을 따지다니!”

결국 조왕이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고, 그 모습에 웅왕이 손을 저었다.

“잠시! 잠시 진정하고. 우선 그의 말부터 들어보지. 이득이라니? 어떤 것을 말함인가?”

***

웅왕의 질문에 오두막 내는 적막만 가득했다.

대답을 해야 할 준혁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준혁은 팔왕의 심기가 불편해질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태왕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는 것에 불만이 있는 분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영수족도 아닌 제가 그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말입니다.”

“크흠.”

“흠흠.”

콕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불편한 이들이 누군지는 모두가 아는 상황.

준혁의 발언에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내가 태왕이 되어 동맹이 된다 해도, 나를 위해 전력을 보태준다는 보장도 없지.’

“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제가 요청할 때 딱 한 번씩만 제게 도움을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태왕의 자리를 받아들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사휘족에서 다음 태왕이 나올 수 있게 제 능력을 발휘하지요.”

“허, 자네에게 타인의 수행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묘수라도 있단 말인가? 어찌 그리 쉽게 장담을 하…. 이, 이건?!”

생각에 잠겨 있던 조왕이 준혁의 말에 의문을 드러내려는 찰나.

준혁이 한 손을 뻗으며 의지를 움직이자, 그의 손바닥 위로 지목족 혈맥의 힘이 모여들었다.

그것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느낀 팔왕은 제각각 신음을 흘리며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특히나 화정을 잃어버린 후, 고심에 빠져있던 명왕은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 했다.

“어떠십니까? 제 제안이?”

“그…. 그건 설마. 구지대륙에 살았던 지목족의…. 능력인가?”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수행 속도를 올려주는 지목족의 힘은 선계에서도 이름 높은 능력이었다.

오죽했으면 그것을 욕심낸 타 종족들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걸었을까.

그렇다면 그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

준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천균을 통해 모든 과거를 알고 있던 그는 혈맥을 가지고 있는 영수족이 자신의 힘을 욕심내지 않을 걸 알았다.

정확히 말한다면 욕심낼지언정 본인들이 가진 혈맥의 힘이 더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다.

실제로 지목족의 멸족에 참여한 이들 중 대황대륙의 영수족은 없었다.

만에 하나 욕심낸다 해도 상관없었고 말이다.

“흐음…. 도대체 자네 정체는 뭐지? 인족인가? 영수족인가? 그것도 아니면 목족인가?”

혈맥의 힘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여러 혈맥의 힘을, 그것도 극성에 가깝게 보유할 수는 없는 법.

준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조왕을 향해 살짝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중요합니까? 제가 무얼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끄응….”

그때, 준혁으로 인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려는 사이, 지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준혁에게 명원패를 바쳤기에 발언권을 잃어버렸던 그녀가.

“내가 알기로 지목족의 힘은 그저 수행 상승을 돕는 게 아니야. 그 힘이 극에 다다를 때 대륙의 정기를 한곳에 모으는 게 가능하다는 말까지 전해지지. 내가 저이에게 목숨줄이 잡혔기 때문이 아니라 저 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해.”

“그게 무슨 말이지? 똑바로 말해라. 알아듣게.”

웅왕의 차가운 목소리에 지왕이 두 눈을 빛냈다.

“저이가 돕는다면…. 우리 흑지족이 만들어놓은 연계. 그리고 그 위에 쌓아놓은 결계. 그것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는 뜻이야.”

그 말인즉, 대륙의 방비가 더욱 견고해진다는 말.

지금도 삼대 세력으로부터 굳건한 방비가 완벽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구나, 대화가 필요하겠어.’

지왕의 말에 모두가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자 준혁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지목족 힘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펼칠 수 있는 비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천균이 그것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오래전에 결론을 내렸는데, 아마 자신이 혈맥의 힘에 잡아먹히지 않게 하려 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준혁은 혈맥의 힘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하위 중에서도 하위 수사였으니까.

***

“잘 부탁하지, 태왕.”

“잘 부탁하네.”

“앞으로 종종 보도록 하시게나.”

결국 준혁의 제안을 받아들인 팔왕은 그가 도움을 원할 때 한 번에 한해 무조건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준혁은 그 대가로 사휘족의 수준을 올림과 동시에 지목족의 힘으로 대륙의 정기를 모으는 걸 돕기로 했다.

다만 준혁의 수준이 아직 그걸 가능하게 할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에, 시기는 뒤로 미뤄졌다.

“축하하네, 자네가, 아니지. 이제 팔왕의 일인이 되었는데 예전처럼 부를 순 없지. 커험. 미안하군.”

“아닙니다. 예전처럼 편히 부르셔도 됩니다. 남들과 달리 저흰 가족이지 않습니까?”

“가족? 하하, 그건 그렇지! 그래 그럼 편하게 하지.”

모두가 떠난 뒤. 준혁은 사휘족의 영토로 향했다.

자신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조호랑을 보기 위해 백랑족으로 가려고 했지만, 태백랑이 우선 사휘족을 방문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사휘족의 영토는 백랑족과 흑지족 사이.

그랬기에 현재 태백랑과 지왕이 준혁을 안내하고 있었다.

준혁의 말에 태백랑은 기쁨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한데, 그 도움이라는 거. 마치 생각해둔 게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닌가?”

“그리 보이셨습니까?”

“그럼. 딱 보면 알지. 자네 성정에 태왕 자리를 거부할 거라 여겼거든. 자네가 세력을 만들려고 했다면 진작 종문을 세웠을 것이고, 땅을 차지하려 했다면 그것 역시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굳이 사서 고생을 하려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 사휘족이 불쌍해서 그랬을 리도 없고?”

준혁은 생각보다 태백랑이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기며 속으로만 웃었다.

하지만 속마음을 얘기하기엔 시기가 일렀다.

“그렇긴 하지만, 이번엔 잘못 짚으셨습니다. 물론 사휘족의 영토나 세력 따위가 욕심나진 않지만, 팔왕이란 이름이 가볍지는 않으니까요. 대신 그 이름만으로 고생을 자처하기엔 제가 손해인 듯해, ‘도움’이라는 약조를 받았을 뿐이지요.”

“정말인가?”

팔왕 각자에게 도움을 한 번씩 청할 수 있는 자격.

당연히 천신라를 상대할 때 한 번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다만 태백랑이 조호랑으로 인해 가까운 사이라고는 해도, 그도 결국 영수족의 일원.

“물론입니다. 제가 무슨 이득을 보자고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요놈 봐라?’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태백랑의 시선을 가볍게 넘긴 준혁은 멀리 보이는 사휘족 영토의 경계를 확인했다.

삼선급 수사는 한 명도 남지 않은 사휘족이었지만, 여전히 영토를 지키는 결계는 단단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곳이 태왕의 영토. 사휘족이 사는 곳입니다.”

옆에서 친절히 설명을 곁들이는 지왕의 목소리를 대충 넘긴 준혁은 경계의 뒤쪽에 마중 나와 있는 수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들이 사휘족이군.’

하나같이 강렬한 기운을 내뿜으며 형형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 수가 족히 수천은 넘어 보였는데, 그중 가장 앞으로 나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자는 대천경 끝자락에 닿아있는 수사였다.

‘과연 나를 태왕으로 받아들일까?’

외세에 대비하기 위해 규선 혹은 그 이상이라 여겨지는 준혁을 포섭한 건 팔왕.

하지만 정작 사휘족의 의견은 배제된 상태였다.

어쩌면 그들은 준혁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있었다.

‘상관있나? 굴리면 고분고분해지겠지.’

문득 재미난 생각에 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옆에서 준혁의 웃음을 본 지왕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고 말이다.

준혁 입가에 맺힌 웃음엔 장난기가 다분해 보였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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