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태왕(颱王) (1)
천휴림주와의 만남을 뒤로한 채 대황대륙으로 떠났던 준혁.
그는 평소보다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금세 흑석대륙의 경계를 넘어 대황대륙에 진입했다.
진입 후, 조호랑을 따라 움직였던 길을 기억해 내고는 그쪽으로 이동.
머지않아 각 종족의 영토에 어설프게 걸쳐있는 중립지역의 길을 따라 빠르게 북상했다.
“잠시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곰처럼 우락부락한 두 사내를 만나 이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두 사내는 쌍둥이처럼 똑 닮아 있었는데, 각각이 진선 수사였다.
진선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기세가 강했는데, 일반적인 수사들과 달리 강체술에 특화된 듯 보였다.
“무슨 일로 저를 막아서신 겁니까?”
준혁은 두 사내. 웅구족의 수사를 보며 무표정으로 물었다.
“우리의 왕께서 그대를 보고자 하십니다. 함께하길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두 사내는 이미 준혁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예를 다하고 있었다.
혹시나 이동 중 그들의 영토에 발을 들인 이유로 시비를 걸어온 거라 생각하던 준혁은 자신이 예민했다고 여기며 그들의 요구를 허락했다.
“안 될 것 있습니까?”
잠시 후, 두 사내의 뒤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자, 거대한 나무를 통으로 겹쳐 만든 오두막이 나타났다.
말이 오두막이지,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해 요새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 다다르자,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안면이 있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팔왕 중 웅왕이라 불리는 곰 같은 남자.
“오랜만이오. 최 선사.”
“잘 지내셨습니까?”
“…….”
“그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겁니까?”
태백랑의 영토로 가기 위해선 웅구족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게 더 빠르기에 겸사겸사 그의 요구를 수락했던 준혁.
서로 긴밀한 대화를 나눌 만큼 친분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의문이 들었다.
웅왕은 준혁의 질문에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시에 손을 휙 젓자. 준혁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수많은 수사들이 샤사삭거리며 빠르게 사라졌다.
“그대의 존재가 우리를 불편하게 했다는 건 익히 예상했을 것이오.”
“불편이라….”
지왕의 명원패를 받아 갔기에, 그녀를 반쯤은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대황대륙의 방비를 깨트릴 가능성을 얘기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대가 떠난 후 우리 팔왕은 오랫동안 몇 번에 걸쳐 의견을 나누었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게 악의도, 그렇다고 호의도 아니었기에 준혁은 뒷짐을 쥔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흐음…. 그렇군요.”
그 모습에 웅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투왕과 명왕은 그대가 믿을 수 있는 우군이니, 믿고 함께 하자 하였고….”
투왕(鬪王)은 태백랑을 뜻했다.
“암왕과 조왕은 인족을 믿을 수 없으니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지. 특히나 그대는 우리의 방비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독 같은 인물이라고.”
‘독이라. 면전에 대고 대놓고 말하니 참….’
태백랑에게 듣기로 웅왕은 성정 자체가 거짓이 없이 올곧다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올곧다는 게 그저 좋은 표현만은 아니었음을 말이다.
“묵왕과 나는 그대의 행동을 지켜보고 후일 다시 얘길 나누자고 했고.”
“그렇군요. 그럼 나머지 두 분은?”
팔왕이 자신을 놓고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궁금한 준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반문하자, 웅왕은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지왕은 애초에 발언권이 없지. 그리고 나머지 태왕…. 그게 바로 내가 그대를 이곳에 부른 이유네. 그전에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지, 정말 그대 역시 혈맥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
***
태왕(颱王).
팔왕 중 일인이자 사자왕이라 불리는 사휘족(獅輝族) 인물.
투왕과 더불어 가장 호전적이며, 웅왕보다 무식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수사.
삼대 세력이 대황대륙에 손을 뻗지 못하는 이유가 팔왕의 협공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투왕과 태왕이 미친놈처럼 물고 늘어지는 걸 염려해서라는 말도 돌았다.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펼친다면 삼대 세력의 수장이 그 둘을 압도할 테지만, 치고빠지며 세력 자체를 괴롭히기 시작하면 그 피해가 끝도 없을 테니까.
특히 태백랑과 태왕은 그런 쪽으로 집요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태왕이라, 혹시?’
준혁은 자신이 규선에 오른 직후 만났던 인물 중 태왕이 없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혈맥의 존재 여부를 묻는 웅왕의 말에서 그들이 어떤 의견을 나누었는지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독(毒)도 사용하기에 따라 약이 될 수 있는 법.
만약 그 자리에 태왕이 없었던 이유가, 오지 않았던 게 아니라 올 수 없었던 거라면?
“물론입니다. 저 역시 영수족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지요.”
크아아아앙-
준혁은 대답과 동시에 백호 혈맥을 터트리며 강렬한 기파와 사자후를 퍼트렸다.
그러자 주변 숲에서 털썩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뒤이어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적이 찾아왔다.
“태백랑이 말한 것보다…. 훨씬 대단하군.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영수족이라 해도 믿었겠어.”
주변 수하들이 쓰러진 건 상관없는지, 준혁의 힘을 느끼며 놀라는 웅왕.
준혁은 그런 그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영수족이니 인족이니 그런 게 중요하겠습니까? 애초에 어떤 피를 타고 태어났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자랐느냐가 중요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
준혁의 당당함에 웅왕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말했다.
“그럼 본론을 얘기하지. 사실 태왕은 오래전 강제로 수행을 올리려다 천겁을 이겨내지 못하고 귀천하고 말았다.”
혹시나 했던 얘기가 흘러나올 낌새에 준혁은 태도를 고치고 경청했다.
“다른 이들이 알게 된다면 우릴 넘보려 할까 봐, 그동안 소문이 나지 않게 조심해야 했어. 하지만 늘 그 자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었지.”
웅왕은 준혁의 눈빛이 어떻게 변하나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해서 태왕의 자리에 그대를 추대하자는 말이 나왔고,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네. 말했다시피, 찬성 두 표에 반대 두 표, 그리고 중립이 두 표기 때문이지.”
웅왕은 할 말을 끝낸 듯 조용히 준혁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준혁이 동요가 없는 듯 보이자, 마지막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대가 태왕의 자리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그 이름을 대신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긴 얘기의 결론은 한판 붙어보자는 소리였다.
준혁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태왕의 자리를 논하기 전,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점검해 보고 싶었으니까.
그것도 오랫동안 규선으로서 대륙의 지배자 노릇을 했던 팔왕을 상대로.
다만.
“이미 지왕을 가볍게 제압하는 걸 보았음에도 말입니까?”
“…그것과는 별개다. 그리고 그녀는, 아니 굳이 말할 필요 없겠군. 이건 우리의 시험이 아닌, 나의 확인이니까.”
준혁도 지왕의 수준이 가장 떨어짐을 태백랑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를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대황대륙 전 지역을 연계하게 만드는 능력 때문이었지, 그녀 자체의 수행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같은 규선이라 해도 그 차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잠시 후, 준혁은 웅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기세를 퍼트렸다.
“좋습니다. 저 역시 궁금했습니다. 영수족의 강체술이.”
하지만 준혁이 흥을 일으키기도 전, 시험은 무산돼야 했다.
“허나, 그대는 수행을 올린 지 이제 오십여 년밖에 안 됐으니, 어떤 경지이든 아직은 불안정하겠지? 그러니 얼마가 걸리든 완벽한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
올곧은 웅왕의 말로 인해서.
***
“정말 괜찮은가?”
웅왕에겐 50여 년이지만, 준혁은 이미 수행을 안정시킨 지 500년이 넘은 상태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공천귀의 창고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보물들을 혈단법으로 흡수까지 마친 후였다.
이미 최적의 상태를 넘어 최고의 상태.
“물론입니다.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냥 진행하셔도 문제없습니다.”
준혁의 확답에 웅왕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러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한 손으로 허공을 세차게 후려쳤다.
콰직- 파앙-
그러자 허공에 금이 가듯 대기가 터져나가며,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완벽하게 막아서는 구체가 만들어졌다.
구체의 크기는 대략 직경 500여 미터 정도 될 듯 보였는데, 누가 보아도 자신의 영토가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한 장치로 보였다.
준혁의 시선에 웅왕이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봉황족처럼 되기는 싫어서 말이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멋쩍어하는 웅왕.
그의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고갤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산들바람의 일을 처리하며 봉황족의 전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게 미안했다.
“그럼 가겠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후, 거의 동시에 서로가 전투 태세를 갖췄다는 걸 인지하고는 서로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웅구족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전투가 시작되자, 준혁은 적마의 권능으로 단번에 상대의 뒤를 점하기 위해 움직였다.
반대로 웅왕은 준혁을 정면에서 들이받으려는지 무식하게 날아들었다.
“빠름은!”
웅왕은 준혁이 자신의 뒤를 잡자, 당연하다는 듯 급격하게 이동을 전환하며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힘을!”
그리고는 준혁과 직접적인 마찰이 생기기도 전, 먼 거리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깨부술 수 없다!”
콰앙!
웅왕의 주먹질에 대기가 터져나가며, 그 여파가 기습하려던 준혁을 보호막 끝까지 밀려나게 했다.
‘정말 무식하구나.’
웅왕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파악하기 위해 적마의 능력으로 요리조리 회피하던 그는 상대가 술법을 일절 사용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오로지 강체술만을 극대화해, 말 그대로 몸으로 싸웠다.
하계의 연기기 시절에도 그렇게 싸워본 적이 없던 준혁으로서는 낯설고도 흥미가 가는 전투방식.
특히나 조금 전 주먹질에 대기가 터져나간 건, 준혁이 으레 그렇듯 기운을 폭발시킨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주먹질이 극에 이르자 대기에 존재하는 영기가 그 힘에 반응한 것뿐이었다.
‘그래봐야 의미 없는 몸짓일 뿐이지.’
보호막 끝으로 밀려난 준혁은 웅왕이 재차 달려들기 전 뇌둔술을 발동.
번쩍-
순식간에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는 양옆으로 손을 뻗으며 허공을 쥐어 잡은 채 내리쳤다.
쿠우웅-
그러자 준혁의 손짓과 동일한 무형의 주먹이 하늘 위에 나타나더니 재차 달려드는 웅왕을 짓눌렀다.
동시에, 손으로 공을 만들 듯 양손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빠르게 펼치며 중력을 양쪽으로 늘려버렸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에 짓눌렀던 웅왕의 몸이 좌우에서 생겨난 인력에 잠시간 엉거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라.”
전투가 시작되기 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분신의 사용은 자제하자 약속했기에, 준혁은 허공에 구속된 웅왕을 향해 월광지력만 사용했다.
잠시 후, 준혁 주위에 생겨난 얼음송곳 수백 개가 느껴질 새도 없이 날아갔고, 멈춰있던 웅왕의 몸을 난도질하듯 꿰뚫어 버렸다.
푸푸푹-
“이 정도면 확인이 되었습니까?”
상대의 입에서 인정하는 말이 나오는 걸 신호로 승부를 멈추기로 했지만, 준혁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커다란 덩치 곳곳이 얼음송곳이 박혀있고 피가 낭자한 모습은 누가 보아도 위태해 보였으니까.
“크엉!”
하지만 준혁의 생각은 시기상조였는지, 웅왕이 함성을 터트리자 그의 몸에 박혀있던 얼음송곳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그리고는 상처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초회복을 하며 처음과 같이 돌아갔다.
구속에서 풀려난 웅왕은 단번에 달려들지 않고, 준혁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인족다운 전투방식이군. 허나, 나에게 그런 약은 수는 통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 언제까지 내 주먹을 피하는지 보지.”
‘인족의 방식? 도망?’
웅왕의 말이 끝난 그 순간,
준혁은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확인해보고 싶다고 한 것은 아마 태왕에 어울리는 수행을 말하는 게 아닐 게 분명했다.
‘내 피가 영수족의 피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말이었구나.’
즉 영수족처럼 싸우는지 아닌지 판단하고 싶다는 뜻.
준혁은 상대의 말에 피식거리다가 중괴의 힘을 해제해버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꺾다가 보기 좋게 웃어 보였다.
“강체술이라…. 하긴 아직까지 확인해본 적이 없었는데 잘됐습니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치고받고 싶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