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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82화 (382/408)

382화. 시간 속에서 (2)

낭패한 모습으로 나타난 준혁.

좌무란은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결계의 입구를 열어주었다.

들어갈 때와 달리 스스로 결계를 통과하기조차 힘든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준혁은 좌무란의 배려에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힘겹게 물었다.

“제가 안에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지요?”

“1년이 조금 안 됩니다.”

‘1년이라…. 역시 예상대로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구나.’

일반적으로 수련에 임할 때 시간을 계산하진 않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시간 왜곡이 얼마나 벌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준혁이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자, 좌무란은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남과 달리 조금은 말속에 날이 서 있는 상태로.

“안에 들어가 보시니 어떠십니까?”

압력에 견딜만한지 묻는 것이 아닌, 적마의 힘으로 파장으로 존재하는 길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었냐는 질문.

준혁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그것 말입니까? 초입에는 무리 없이 가능했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힘들더군요. 아직은 저 안을 맘껏 돌아다니기엔 수행이 부족한가 봅니다…. 다만.”

“다만?”

한껏 이맛살을 꾸기려던 좌무란이 눈을 번쩍 떴다.

“좌 선사께서 남기신 정보에 존재하지 않은 길을 찾아냈습니다.”

“정말입니까?”

“너무 옅어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 제가 느낀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흐름이었습니다.”

준혁의 말에 좌무란이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그럼 더 진행하셨어야지요? 설마 그냥 돌아온 겁니까?”

“보시다시피. 제가….”

“음.”

준혁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허나 걱정 마십시오. 초입에서 시간을 낭비했기에 끝까지 가지 못한 것이지. 다음엔 분명 그 흐름이 무엇인지 밝혀낼 수 있을 겁, 쿨럭!”

말을 하던 준혁이 기침과 함께 진득한 피를 뱉어냈다. 그리고는 좌무란의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손으로 입을 쓰윽 닦았다.

준혁의 손이 입을 스치는 사이 보진단 세 알이 잠깐 모습을 드러내다 사라졌다.

그 모습은 너무나 빨라, 좌무란만 확인했고, 대막리는 그저 찌푸린 눈으로 준혁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몸을 추스르시지요. 빠른 회복을 위해 준비해놓겠습니다.”

좌무란의 배려에.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준혁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감사함을 표했고, 뒤이어 그의 안내를 따라 공동을 벗어났다.

잠시 후, 대량의 보진단과 활신미주를 건네받은 그는 임시거처라 불리기엔 조금 답답한. 하지만 익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

“사형, 저자가 저리 약할 줄 몰랐습니다.”

준혁을 임시거처에 안내해준 후, 돌아오는 길에 대막리가 입을 열었다.

“강체술을 익히지 않은 인족이면 그럴 만도 하다. 술법에 의지하면 다들 한계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지. 다만 요마족 동급 수사 여럿을 패퇴시켰다길래 기대했건만, 네 말대로 생각보다 약한 듯하긴 하구나.”

좌무란은 균열에서 빠져나온 준혁을 신랄하게 평가했다.

천휴림의 다른 진선급 수사들도 균열에서 빠져나온 후 꽤 낭패한 모습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준혁만큼 심각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대천경에 이른 수사 역시도.

“설마 우릴 속이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아닐 게다. 너는 보지 못했겠지만 급하게 보진단으로 몸을 보호하려 하더구나. 우리에게 업신여겨지지 않기 위해 허장성세를 보인 것이지, 실제는 보이는 것보다 더 상태가 나쁠 것이다.”

“그랬습니까? 참나. 하긴 그럴 만도 합니다.”

고개를 과도하게 끄덕이는 대막리의 모습에 이번엔 좌무란이 물었다.

“무엇이 말이냐?”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를 처음 봤을 때 겨우 연형기 수사였다고.”

“그랬지?”

“그 짧은 시간에 연형기에서 진선까지 오른 이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기초가 약하고 준비가 부족하단 뜻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있다.”

대화의 끝, 대막리는 사형이 무언가 지시를 내릴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렸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헌데, 몸을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미리 마지막 결계를 완성할까요?”

“아니다. 꽤 눈치가 좋은 이처럼 보였어. 기다렸다가 그가 균열에 재진입하면 그때 시작하자. 몇 년 안에는 회복하겠지.”

준혁이 머문 임시거처에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치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처럼.

***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석실.

오래전, 비승 후 머물렀던 장소가 다시 임시거처로 지정되자 준혁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고, 한편으론 자신을 너무 무시한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손에든 활신미주를 보니 예전에도 몸을 회복할 때 대막리가 건네주었던 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술 한잔 나눠주라며 유혹하던 조호랑도.

“잘 속아 넘어갔을지 모르겠군.”

준혁은 사소하게 떠오르는 옛 기억을 추억하다가 피식 웃고는 가볍게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는 곧장 분광소를 소환했다.

당연히 상처를 입은 모습은 시간을 끌기 위한 연기였고, 지금 준혁은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까운 보진단을 먹으면서까지 연기를 한 이유는 자신이 오랜 시간 두문불출해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광소를 소환한 준혁은 의지를 일으켜 일대를 완벽히 보호하고 내부를 무영기로 한 번 더 막아버렸다.

규선이 아니라 그 위 신선이 들여다본다 해도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그리고는 석실 한가운데에 적매의 불꽃을 만들고는 발을 가볍게 허공으로 내밀며 적마의 권능을 일으켰다.

파앗-

잠시 후, 무영기로 전신을 보호한 채 대막리의 성을 벗어난 준혁은 그대로 하늘을 갈랐다.

목표는 호란대륙의 대화성 근처.

예전에 중괴와 방문한 적 있던 거인족의 비경이었다.

***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벼운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의지로 주변을 흐릿하게 만든 준혁.

그는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빼죽 내미는 전송실 담당자에게 영석 꾸러미를 던져주었다.

흑석대륙을 지나쳐 뇌명숲까지 건넌 그는 현재 태왕문의 전송진을 이용해 묘립성에 도착한 상태였다.

“나으리. 송구하옵니다만 얼굴을 확인하는 게 제 임무인지라….”

‘기강이 바로 섰군.’

영석 꾸러미를 받았음에도 제 할 일을 하려는 성실한 담당자를 보며, 묘립성의 기강이 바로 서 있는 것에 만족한 준혁은 영석 꾸러미를 하나 더 던졌다.

“발동하게.”

“예이.”

잠시 후, 전송진을 통해 대화성에 도착한 준혁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전송진을 가리고 있는 보호막이 해제되자마자 허공을 밟았다.

파앗-

직후, 적마의 권능으로 성 밖으로 이동해, 옛 기억을 회상하며 하늘을 갈랐다.

그렇게 이동하길 한 달쯤.

준혁은 중괴와 함께 방문했던 비경 입구에 도착했다. 그는 감회가 서린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 한 손을 가볍게 들었다.

준혁의 손길에 따라 미세한 파동이 퍼지며 공간이 분리된 비경의 경계가 흐릿하게 비치다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역시 그대로 있구나.”

혹시나 비경이 사라지거나 다른 이들이 차지한 건 아닐까 하던 걱정을 하고 있던 그는 만족해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예전에 이동했던 위치를 기억해내며 즉각 적마의 권능을 발동했다.

파앗-

잠시 후, 비경 안으로 이동한 준혁.

그는 망설임 없이 비경의 상공으로 날아가 비경 전체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세 가지 기운으로 갈라진 흔적만 남은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절로 웃음 지었다.

예전엔 삼대지력이 회오리치듯 각각 분리된 채 기운을 뿜어내던 비경. 자신이 홀라당 집어삼킨 덕분에 폐허처럼 변해버린 곳.

중심에 탑처럼 세워진 유적의 모습도 여전해서 옛 기억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허공에 뜬 채 감상에 젖어있던 준혁은 입가를 끌어올리며 품에서 족자를 꺼내 머리 위로 펼쳤다.

“나로 인해 이처럼 황폐하게 변하긴 해지만, 이제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마.”

감상은 감상. 이젠 이곳에 온 목적을 진행해야 했으니까.

직후. 준혁이 수결과 함께 의지를 일으키자 그의 손목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번지더니 공천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부터 유일하게 영역분신으로 공천귀만 불러낼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준혁.

그는 한동안 공천령과 족자를 연구하며 그 이유를 일부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공천령은 다른 마선과 달리 자신의 권능을 미리 외부로 옮겨놨었고, 그랬기에 영역에 반응하지 않았던 것.

어떤 의미로는 중괴가 중력의 힘을 두 눈에 담아 놓은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마선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권능을 가진 상위 마선들의 특권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럴 만한 능력과 수행을 지닌 마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중괴가 두 눈에 중력을 담았듯이, 공천귀는 족자에 그 힘을 담아두었고, 지금 그것이 준혁이 흡수한 공천귀의 원 기운과 만나며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워라!”

잠시 후, 머리 위로 펼쳐진 족자가 팔찌에 반응하는 사이, 팔찌에서 노인 형태의 그림자가 쑤욱하고 빠져나왔다.

노인은 만통방에서 만난 공천귀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는데, 기운이 따뜻하고 포근함을 전해주었다.

파앙-

모습을 드러낸 노인 형태의 그림자는 엄청난 기파를 퍼트리더니 갑작스레 상공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비경의 천장으로 의심되는 곳에 닿더니 수천 가지 갈래로 갈라지며 비경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준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재빨리 식아를 깨웠다.

식아가 잡아먹은 공천귀의 기운을 강화하며, 동시에 공천귀의 기운이 퍼진 공간을 완벽하게 통제하에 두기 시작했다.

투둥-

그러자 공천귀의 균열에서 느꼈던 기운이 주변을 잠식하며 주변을 가득 채웠고, 급기야 바람도 불지 않는데 어디선가 살랑거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

스르르륵-

삼대지력의 흔적만 남아있던 탑 주위 공터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주변이 초원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변화의 끝이 아니었고, 잠시 후엔 탑 옆으로 작은 버드나무가 자라더니, 순식간에 규모를 키워 하늘에 닿을 만큼 자라나 버렸다.

“되는구나!”

그 모습에 준혁은 쾌재를 부르며 주변이 푸르른 풀들로 덮여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공천귀의 진정한 권능.

공간을 창조해 그곳을 하나의 작은 세상으로 만드는 힘.

다만 다른 마선과는 다르게 공천귀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순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팔찌와 족자를 연구하던 도중, 창조가 아닌 재구성은 가능하단 걸 파악했다.

즉, 공청령과 족자가 가진 힘을 이용해, 오래전 공천귀가 만들어놓았던 공간을 다른 장소로 옮겨온 것이다.

물론, 이건 완벽한 이전은 아니었다.

비경이 위치한 곳을 통하면 누구든지 출입할 수 있기에 이곳에 새로운 통로가 만들어지긴 하겠지만, 대막리의 성에 자리한 균열을 통해서도 여전히 출입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건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걸 뜻했다.

“이제 돌아가 균열을 폭파시키면 되겠군.”

자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 중인 것으로 보였던 좌무란과 대막리.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줄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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