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시간 속에서 (3)
시간이 지나며 비경이 완벽하게 공천귀의 창고로 재구성되는 걸 지켜보던 준혁.
그는 버드나무가 성장을 멈추자, 족자를 꺼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족자 안은 자신이 떠나기 전 균열 속 버드나무 내부와 완벽하게 같았다.
준혁이 한 것은 버드나무 창고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창고를 그대로 이전해 온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히는 이전이라는 표현도 적합하지 않았고, 원래 있던 공간과 비경의 공간을 하나로 합쳐 연계시켰다고 하는 게 옳았다.
“이제 몇 가지만 더 확인하면 되겠군.”
만족한 준혁은 다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비경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족자를 펼친 후, 분신을 소환해 안으로 들여보냈다.
잠시 후, 분신이 창고에 굴러다니던 법기 하나를 가지고 돌아오자 분신을 해체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족자를 펼친 후, 이번엔 자신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날렸다.
퉁-
“역시 이건 안 되는 건가.”
하지만 족자에 닿는 순간 쭈욱 빨려 들어가야 할 몸이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왔고,
준혁은 쓰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적마의 권능을 이용해 비경 안으로 들어간 후, 족자를 사용하면 자신 역시 자유롭게 버드나무 내부로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창고가 돼버린 비경 외부에서 직접적인 이동은 불가능했다.
그 연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제 공천귀의 내부이며 나의 내부이기 때문이겠지.”
공천귀의 공간 권능을 담고 있던 족자를 체화시키기 시작한 후부터, 그가 만들어놓은 공간은 자신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본인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갈 순 없었으니 족자를 통한 이동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준혁은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실험에서 알 수 있다시피 직접 비경의 입구로 들어가면 상관없기도 했고, 분신에 자신의 자아를 심어 안으로 보내면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창고로 직접적인 이동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준혁에게는 크게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건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앞으로 몇 가지만 보완해 비경 입구를 균열의 입구처럼 미로로 만들 수 있냐는 거였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이곳은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인 방어 수단을 가진 거주지가 될 수 있단 뜻이었다.
그 말인즉 앞으로 선마궁이나 천휴림을 상대하며, 혹은 다른 세력이나 강자들과 척진다 해도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보호해야 할 이들의 안전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기에, 좌무란과 대막리의 무시하는 눈빛을 뒤로하고 이곳까지 이동해 공천귀의 능력을 시험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
시간이 흐르고, 공천귀의 공간에서 몇 가지 실험을 지속하던 준혁은 때가 됐음을 깨닫고 비경 밖으로 향했다.
무영기로 비경의 흔적은 완전히 가려버린 후, 적매의 권능을 발휘.
화르륵-
준혁의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불꽃이 일어나더니,
불길이 가라앉을 때쯤 그는 어느새 대막리의 성으로 이동한 후였다.
정확히는 자신의 임시거처에 심어둔 적매의 불꽃이 자리한 자리로.
“흐음…. 생각보다 수월하진 않군.”
적매의 이동 능력은 공천귀와 달리 생명력을 담보로 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보유한 마선기를 소비했는데, 다행히 준혁은 수많은 마선들을 흡수해 마선기가 부족할 일은 없었기에 반작용을 받진 않았다.
그럼에서 마선기 일부가 뭉텅 사라지는 느낌이 달갑지는 않았다.
일반 영력과 달리 쉽게 회복할 수 없었고, 오직 시간에 기대야 했기에 소비돼버린 마선기가 더 아깝게 느껴졌다.
만약 도망이나 탈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잠시 후, 준혁은 옷매무새를 만지며 임시거처를 보호하고 있던 기운을 전부 해제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밖으로 나가자.
“드디어 나오셨군요. 사형께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대막리가 다가와 준혁을 반겼다.
준혁은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후, 걸리는 것 없이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양 균열로 이동했다.
대막리는 그런 준혁의 태도에 아니꼬운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금세 신색을 바로 했다.
이제 다음 만남이면 더는 마주할 일도 없었으니, 잠시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
균열에 도착하자 좌무란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준혁이 눈치채지 못하게 기감으로 그를 훑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빨리 회복하셨군요. 역시 명성이 자자한 분이라 다른가 봅니다.”
“명성이라니요. 어디 좌 선사에 비할 바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서로 덕담을 나누었고, 덕담이 끝나갈 무렵, 좌무란이 본론을 꺼냈다.
“일전에 얘기하신 것 있지 않습니까?”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번엔 헤매지 않고 곧장 그 흐름을 쫓아 끝까지 가 볼 테니 염려 마십시오.”
준혁에게서 원하는 답이 떨어지자 좌무란이 밝게 웃으며 품에서 자기병 세 개를 꺼냈다.
“이건?”
“몸을 보하는 데 보진단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부디 도움이 되실까 하여 준비했습니다.”
좌무란이 건넨 자기병을 공간팔찌에 옮겨 담은 준혁은 그를 향해 넙죽 몸을 숙였다.
보진단만 하여도 값어치가 적지 않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이라니.
준혁은 두 눈에 진심을 담아 감사함을 표했다.
그리고는 몇 마디 더 덕담을 이어가다가 결계 앞으로 다가갔고,
파앗-
일전에 도움을 받고 밖으로 나온 것과 달리 가볍게 결계를 통과하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균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준혁이 사라진 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좌무란의 표정이 냉랭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냉랭해진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결계를 준비하라. 내부 탐사에 성공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할 테니.”
준혁이 탐사에 성공해 공천귀의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면, 그것을 빼앗으면 그뿐이고.
일전처럼 실패한다면 세뇌 후 직접 조종해 안을 탐색할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하라는 스승의 명령이었다.
***
균열 밖에서 무슨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지 준혁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비경 내 탑 정상에 앉아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처음엔 대화성 인근의 통로만 유지한 채, 흑석대륙과 연결된 균열을 폭파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약 균열이 더는 확장하지 않게 막을 수만 있다면, 공천귀의 공간을 매개체로 호란대륙부터 흑석대륙을 마음껏 오갈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점을 생각한다면 균열을 없앤다는 선택지가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아니지. 득보단 실이 많다.”
하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결국 균열을 없애야겠다는 걸로 결론이 났다.
자신이 공천귀의 공간을 안전 거주지로 만들 작정을 한 이상, 통로가 외부로 드러나 있는 건 만일에 상황을 대비했을 때 약점이 될 수도 있단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제무무가 만들고 있는 전송진의 영향도 있었다.
시일이 걸릴지라도 흑석대륙에서 대황대륙을 관통하는 전송진이 완성된다면, 굳이 공천귀의 공간을 매개체로 이동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잠시 후, 고민을 끝낸 준혁은 홀가분한 마음가짐으로 버드나무 안으로 이동.
어느새 중심에 자리를 잡고 금빛 실을 사방으로 뻗치기 시작했다.
“시작해볼까?”
일전에는 동향을 살필 겸, 비경과 연결할 겸, 겸사겸사 외출했지만, 이젠 완벽한 안정화를 이루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1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밖에서 기다리는 자들은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기다리다 지치면 그건 그것대로 고소했다.
촤르르륵-
어느새 원통형 창고는 금빛 거미줄에 뒤덮였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
균열 밖, 결계 앞.
십여 미터에 이르는 균열은 벌써 30m를 넘을 정도로 확장돼 있었고, 좌무란이 쳐둔 결계를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최근 들어, 정확히는 수십 년 전부터 급속도로 확장하더니 주변 모든 공간을 집어삼키고 소멸시키고 있었다.
결계 앞엔 몇몇 수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그들은 좌무란과 대막리, 그리고 둘을 따르는 고위급 수사들이었다.
“이미 죽은 게 확실합니다. 몇 번이고 찾았지만, 흔적도 발견되지 않지 않았습니까? 설마 또 안으로 가시렵니까? 이제 균열이 너무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사형.”
대막리는 심각한 표정의 좌무란을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균열 속으로 들어간 적마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던가.
하지만 그 모든 게 무의미한 노력이 되고 말았다.
호기롭게 새로운 길의 흔적을 찾았다고 균열로 사라진 적마는 오십 년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결국 고생해서 만들어놓은 함정은 전부 무용지물이 돼버린 지 오래.
“내가 그깟 놈의 생사에 연연하는 거 같으냐.”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좌무란은 대막리의 반문에 한숨을 깊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자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기 전, 다른 이들은 발견하지 못한 길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었지.”
“그랬습죠.”
“진선쯤 되는 수사가 균열에서 버티지 못하고 귀천하게 되면 모든 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의 념이 혼백과 함께 작은 흔적을 새겨놓지.”
“아!”
“나는 여태껏 그것을 찾은 것이다. 균열 속에 강인한 혼백으로 생긴 상처. 균열 속의 균열을 말이다.”
좌무란은 팔짱을 끼고 있던 자신의 팔뚝을 피가 나도록 쥐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바친 시간이 얼만 줄 아느냐.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스승님의 명이 있든 아니든. 어떡해서든 균열 속 공천귀의 흔적을 찾아내고 말 것이란 말이다.”
“사형….”
“하지만 현실은 이토록 냉정하지….”
“그 말씀은?”
위험한 균열 속으로 다시금 들어가려던 좌무란의 말투가 바뀌자 대막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지는 말에 다시금 그의 눈빛엔 걱정이 맴돌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조사해보고…. 그래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땐 포기할 것이다.”
잠시 후, 좌무란은 스승인 천휴림주에게 남기는 전음부를 대막리에게 건넸다.
균열이 급속도로 확장되며 이상 조짐이 생긴 뒤로, 천휴림주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상황.
적마가 내부에서 죽은 것 같다는 보고를 받은 뒤부턴 마음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엔 모든 걸 철수하고 림으로 돌아오라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스승님께 이것을 전해드려라.”
잠시 후 좌무란은 얇디얇은 천을 덧댄 보호의를 입더니 천천히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비장한 얼굴을 한 채 균열 속으로 몸을 날렸다.
***
“찾았다!!”
균열 속에서 헤맨 지 1년여가 지날 때쯤.
좌무란은 공허와 같은 세상 속에서 얇은 파장이 만들어내는 길을 발견했다.
그 길은 평소에 보던 것과 달리 하나의 원과도 같았고, 공간에 만들어진 갈라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적마가 말했던 그것이란 걸 직감했고, 빠르게 그것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흔적에 몸이 닿는 순간.
슈아아악-
마치 물항아리에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와류에 휩쓸린 듯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이동된 직후,
몸을 가누며 주변을 살피니, 어느새 자신은 공허의 공간이 아닌 푸른 초원으로 뒤덮인 공간으로 이동된 후였다.
“서, 설마….”
너무 기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곳이! 공천귀가 만들어놓은 공간인가! 드디어 찾은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혹자는 재화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기연이라고, 또 누군가는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줄 인연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좌무란은 오랜 수행과 긴 집념의 시간을 보냈기에 알고 있었다.
세상사 관통하는 하나의 철칙.
그건 바로 끈기와 노력이었다.
모든 일은 포기하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았고, 끝나지 않으면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규선에 오른 뒤 느낄 수 없었던, 하급 수사일 때나 느꼈던 벅찬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내가 해냈다!!”
푸욱-
그리고 말이 끝나기 직전.
차가운 감촉이 그의 양팔과 양다리를 꿰뚫으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영합니다. 좌무란 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