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성장의 증거 (4)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을 줄이야….”
림주의 목소리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하지만 탐욕이 이성을 먹어 치운 것 같진 않았다.
“허나, 전함이라 한들 균열 속에서 수십 년 버틴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솔직히 말하게. 균열 내부에서 무언가 찾아낸 게 아닌가?”
준혁은 림주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 후, 손 위의 조각배에 의지를 집중했다.
그러자 조금씩 흘러나오던 기운이 대폭 강화되더니 준혁을 완벽히 가로막았다.
곧이어 주변을 대부분 잠식해가던 균열을 완벽히 차단해버렸다.
“물론 림주께서 모으신 것들이라면 그럴 테지요. 허나 제가 가진 물건은 처음부터 공간의 틈에서 족인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 애초에 태생이 다릅니다.”
실제로 천휴림주를 포함한 그의 제자들이 가진 물건들은 전부 이동속도가 월등하거나, 위력은 약하지만 대단위 공격에 특화된 것들이었다.
준혁이 가진 전함처럼 온전하게 방어에만 특화된 건 그것이 유일했다.
“그런….”
준혁의 설명에 림주는 기감으로 전함의 기질을 파악한 건지, 잠시간 황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림주의 표정에 준혁이 피식 웃고는 전함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아쉬워하는 상대에게 한마디를 남기며.
“림주께서 용각족의 전함을 전부 모으셨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가진 것도 드리지요.”
“정말인가?”
화들짝 놀라는 림주.
준혁은 말은 이었다.
“굳이 의미 없는 농을 해서 무얼 하겠습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주신다면, 이걸 내어드리지요.”
“말해보게.”
준혁은 상대의 눈에 탐욕이 조금 더 짙어지길 기다리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천신라가 저를 찾았던 연유에 대해 따로 수소문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웬만해선 선마궁을 떠나지 않는 그가 대화성을 직접 방문했으니 그 사건 자체는 이미 선계에 파다하게 퍼진 얘기.
천휴림주 정도 되는 이가 그 사건의 이유를 파헤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과정에서 식아의 존재를 알아냈을지, 아닐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천신라가 준혁을 포획하려 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을 터.
“저는 결국 그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처지지요. 림주처럼 말입니다.”
“흐음.”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떠십니까? 저를 도와 천신라를 상대하시는 게.”
림주의 원래 계획은 준혁을 포섭해 천신라를 상대할 때 비수로 사용하려던 것.
공천귀의 균열로 미뤘던 것을 상대가 역제안하자 그는 잠시지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하던 림주는 균열의 여파가 거슬리는지 한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가 펴며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이 텅 빈 공간처럼 변하며 균열의 파장이 비켜 가기 시작했다.
“선마궁주를 상대하는데 손을 보태라…. 나로서는 나쁜 제안은 아니지.”
그전까진 당연히 준혁을 포섭 후, 세뇌과정을 거쳐 사용하려 했지만, 잠깐 나눠본 손속에 그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림주.
“허나, 거기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걸 염두에 둔 것인가?”
림주의 질문에 준혁은 씨익 웃었다.
“조건이라. 제가 천신라의 적수가 될 수 있냐 하는 것 말입니까?”
“아주 잘 아는군. 그래. 내 자네의 실력이 원래 내가 알던 것과 다르다는 건 인정하지. 허나 천신라를 상대한다? 그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지.”
삼대 세력으로 불리며 천신라와 동급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천휴림주는 자신이 그를 상대할 실력이 안 된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선을 연구하며 봉인석을 만들어내고 전함을 수집했으며, 공천귀의 균열을 발견하자마자 아끼는 제자 둘을 보냈다.
준혁은 림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지금을 말하는 건 아니지요. 때가 되면 그때 한 손 거들어 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동맹을 제안하는 건가?”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천휴림주의 표정에 가소롭다는 감정이 들어찼다.
그도 그럴 것이 준혁이 말하는 건 한 손 거들라는 뜻이 아닌, 동등한 조건으로 서로 힘을 기르다가, 때가 되었을 때 힘을 합쳐 천신라를 상대하자는 거였으니까.
신선인 자신이 겨우 진선 수사와 동맹을 맺다니?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엔 절대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세력의 차이였다.
대화성과 묘립성을 지배하에 두고 있다 한들, 천휴림주 입장에서 준혁은 지방 유지 정도 수준이나 마찬가지.
그 순간 상대의 불편함을 읽은 준혁이 처음으로 자신의 전력을 방출했다.
파앙-
그러자 주변을 완벽히 잠식한 후 외부로 힘을 뻗쳐가던 균열이 힘을 잃고 약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뭉치며 어마어마한 압력을 만들어냈는데, 누구든 직접 그 힘을 겪는다면 단숨에 갈려 나갈 것만 같았다.
“이 힘은…. 자네. 진선이 아니었군.”
천휴림주는 놀란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다가 두 눈에 의심을 가득 담았다.
“어떠십니까? 이 정도면 최소한이 자격은 갖췄다 여겨지지 않습니까?”
“자격? 그래. 그건 인정하지. 한데 자네 분명 공천귀가 남긴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었지? 그게 아니라면 어찌 수행이 이리 상승한 거지?”
림주의 의심에 오히려 준혁이 놀랍다는 듯 의문을 드러냈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
“림주 정도 되시는 분이면 대황대륙에서 벌어진 일 정도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으실 줄 알았더니.”
“아! 설마 그게 영수족이 아니라!”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림주를 보며 준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아도 미소 속에 모든 말이 담겨있었다.
당연하게도 팔왕이 아무리 입단속을 했다 한들 수십 번의 천겁을 불러오며 신선에 오르는 현상을 만들어낸 사건을 소문나지 않게 완벽히 막을 순 없는 일.
“그럼 자네가…. 아니 그대가 신….”
림주는 말을 잇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
시간이 지나며 균열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고, 준혁과 천휴림주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제외하곤 주변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렸다.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림주도 시간이 지나자 인상을 찌푸려야 할 정도로 균열의 압력은 심해졌다.
준혁은 그런 림주를 따라 압력을 받는 척 연기해야 했고 말이다.
잠시 후, 준혁은 품속에서 옥천의 한 짝을 꺼내 자신의 손목에 착용했다.
“그럼 약속이 된 거로 알고, 이걸 다시 착용하도록 하지요. 우리의 약속의 증표로 말입니다.”
옥천의 기능을 생각한다면 동맹의 증거로는 가장 적합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건 준혁의 생각이었는지, 림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옥천의 한쪽을 마저 준혁에게 날려 보냈다.
“그대가 좌표를 조정할 수 있거늘, 크게 의미가 있겠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동맹의 증표로 그것을 드리도록 하지.”
준혁의 수행이 예전과 다름을 알고, 동맹을 맺은 후 애매한 존대와 하대를 섞어 사용하는 림주.
“그러시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준혁은 상대가 날려 보낸 옥천의 한쪽을 받아들며 곧바로 그 안에 좌표를 지워버리고는 나머지 한쪽과 함께 공간팔찌 안에 수납해 버렸다.
“대신 한 가지만 더 대답해주시게나.”
“말씀하시지요.”
“정말…. 둘째 녀석. 좌무란의 행방에 대해선 모르는 건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전함 속에 숨어 겨우 목숨을 연명하다, 균열이 터져나가며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고. 어찌 그를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이겠지?”
“제가 거짓을 말해 뭐 하겠습니까? 이제 함께하기로 했는데, 서로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대 말이 맞지. 내 그대를 믿겠네…. 대신. 아니네. 믿지, 믿어.”
“예, 그럼 저는 보신이 필요하기에 먼저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대막리 수사가 깨어나면 안부 전해주십시오.”
“...조심히 가시게나.”
잠시 후. 대화가 끝나자 준혁은 적마의 권능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떠난 후, 혼자 남은 천휴림주는 아직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분명…. 거짓은 없는데, 왜 이리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한숨을 쉬는 림주의 손에는 나침반 하나가 들려있었다.
‘마선의 눈’이라 불리며 상대의 마선기를 정확히 측정해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마선 법기.
상대와 대화를 끌어가며 마선의 눈을 이용해 꼼꼼히 살폈지만, 상대는 정말 50년 전 사라지기 전과 아무 변화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공간팔찌를 비롯한 어디에서도 새로운 마선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공천귀의 균열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이 사실일 텐데, 직감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최준혁. 그대가 만약 오늘 이 자리에서 내게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천신라의 끝과 그대의 끝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신라의 심장이라 불리는 심주도 심주였지만, 좌무란의 행방도 그만큼 중요한 일.
혹시나 싶어 둘째 제자에게 주었던 전함에 새겨진 특정 신호를 파악하려 했지만,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상대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천휴림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균열의 압력 속에서 자신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던 상대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아래엔 온통 흑회색 땅덩이만 보이는 하늘 위.
준혁은 평범한 장검처럼 생긴 법기 위에 고고히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장검형 비행 법기는 아무런 조종 없이도 혼자서 준혁이 머릿속에 생각하는 장소를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귀찮게 할 일은 없겠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는 전함이 줄어든 조각배 법기를 꺼내 잠시 바라보다가 입속에 집어넣었다.
동맹의 조건으로 제시했던 용각족의 전함.
사실 준혁이 전함의 존재를 드러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함을 드러내지 않고도 충분히 동맹을 이끌어낼 수도, 균열 속에서 버텨낸 핑계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림주의 의심을 지움과 동시에 그의 관심을 끌기에는 전함만 한 게 없었다.
만에 하나 그가 자신이 공천귀의 보물을 발견했다고 오해라도 한다면 보이지 않게, 얼마나 귀찮게 할지 예상했기 때문.
물론 동맹을 맺고 헤어진 지금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할 게 분명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과 없는 건 천지 차이였다.
게다가 천휴림주는 전함이란 존재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보이고 있었기에 적절하게 써먹은 것이었다.
관심사가 나타나면 주의력이 흐트러지는 건 모든 이가 마찬가지였으니까.
“언젠가는 줄 테니 너무 욕심내시지 말길 바랍니다, 림주.”
하지만 막상 동맹의 조건으로 전함을 준다고 했던 준혁은 그것을 이행하지 않았다.
전함이 본명기 중 하나라는 이유를 대며 이양을 잠시 미뤘다.
훗날 진정한 동맹이 발동되며, 천신라를 상대할 그날이 오면 그때 넘겨준다면서 말이다.
물론 동맹을 말로만 이뤄낼 수는 없었다.
그가 준혁에게 천영보 천옥을 주었듯이, 준혁은 그에게 공천귀의 창고에서 얻은 천영보 하나를 건네야만 했다.
동생이 사용하면 적절하겠다고 여겼던 보호용 천영보 하나를.
잠시 후, 림주와의 대화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자신이 얻은 이익과 그를 이용할 방법 등을 고심해보던 준혁은 천운대륙이 자리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곧 그대에게 갈 테니.”
그리고는 비행 법기의 속도를 올려, 대황대륙 방향으로 빠르게 하늘을 갈랐다.
수십 년간 자신을 걱정하며 기다릴 조호랑을 포함해 아마르곤과 청호, 모두를 데리고 호란대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제 왜곡의 균열이 사라진 완벽하고 안전한 장소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장소.
거인족의 비경과 연결해둔 공천귀의 공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