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균열을 향해 (1)
어느 곳을 둘러봐도 흑회색 땅뿐인 대지.
적막만이 가득하던 그곳에 작은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진동은 점점 커지다 못해, 지진처럼 흔들렸고.
푸앗-
지진이 끝나간다 싶은 순간, 대지가 갈라지며 그곳에서 사람의 형태를 띤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수행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준혁이었다.
흑회색 대지를 빠져나온 그는 지하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흐읍-
그리고는 폐부 가득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역시 맑은 공기를 마셔야지.”
아무리 수행이 올라 공기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해도, 답답한 땅속에서만 머문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신체적인 부분이 아닌 정신적인 부분이.
그리고 그것이 인족이 가진 한계 중 하나였다.
한참 동안 호흡을 가다듬던 준혁은 어느 정도 만족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려 대륙을 눈에 담았다.
잠시 후, 조호랑에게 보낸 삼청조가 무사히 제 역할을 마쳤다는 걸 느끼고는 시선을 돌려 대막리가 머문 곳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조호랑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삼청조의 능력이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함에도 일방적이 전달 역할만 하게 만든 것이었다.
“걱정하게 만들 순 없지.”
진선에 오를 때도 100여 년이 걸린 수행 안정화가 30년 만에 끝났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지만, 아직 완벽한 규선이라 하기엔 상당히 부족했다.
그럼에도 준혁이 수련을 멈추고 밖으로 나온 이유.
그것은 그가 불의 근원을 이용해 마지막 천겁을 회피하는 바람에 완벽한 규선이 되기엔 천지영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기가 척박한 흑석대륙에선 아무리 수련에 매진해도 그것을 채울 수 없었기에,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바로 공천귀의 균열이었다.
만약 그곳이 림주의 말대로 정말 공천귀의 균열이라면?
부족한 영력을 채우고도 넘칠 만한 것들이 즐비할 테니 말이다.
잠시 후,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한 그는 가볍게 허공을 박찼고,
투웅-
그 순간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흑회색 땅뿐인 대지.
다만 그곳은 희미한 반투명 막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한 달여를 날아 그곳에 도착한 준혁은 감회가 서린 얼굴로 반투명한 막을 가볍게 통과했다.
“오랜만이군.”
반투명한 막을 통과한 준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조금 전 지나온 막은 대막리가 만들어놓은 영역의 일부였다.
오래전 기억으론 척박한 흑석대륙에서 안전하게 수련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그가 영역으로 일부 지역을 보호하는 것이라 했다.
아니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규선에 오른 준혁이 대천경 수사가 펼친 영역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눈속임일 줄이야.”
지금까지 대막리의 영역이라 알고 있던 것은 영역과 유사한 결계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았기에 절로 웃음이 난 것이다.
림주의 명령을 받은 대막리와 두 번째 제자인 좌무란이 공천귀의 균열을 가리기 위해 수작을 부려놓은 것이었다.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나 보군.”
공간의 균열이라는 게 흔하게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구지대륙이 있던 공간도 일종의 균열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것을 이토록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림주가 확신을 가지고 이곳을 보호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이 강한 만큼 이곳이 공천귀와 연관 있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고.
잠시 후, 대막리의 성으로 날아가던 준혁은 멀리서부터 기세를 풀풀 날리며 다가오는 이를 볼 수 있었다.
다가오는 이들은 일남일녀였다.
두 사람 다 안면을 익히고 있었기에 준혁은 비행을 멈추며 그들을 맞이했다.
“이게 누구십니까? 교휴 수사 아닙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교휴는 날카로운 인상이 한껏 날이 서 있었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림주께서 직접 부탁하셨다고 하시던데. 신경 쓰지 않으시나 봐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교휴는 준혁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타박부터 했다.
수십 년 전 적마가 방문할 거란 소식을 듣고 마중하기 위해 기다렸던 그녀는 준혁이 고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마음, 준혁은 또 달랐다.
그는 교휴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 당시 자신이 연형기 수사였으니 함부로 대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현재 자신은 대외적으로 진선이라 알려진 상황.
그녀의 태도는 호가호위라 하기엔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순간, 준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자,
파앙-
그를 중심으로 영기파동이 퍼져나갔고, 그 즉시 교휴의 몸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교휴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다가 준혁을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선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못했다.
준혁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으…. 으…. 수…. 윽.”
“왜 그러십니까 교휴 수사. 안색을 보니 심마라도 찾아온 듯싶군요.”
“으…. 사….”
그렇게 벌벌 떨던 교휴는 순간적으로 경직을 일으키더니 비행이 풀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준혁은 그런 그녀를 본체만체하다가 앞에서 같이 떨고 있던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자는 준혁의 기세를 받지 않았음에도 벌벌 떨고 있었다. 순수하게 겁에 질린 상태였다.
“독고진 수사도 이곳에 계셨군요.”
“사, 살려 주, 주십시오.”
“허, 누가 들으면 제가 무뢰배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자, 자, 잘못했습니다.”
한때 독고진이 독고제의 후손은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를 만난 김에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던 준혁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교휴가 벼락 맞은 쥐처럼 지상으로 추락해 벌벌 떨고 있는 모습에 정신이 나가버린 듯 보였다.
슈욱-
그때, 허공에 틈이 생기며 그곳에서 참새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주인이, 기다린다. 영광이다. 환영한다.”
참새는 이미 상황을 눈치챈 건지, 예전처럼 경망스럽게 주둥이를 나불대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준혁의 심기를 건들기엔 충분했다.
자신은 천휴림의 수장인 림주의 부탁으로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었다.
속사정이야 반쯤 협박이 섞여 있었다고는 하나, 대외적으로는 분명 자신은 손님이었다.
헌데 손님을 마중함에 있어, 마치 일하러 온 인부를 대하는 것 같은 모습에 심기가 틀어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예전에 대화성을 찾아온 대막리가 예를 갖춘 모습이었던 걸 생각하면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이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행동인가?”
예전이야 실력이 있어도 겸손이 최선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직 수행을 완벽히 안정시키지 못했고, 온전한 규선이라 불릴 수도 없었지만.
준혁이 가진 권능들은 더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만큼 강력했다.
그랬기에 팔왕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을 지키는 이가 겨우 규선에 오른 이 한 명뿐이라면.
“좌무란을 믿고 오만불손하구나!!”
파앙-
그 순간, 준혁을 중심으로 영력이 회오리치듯 움직였다,
회오리치듯 움직인 영력은 곧장 참새를 향해 밀려들더니 그를 허공에 구속해버렸다.
“째애애액!”
그러자 겁에 질린 참새가 괴성과 함께 덩치를 키우더니 사람만 한 괴수의 형태로 변했다.
하지만 덩치를 키운 이유는 준혁에게 맞서기 위함이 아닌, 주변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도망가기 위함이었다.
“흥!”
하지만 참새는 여전히 구속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허공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며 발버둥 쳤다.
잠시 후, 준혁이 한 손을 뻗어 가볍게 허공을 움켜잡자 참새의 몸이 미증유의 압력에 짜부라질 듯 구겨지기 시작했다.
“주인님! 살려줘!”
그제야 참새는 도망가는 걸 포기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릴 질렀고.
스각-
외침과 동시에 허공에 균열이 생기고, 그곳에서 대막리가 빠져나오며 참새를 보호하기 위해 손을 썼다.
그러자 준혁과 참새 사이로 조막만 한 돛단배가 나타나기 무섭게 거대한 전함으로 변하며 참새를 보호했다.
전함의 크기는 대략 30여 미터쯤 돼 보였는데, 방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본체의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
“선사! 손을 멈춰주십시오! 제 불찰입니다!”
대막리는 전함을 날려 보낸 직후, 준혁 가까이 다가오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허리를 숙였기에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그의 눈빛은 정확히 바닥에서 바들거리고 있는 자신의 제자를 향해 있었다.
“불찰이라. 림주께선 분명 저에게 공천귀의 균열을 조사해달라 ‘부탁’하셨는데 말입니다. 아니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분명 저에게 그리 전하셨습니다. 다만 얼마 전에 균열을 조사하러 떠난 사형의 안위가 걱정돼 그것에 매진하다 보니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준혁은 대막리의 전함이 자신의 것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방어력을 지닌 걸 확인했다.
‘그때는 비슷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다른 점이 한둘이 아니군.’
그리고는 고개 숙인 대막리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독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독고진은 마치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었다는 듯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사실 하나를 알아차렸다.
“이곳이 공천귀의 균열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졌단 건 다른 이들은 모르나 보군요?”
“저, 저는….”
준혁의 시선은 독고진을 향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에게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대막리는 허리를 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형과 저를 제외한 핵심 인물 몇몇만 그곳의 존재를 알 뿐. 다른 이들은 그저 사형의 거처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던 거였구나.’
세상에 비밀이란 없었다.
다른 세력에 첩자를 넣어 정보를 빼내는 건 기본 중에서 기본.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결국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준혁은 처음 공천귀의 균열에 대해 들었을 때, 중괴나 천신라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제야 궁금증이 풀린 것이다.
“그렇군요. 허면 저자는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대막리의 대답에 준혁이 독고진을 슬쩍 바라보았다.
“... 균열을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곳에 배치하고…. 앞으로는 입단속을 해야겠지요.”
말이 좋아 입단속이지, 앞으로 균열의 비밀이 풀리는 날까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단 뜻이었다.
준혁은 안타까운 눈으로 독고진을 바라보다가 지상을 향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벼락 맞은 쥐처럼 떨던 교휴가 축 처진 상태로 붕 떠올라 대막리 품에 안겼다.
대막리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준혁이 말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를 아직도 연형기 수사로 여기기에 잠깐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것뿐이니.”
준혁의 말이 경고인 것을 눈치챈 대막리가 다시 한번 깊숙이 몸을 숙였다.
“정신 차리게 교육하겠습니다...선사.”
잠시 후, 제자의 상태를 추스른 대막리가 전함을 거둔 후, 안내인을 자처하며 준혁 곁에 시립했다.
“그럼 가시지요.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 우선 아이들을 불러 성대한 연회부터 열라 하겠습니다.”
“연회라, 그런 건 필요 없으니 곧장 균열로 안내하시지요. 허튼 곳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 따윈 없으니.”
자신의 배려를 낭비라고 표현한 준혁 때문인지 대막리의 인상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웃는 얼굴로 회복한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러면 저야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형이 걱정됐는데…. 선사께서 안을 탐색해주신다면야.”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대막리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준혁도 밝게 웃어주었다.
“그럼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