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84화 (384/408)

384화. 성장의 증거 (1)

좌무란에겐 50년.

준혁에겐 500년.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었고, 애틋해질 만한 기간이었다.

두 사람의 조우는 그렇게 반가운 만남이었다.

좌무란의 양팔과 양다리가 송곳처럼 변한 월광지력에 관통당한 채 구속돼 있다는 것만 제외하곤 말이다.

“네, 네놈! 살아있었구나!”

좌무란은 공천귀의 창고로 의심되는 균열 안에 들어온 기쁨 따위는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물론입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었지요. 밖에서 준비 중이던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그와 다르게 준혁은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입가에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수도자가 수십 년 수백 년 면벽을 하는 일이 잦다고 하지만, 체감상 오백 년 만에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거늘.

준혁의 진심 어린 웃음을 비웃음이라 판단한 좌무란은 당장이라도 구속을 풀어버리고 전력을 개방해 상대를 압살해버릴 생각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수로?’

하지만 구속당한 팔다리를 제외하고도 체내의 영력은 겁에 질린 것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금세 평정심이 깨지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지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외부의 구속으로 인해 영력이 반응하지 않는 건 차치하고, 심지어 의지마저 표출할 수 없었다.

의지를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 의미는 삼선에 오른 수사의 전부를 앗아갔다는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충격이 좌무란의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내 의지를 억누를 수단을 만들어냈다고? 겨우 진선에 이른 자가?’

상대가 오래전 공천귀의 균열 내부를 발견하고 이곳에서 몸을 숨긴 채 음모를 꾸미고 있을 순 있었다.

자신도 외부에 함정을 준비했으니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었다.

어차피 세상사 그렇게 돌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절대 용납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한 가지.

상대가 무슨 수를 썼든 간에 규선인 자신의 의지가 주변을 장악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은커녕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근거리까지.

“흐음….”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의지는 바로 눈앞의 대기마저 건들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좌무란.

하지만 그런 상태를 고스란히 적에게 보여줄 수 없는 만큼 그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는 척, 언제든 구속을 풀어낼 수 있다는 듯 여유롭게 대답했다.

“준비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준혁은 그런 그를 보고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저를 잡기 위해 모종의 수단을 강구하고 계셨단 걸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도망치지 못하게 특수한 결계를 만드셨던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크흠….”

침착함을 유지하던 좌무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우린 그런 적이 없네. 스승님께서 공천귀의 창고를 발견하면 한 가지를 제외하곤 전부 자네에게 넘겨주기로 하지 않았나?”

입술을 살짝 적시는 좌무란.

“헌데 제자인 내가 스승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다른 꿍꿍이를 준비한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네. 난 그렇게 살아온 이가 아니네.”

그리고는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준혁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혹, 셋째와의 예전 일로 그런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멈추게. 그렇다면 아무 일도 없던 것이라 여기고 넘어가 주겠네. 균열밖에서 기다리시는 스승님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걸세.”

할 말을 마친 듯 좌무란은 차분한 눈빛으로 준혁의 눈을 직시했다.

림주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이면 상대를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다고 여기면서.

그러면서 한편으론 손과 발을 구속하는 얼음송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운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상대가 알아차릴 수도 있기에 기감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행동하는 중이었다.

그런 좌무란을 보고 준혁은 또 한 번 피식 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손만 닿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다가온 그는 좌무란의 양손에 솟아난 얼음송곳에 눈길을 주다가 천천히 말했다.

“유난히 말이 많으시군요.”

“…….”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구속당한 좌무란을 향해 손가락을 팅 하고 튕겼다.

챠르륵-

그러자 구속당한 좌무란의 양팔과 다리에서 전보다 차가운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며 그의 전신에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동시에 금빛 실이 전신을 휘감아 그를 얽매기 시작했다.

“진실은 천천히 밝히도록 하지요.”

***

시간의 왜곡으로 오랜 시간 균열 안에 머물게 된 준혁은 몇 가지 실험을 했었다.

그중 하나가 소우자를 불러 비경으로 입장하게 한 후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단번에 좌절되고 말았다.

준혁 본인은 왜곡되는 시간에서 아무렇지 않았지만, 소우자는 비경에 입장한 순간 정신 착란을 보이며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마치 균열 속 공허의 공간에서 오랜 시간 머물다 위치감각을 잃고 죽어가는 수사들처럼.

그 즉시 소우자를 비경 밖으로 방출한 준혁은 그것에 관해 연구했고, 마선기의 유무 때문임을 파악했다.

중괴의 중력과 심주의 왜곡이 공명하여 발생한 시간의 왜곡 속에서 버티기 위해선 마선기를 가지고 태어난 마선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준혁은 공천귀의 내부를 안전 거주지로 만들기 위해선 시간의 왜곡을 없애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왜곡이 공천귀의 공간을 망가트리고 있었기에, 영원히 유지할 순 없던 상태였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가까운 이들에게 시간의 혜택을 주려 했던 계획이 취소되어 아쉬운 마음은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그럴 필요는 없었으니, 그때부터는 대놓고 중괴의 힘과 심주의 능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충격은 전부 흑석대륙 대막리의 성과 연결된 균열로 보내면서 말이다.

그로 인해 대막리의 성 쪽 균열은 점점 심각해졌지만, 그건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촤르륵-

잠시 후, 준혁은 꽁꽁 얼어가며 금빛 실에 잠식되어가는 좌무란을 바라보다 수결을 짚었다.

천휴림주가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알아내는 게 최우선.

그다음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시간을 할애하던 준혁은 고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안 되는군.”

규선에 오른 좌무란은 소우자와는 또 달랐다.

월광지력과 금빛 실로 모든 게 억압되었고, 이미 준혁의 의지가 공간을 완벽히 장악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럼에도 그는 준혁의 의지에 대항해 자신의 의식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과연 규선이란 말인가.”

심지어 시간의 왜곡으로 인한 압력으로 일반적인 상태가 아님에도, 좌무란의 정신은 굳건했다.

준혁은 자신이 가진 수단으로는 그를 강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손을 저어 금빛 실을 해제했다.

촤르륵-

금빛 실에 휘감기기 전까지만 해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좌무란은, 어느새 준혁을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론 준혁이 만든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했는지, 깊은 한숨과 함께 탈출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연기란 걸 준혁이 모를 리 없었다

“이곳은 이미 제 의지로 이루어진 완벽한 하나의 공간입니다. 수사께서 노력해봐야 달라질 건 없지요.”

그는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와 같았다.

아무리 세차게 날갯짓을 하려 해도 그럴수록 엉켜가는 죽음의 거미줄.

“……너.”

좌무란은 준혁의 발언에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에는 번들거리는 살기를 머금은 채로.

“원하는 게 무엇이길래 이런 일을 꾸민 것이냐? 스승님께서 이곳에서 얻는 모든 걸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같은 질문을 던지는 좌무란.

규선으로서 자존심이 있는 것인지, 자신의 목숨이 준혁의 손위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당당했다.

준혁은 그런 그의 태도에 이채를 번뜩이며 대답했다.

“준다라? 그걸 왜 그자가 결정한단 말입니까? 이곳은 원래 제 것인데.”

“그게 무슨! 이곳을 발견한 건 우리다! 네놈은 우리에게 고용된 것이고!”

“고용이라. 재미있는 표현을 쓰시는군요. 저는 우리가 협력관계인 줄 알았더니.”

이글거리는 좌무란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하나 묻고 싶군요. 선사께서 수백 년간 체화시킨 본명기를 잃어버렸다 칩시다. 그걸 누가 얻게 되었으면 그건 그자의 것입니까? 선사의 것입니까?”

“당연히!”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한 답.

준혁은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렇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준혁의 팔목이 빛나더니 흐릿한 노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노인은 멍한 표정으로 자아가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은 누구도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공천귀!!!”

좌무란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사이.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애초에 저는 공천귀와 계약을 하고 있었지요. 다만 그가 가진 힘 일부를 잃어버려 그의 창고를 찾지 못했을 뿐.”

그러니 애초에 균열 속 공간의 주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물론 제 물건을 찾는 걸 도와주었기에 마땅히 보답을 드리려고 하긴 했으나…. 저를 죽이려고 하셨으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죽이려고 한 적 없다!”

“그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걸 확인하기 위해 구속을 풀어드린 것입니다.”

대화를 이어가던 준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가자 좌무란은 더는 시간을 지체하는 게 최악의 선택이라 판단했다.

“감히! 진선 따위가!”

그리고는 금빛 실이 완전히 사라진 틈을 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양팔과 양다리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퍼석-

영력과 의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는 하나, 그 정도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파앙-

잠시 후, 좌무란의 신체가 붕괴하며 그 안에서 폭발적인 파동이 터져 나왔고, 좌무란과 똑같이 생긴 주먹만 한 원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영은 자유를 찾은 듯, 준혁과 대치한 채 두 눈에 살기를 띠었다.

‘역시 규선쯤 되니 시간의 왜곡을 버텨내는구나.’

좌무란은 자신의 영력과 의지가 상대의 특별한 비술로 인해 억압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준혁이 공천귀의 공간을 지배하며 왜곡의 힘을 응용한 것뿐이었다.

원래 마선기가 없다면 엄청난 반작용을 버텨내야 했기에, 그것에 준혁의 의지가 깃들어 좌무란의 의지를 완벽히 짓누른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준혁이 규선의 경지를 완벽히 안정시키고, 한차례 성장했다고는 하나, 동급수사의 의지를 완벽히 막을 순 없었을 테니까.

***

원영 상태가 된 좌무란은 여전히 거슬리는 압력이 사라지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구속에서 벗어났기에 이제 몸을 사릴 필욘 없었다.

지금까지는 신체를 비롯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그것을 놓아버렸으니 마음껏 날뛸 차례였다.

상대를 죽인 후, 신체를 회복하고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걸릴 테지만, 이곳이 진짜 공천귀의 창고라면 그딴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네 행동을 후회하게 해주마!”

결정을 내린 좌무란은 거칠 것 없이 행동했다.

즉시 의지를 일으켜 준혁이 지배하고 있던 공간의 지배권을 빼앗아 오고, 영력을 끌어모아 단숨에 상대를 갈라버릴 작정이었다.

“어?”

하지만 의지를 표출하며 영력을 움직이던 좌무란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에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구속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자신의 의지는 눈앞의 지근거리조차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영력은 시냇물이라도 되는 듯 천천히 졸졸 흘러갈 뿐이었다.

이 상태로라면 비술 하나를 사용하는 데도 한세월이 걸릴 것만 같은 느낌.

“성급하시기는.”

그렇게 좌무란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촤르르륵-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금빛 실들이 허공에 생겨나며 다시 한번 팔다리를 완벽히 구속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준혁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고,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정확히는 원영의 몸통 중심을 겨누고 있었다.

그 순간 좌무란은 깨달았다.

상대가 무언가를 실험하기 위해 자신이 구속에서 풀려나길 방조한 것이란 것을.

“머, 멈춰라!”

그래서 급하게 준혁을 말리려 했지만.

“갈라져라.”

스가아악-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전해지기도 전.

핏빛 광선이 몸통을 뚫고 지나갔고.

“가거라.”

핏빛 광선이 지나간 자리로 새끼손톱만 한 분홍새 한 마리가 퍼드득 날아들더니, 갈라진 원영의 몸통 안으로 쑤욱 들어가 버렸다.

“으아아악!! 이게 무슨 짓이냐!”

무엇보다 완전무결한 원영이 타인의 무언가에 의해 침투당한 경험은 두려움을 넘어 끔찍함을 선사했다.

발버둥 치던 좌무란은 순식간에 축 늘어지더니 천천히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과연 통할지 모르겠군.”

어느새 다가온 준혁이 조심스레 좌무란의 원영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어가는 좌무란에게서 마지막 감정이 전해졌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어…. 네놈이 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거였구나….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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