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규선(窺仙) (4)
준혁은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기세를 일으킨다거나 위협을 가하려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다만 하나같이 ‘이쯤 하면 충분하지 않나?’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왕이 곤란에 빠지는 것까진 상관하지 않는 듯했으나, 그 이상 일이 진행되면 단체로 움직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서 멈춰야 하나.’
실력행사를 통해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만들려면 눈치 볼 필요 없이 지왕을 처리해버리는 게 맞았다.
마음 같아선 벌써 그렇게 행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대로 준혁은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산들바람이 받아들인 불의 근원. 마지막 천겁을 이겨낸 그것이 가진 권능은 ‘부활’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고도로 응축된 순수한 불의 기운만 있다면 무조건 존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권능.
즉, 준혁은 마지막 천겁을 버텨낸 것이 아니라, 지나쳐가게 만든 것이었다.
다만 그것에도 약점이 존재했다. 바로 부활하기 직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부활하진 못한다는 것.
부활 직전의 수행을 유지하긴 하지만, 체내의 영력은 다시 모아야만 했다.
다행히 준혁은 화정의 기운을 급하게 끌어다 썼기에 지왕을 상대할 수 있긴 했지만, 이미 그것도 바닥을 보이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수행을 안정시키지 못한 상태였기에 만약 여기서 전투가 지속된다면 결국 영력 고갈과 수행 안정화 실패로 다시 진선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칼을 들이민 이를 그냥 용서해줄 수는 없는 노릇.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곳의 사정도 봐 드려야 함이 도리겠지요.”
“감사합니다. 저자도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을 것이니 이번 일을 너무 담아두시지 마셨으면 합니다.”
준혁이 한발 물러설 듯 보이자 조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한 주위로 모여들던 이들도 더는 거리를 좁히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간다면 훗날 이자가 다시 앙심을 품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겠지요.”
말을 이어가던 준혁이 품속에서 작은 옥패를 하나 꺼내며 입김을 불었다.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팽그르르-
옥패가 허공에서 세차게 돌며 주변의 영력을 끌어와 머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왕의 원영 앞으로 날아가 그 앞에서 멈추었다.
“이건?”
처음엔 무슨 행동인가 싶던 이들이 옥패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대경실색하며 입을 열려는 찰나.
“지왕. 그대가 결정하시지요. 이 안에 그대의 혼을 담는다면 이번 일은 없던 일로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겠다면….”
준혁은 주변의 팔왕을 하나씩 눈을 맞추다 말을 이었다.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날 생각은 포기하십시오.”
***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준혁은 팔왕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태백랑의 뒤를 따라 그의 영지로 가버렸다.
원영만 남은 지왕은 다른 이들을 두려워하는 듯, 준혁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자신의 영토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하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고, 얼굴엔 근심 걱정을 가득 품고 있었다.
“인족 수사에게 인질이 잡히다니. 우리가 이곳에 자리 잡은 후 처음 있는 일이오. 당장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암왕께서 직접 움직이실 겁니까? 지왕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조용히 그를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태백랑까지 한 손 거들고 있는데?”
암왕의 발언에 조왕은 침착하게,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되받아쳤다.
조금 전 발생한 일은 영수족이 대황대륙에 자리 잡은 이후 최악의 굴욕이었다.
준혁이 지왕에게 요구한 것은 그녀의 혼 일부분.
즉, 명원패를 만들어 바치라는 뜻이었다.
거기다 시전자가 직접 안전하게 만든 명원패가 아닌, 어떤 용도가 숨어있을지 모를 명원패를.
모두들 지왕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여겼지만, 예상을 깨고 그녀는 바로 준혁의 제안을 수락해버렸다.
“크흠, 그걸 지금부터 생각해보자 그 말 아닙니까?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실 겁니까?”
“맞네. 그의 말대로 우린 대책을 마련해야 해.”
듬직한 웅왕이 암왕의 편을 들고 거들었다.
“우려일 수는 있으나, 그자가 마음먹는다면 그녀가 유지하고 있던 우리의 연계에 이상이 생길지 모르네. 그 말은….”
여태껏 유지되던 완벽한 방비가 인족의 손에 좌우될 수 있단 뜻이었다.
만에 하나 지왕의 명원패를 가져간 인족이 천휴림, 혹은 선마궁과 손이라도 잡는 날엔 꽤 골칫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물론 태백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족이었으니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휴…. 그러게 왜 섣부르게 나서서는.”
조왕은 웅왕의 말에 연신 혀를 차며 지왕을 탓했다.
“그래도 벌벌 떠는 걸 보니 백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더군. 그동안 기고만장하던 모습이 영 거슬렸는데.”
“그걸 말이라고!”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듯한 농담에 조왕은 버럭 소릴 지르다 명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준혁이 떠난 뒤부터 생각에 빠진 그를 보니 좀전의 상황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명왕께선 아까 그자와 무슨 얘길 나누신 겁니까?”
“얘기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실 필요 없습니다. 그자가 지왕에게 손을 쓰기 전에 먼저 의견을 나누시지 않으셨습니까?”
“허. 생사람 잡지 마시오. 의견을 나누다니! 이 꼴을 보고도 그리 말한단 말입니까? 폐허가 돼버린 이곳을 보고도?”
명왕이 봉황족 영토 전역을 눈에 담으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왕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더 역정을 내는 명왕.
두 사람은 불꽃 튀는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결국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던 묵왕이 입을 열었다.
“아무도 그자가 사용한 힘에 대해선 의문을 가지지 않는 건가?”
“의문? 무스…. 아! 그 핏빛 소환체 말인가?”
천겁을 이겨내며 보았던 공간을 찢어버리는 능력. 거기다 지왕을 단숨에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핏빛 광선.
“내가 알기로 그런 힘은 딱 두 가지뿐이다. 고대 천혈족과 천신라가 애용하는 기술이지.”
묵왕의 의문에 몇몇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한번 말한 바 있지만, 천신라의 권능과는 확연히 다르네. 더군다나 천혈족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왜 그리 확답을 하지?”
“그자는 거신체를 소환했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가? 절대 천혈족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단 뜻이지. 그래, 우연이 겹치고 겹쳐 두 힘을 손에 넣을 순 있겠지. 허나 하나로도 벅찬 고대의 힘을 동시에 융합해 사용한다? 그것도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족의 몸으로? 흥. 차라리 그자가 대라에 이르러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는 말이지.”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닌지, 좌중은 금세 조용해졌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준혁이 보인 천지 현상은 지금껏 들어본 적 없었기에, 다들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자 마음먹는 중이었다.
다만 조왕은 준혁이 소환한 핏빛 인형이 구지대륙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독고제의 힘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기에 묵왕의 말에 의구심을 키웠다.
잠시 후, 결국 건설적인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지왕과 인족에 관한 문제는 조만간 다시 만나 얘길 나누자며 모두가 자리를 떠나갔다.
명왕만이 홀로 남아 족인들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쓸쓸한 눈빛 속에선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곁에 있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혼잣말만이 맴돌았다.
“화정을 흡수한 염화신족의 후예라…. 그 아이를 다음 명왕으로? 허허, 이걸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진하진 않지만 어쨌든 봉황족과 인연이 깊은 적호족의 꼬마.
그 아이가 봉황족의 부흥을 이끌 거란 준혁의 말이 명왕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
준혁이 백랑족의 영지로 돌아가 수행을 안정시킬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대황대륙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처음엔 그도 백랑족의 영지 깊은 곳에서 수행을 안정시킬 작정이었으나, 금세 생각을 고쳤다.
당장은 실력행사로 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경각심을 가지고 자신을 견제할 게 뻔한 일.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지 몰랐으니, 자리를 피하는 게 맞다고 여겼다.
그랬기에, 태백랑에겐 수행을 안정시킨다고 말하고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빠져나와 버렸다.
“우선 이곳만 벗어나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아야겠구나.”
현재 준혁의 상태는 생각보다 나빴다.
다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는데, 벽을 허물고 나자 세상이 달리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장 중괴나 주서령을 구하러 가진 못해도, ‘한 번쯤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솟아날 정도였다.
몇 달 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최선의 속도로 대황대륙을 빠져나온 준혁은 가장 가까운 산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토율서의 힘을 이용해 땅속을 파고들었고.
지상에선 절대 알아차리기 힘든 깊이까지 파고든 후, 그곳에 일정 공간을 만들어 수련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수련 장소를 만든 후엔 의지를 일으켜 일정 공간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잠시 후, 수행 안정화를 위한 준비를 끝마친 그는 산들바람이 변한 구슬을 뱉어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그것을 삼켰다.
“내가 근원을 사용해 기력이 더욱 약해졌구나.”
불의 근원의 또 다른 약점.
그것은 천혈처럼 수사가 가진 근본적인 기운을 소비한다는 것이었다.
천혈이 수사의 정혈을 사용하는 것처럼, 불의 근원 역시 그에 따르는 기운을 사용했다.
영력처럼 즉각 회복하고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닌, 수사의 본질과도 같은 원기(元氣)를.
“허나 걱정 말거라. 염화신족의 힘이 태양지력과 뿌리가 같음을 알았으니, 이전과는 또 다를 것이니.”
준혁은 소화여를 치료하며 태양지력과 성광지력을 치환했던 것처럼, 산들바람의 몸속에 화기를 심어줄 생각이었다.
그것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산들바람은 더 이상 수련에 얽매일 필요 없이 수행이 상승할 테고, 이미 진선에 올랐으니 더는 걱정이 없었다.
한편, 준혁이 흑석대륙에 도착해 수행을 안정시키기 시작할 무렵.
조호랑은 쉬지 않고 하늘을 가르는 중이었다.
“자세히 설명이라도 해주고 가시지.”
그녀는 다급했던 준혁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비행법기를 조종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백랑족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왠지 오랫동안 그를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여자의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기다려요.”
어느새 조호랑의 얼굴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자신은 준혁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존심이 강한 그녀의 수련 욕구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
30년 후.
백랑족 영지 깊은 곳 수련 공간.
백랑족에 돌아온 후 준혁에 대한 얘길 들은 조호랑은 바로 수련에 돌입했고, 30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나무로 만든 패가 놓여있었는데, 그것은 준혁이 그녈 위해 남긴 전언이었다.
백랑족에 도착한 후 준혁을 보기 위해 움직였던 그녀는 텅 빈 수련 공간에 남아있는 나무패를 보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 않았고, 정말로 그를 볼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잘 지내고 있겠죠?”
수도자에게, 특히 삼경 삼선에 이른 수사에게 30년은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기간.
하지만 준혁이 수행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무리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 이렇게 쉴 시간이 어딨어?”
잠시 후, 조호랑은 준혁의 목소리가 담긴 나무패를 가슴에 품더니 다시 수련 공간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발길을 멈춰 세워야 했다.
“이건?”
파징- 쉬리릭-
미세한 진동이 수련 공간에 전해진다 싶은 순간,
수련 장소를 보호하고 있던 결계에 틈이 생기며 그 사이로 분홍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분홍새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화르륵 불타오르더니 부적의 형태로 변했고, 이내 그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걱정을 하고 있을 듯하여 이리 보내오.
-운이 좋아 규선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수행도 안정시킬 수 있었소.
-하여 대황대륙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마침 근처에 림주가 말한 장소가 있는지라, 그곳을 방문하려 하오.
-예상대로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구려.
이어지던 준혁의 목소리가 끝이 나자 조호랑이 떨리는 마음으로 부적을 살며시 손에 올렸다.
그리고는 들릴 리 없지만,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네. 기다릴게요. 몸조심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