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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75화 (375/408)
  • 375화. 규선(窺仙) (3)

    곰 같은 사내의 말에 좌중엔 침묵만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른두 번의 천겁을 불러온 이가 눈앞의 인족이란 뜻.

    그리고 그 말을 달리하면 신선을 넘어선 무언가라 예상했던 인물을 방비 없이 조우했다는 말이었다.

    또 한 가지, 누구를 막론하고 수행이 오른 직후에 수행을 안정시키기 전이 그자가 가장 약할 때란 뜻이었으니 그걸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내의 말에 모두의 기세가 순식간에 급변하는 걸 느끼며 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게 선사껜 중요한 일입니까?”

    “......”

    “제가 이제 막 수행을 올렸다면, 약해진 틈을 타 어찌해보기라도 하실 겁니까?”

    준혁이 내뱉은 말에 곰 같은 사내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상대의 당당함에 두려운 마음이 생긴 것이기도 했다.

    정말로 서른두 번의 천겁을 불러온 이가 눈앞의 인족이라면 그가 어떤 존재가 되어있는지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만에 하나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수행을 안정시킬 필요가 없다면. 그땐 섣부른 행동이 재앙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대답 없는 상대의 반응에 준혁이 덤덤하게 사실을 밝혔다.

    “그렇습니다. 제 아이를 구하다 보니 금지 안의 존재를 맞닥트릴 수밖에 없었고, 그자와의 대결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혁의 확답에 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라 여기고는 몇몇이 헛기침과 동시에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못할 것도 없지!”

    준혁의 입에서 말이 끝맺음하기 직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느다란 눈초리로 상황을 지켜보던 여인이 외침과 함께 사라졌고.

    슈아아악-

    외침과 동시에 준혁의 머리 위로 검은 거미줄이 쳐지며 그를 덮어버렸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보다 빨랐기에 준혁은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거미줄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거미줄로 준혁을 포박한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연속으로 교차했다.

    “역시, 허장성세였어! 그럼 그렇지! 세상의 섭리를 너라고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군들 수행을 올리고 나면 안정화를 거쳐 신체를 재구성해야지! 그건 신선에 오른 이라 해도 다를 게 없다!”

    그랬기에 대부분 수사들이 수행을 올리기 전 안전한 장소를 택하는 것이었고, 종문이나 지인의 도움으로 주변을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지왕! 동의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오!”

    “동의 같은 소리 하네! 그럼 인족 따위에게 우리의 보물을 내어줄 생각이란 말이야?!”

    봉황족 금지에서 인족이 얻은 힘은 어느새 대황대륙의 보물이 되어있었다.

    명왕이 그에 대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지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단약도 완벽히 소화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을 소요해야 하는 법. 저놈이 무얼 이용해 수행을 올린 지는 모르지만, 지금이라면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 그러니 다들 나를 도와 움직여! 일이 끝나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다면 말이지.”

    잠시 후, 준혁을 뒤덮은 거미줄이 더욱 새까만 색으로 변하며 녹색 수증기를 피워올렸다.

    치이익-

    그것은 땅속의 왕이라 불리는 지왕의 전매특허로, 살아있는 생명뿐 아니라 바위나 쇠 같은 무생물도 단숨에 녹여버리는 극독이었다.

    삼선에 오른 수사라 해도 지왕의 독을 방비 없이 버티기란 어려웠다.

    지왕의 행동에 언짢은 표정을 하던 이들은 서로 간 눈치를 보다가 마지막엔 명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명왕은 당장이라도 준혁이 흡수했을지도 모를 염화신족의 유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었으나, 모든 이들이 합심하려는 듯 행동하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명왕이 묵묵부답 아무 말이 없자, 팔왕은 하나같이 상대를 구속해 죽일 수 있는 수단을 발동하려 의지를 움직였다.

    결국 나머지도 욕심이란 감정을 억제하진 못한 것이다.

    “아우우우!!”

    하지만 나머지 인물들이 실력을 행사하기 직전.

    폐부를 찢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외침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고, 모두 움직임이 멈칫한 순간 거미줄로 뒤덮인 준혁 앞을 태백랑이 가로막았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인가! 앞뒤 상황도 재지 않고 이리 핍박하려 하다니! 팔왕이란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태백랑이 당장이라도 반격할 기세를 내보이자, 지왕을 제외한 전원이 행동을 멈추었다.

    “부끄러워? 그러는 태백랑 그대가 오히려 부끄러운 것 아닌가? 팔왕이 고작 인족 따위를 감싸려 하는 게? 우리가 왜 이곳까지 쫓겨왔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갈! 그것과 이것을 어찌 비교한단 말이냐?! 이 녀석은 내 손님이며 내!”

    “뭐? 네 손녀의 반려란 그 말? 그러니 그냥 우리 보물을 훔쳐 가든 말든 지켜봐야 한다고?”

    치이익-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까만 거미줄 속에선 녹색 수증기가 점점 짙어졌고, 무언가 녹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이미 늦었다. 지금 물린다 하여 저자가 우리 사정을 헤아려줄까? 저자의 수행이 어떨지 모르니 손을 쓴 이상 끝을 봐야 해. 그러니 비키지? 안 그러면 오늘 우린 팔왕이 아닌 칠왕이 되어야 할 테니까.”

    그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지왕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팔왕보다는 칠왕이 부르기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진작에 분신으로 자신을 대신하고 허공중에 몸을 숨겼던 준혁의 등장이었다.

    ***

    “어, 어떻게!”

    목소리가 들린 순간 화들짝 놀란 지왕의 몸이 흐릿하게 사라지고는 허공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허공에 나타난 그녀는 어느새 핏빛 거미줄에 뒤엉켜 있었다.

    핏빛 거미줄은 금빛 실을 동반하고 있어 화려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저도 거미줄이라면 일가견이 있는데, 마침 잘됐습니다.”

    잠시 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준혁이 가볍게 손을 흩뿌리자, 원래 그가 있다고 여겼던 곳의 거미줄이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 유지하던 분신을 해제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입가를 비틀어 잔혹한 미소를 짓더니 영기파동을 퍼트렸다.

    파앙-

    그러자 지왕을 감싸고 있던 거미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그 안에 담겨있던 금빛 실들이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어딜! 뭐 해! 다들 움직여!”

    허나 지왕도 도박으로 규선의 자격을 따낸 건 아닌 듯, 준혁의 기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금세 의지를 일으켜 전신에서 거미줄을 뿜어냈고, 검은 거미줄은 적지주의 핏빛 거미줄과 뒤엉키더니 그것들을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그 잠깐의 사이, 태백랑을 제외한 팔왕이 주변을 덮고 있던 결계를 완전히 발동하며 지왕을 따라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애초에 결계 따위는 적마가 있는 한 의미 없는 것이었고, 팔왕의 협공? 그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판단했다.

    “저따위 결계로 나를 막으려 한단 말입니까? 경고하건대, 지금부터 움직이는 자는 내일을 볼 수 없을 겁니다.”

    규선이 일곱이든 여덟이든 상관없다는 준혁의 발언.

    태백랑은 당연하단 듯 태세를 풀어버렸고, 눈치를 보던 명왕도 기운을 잠재웠다.

    그러자 팔왕 중 가장 현명하다고 평가받던 조왕이 흐름을 읽고 영력을 흩어버렸다.

    그는 짧은 순간 준혁과 명왕이 눈짓을 교환하는 걸 눈치챘고, 그게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대번에 깨달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여기엔 숨은 이유가 존재했는데, 지왕은 오래전부터 누구에게나 공격적인 언사로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그녀가 혼나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거기에 더해 준혁이 보인 서른두 번의 천겁까지 고려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태백랑과 명왕에 이어 조왕까지 기세를 풀어버리자, 흑언족의 암왕과 곰 같은 사내 웅왕도 더는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지금껏 한 번도 입을 뻥긋한 적 없던 묵왕도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세 사람은 사태를 지켜보기로 한 듯 보였다.

    그사이 준혁의 손가락에서 붉은 광선이 허공을 갈랐고.

    스아악-

    찰나의 순간, 지왕은 흑색 막을 만들어 전면을 보호했다.

    스걱-

    하지만 그녀의 흑색 막은 붉은 광선에 너무 쉽게 찢겨나갔고, 그 뒤에 있던 지왕의 한쪽 어깨를 잘라버렸다.

    “이익!”

    그리고 그녀가 잘려 나간 어깨에 영력을 불어넣으며 몸을 회복하려는 순간.

    “어깨보단 목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그녀의 눈앞으로 이동해 온 준혁이 의지를 일으켰고, 그녀의 손발이 허공에 붙잡힌 듯 단단히 구속돼버렸다.

    스걱-

    그리고는 목에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사선으로 기울었다.

    직후, 준혁은 목이 잘린 그녀의 몸통 위로 손을 올렸다.

    규선에 오른 그녀가 겨우 신체가 훼손당했다고 큰 타격을 받진 않을 것이었기에, 이어서 월광지력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3할도 얼기 전.

    파앙-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살얼음이 터져나가며 그 안에서 검은 거미 형태의 원영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역시, 구속이 불가하구나.’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기에 준혁은 동요 없이 양손을 합장하듯 움켜쥐었다.

    진선 이하의 수사들이야 월광지력이나 금빛 실을 이용해 구속한 후 처리하면 되었지만, 규선부터는 그게 불가능했다.

    애초에 신체 따위는 고려할 필요 없이, 원영이 수사 본인이라 여기고 상대하는 게 옳았다.

    잠시 후, 준혁의 손짓에 대기가 출렁거리며 엄청난 영력이 파도처럼 움직이려는 찰나.

    “어딜 도망가시려는 겁니까?”

    준혁은 하늘로 솟구치던 거미를 응시하며 한 손을 머리 위로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는 손을 아래로 내리치는 시늉을 하자, 그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그의 시선이 향하는 모든 것이 반전했다.

    “떨어져라!”

    중괴가 남겨준 중력의 힘을 드디어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 미칠듯한 속도로 날아가던 거미가 반대로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콰쾅!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면과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다시 달아나려 할 때는 붉은 거미줄에 칭칭 감긴 후였다.

    거미줄 위에선 거미줄보다 더 붉은빛을 띠는 핏빛 인형이 손을 겨누고 있었다.

    ***

    “사, 살려주세요. 보고만 있을 것이야!”

    준혁에게서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 여긴 것인지, 지왕은 목숨을 구걸했다.

    동시에 주위에서 방관 중이던 나머지 팔왕을 향해 고함쳤다.

    “살려달라라…. 생각하시고 움직이시지 그러셨습니까?”

    준혁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코웃음을 치며 의지를 움직였다.

    그러자 거미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던 천혈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손끝에 기운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멈춰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 조왕이 기척을 내며 일정 거리까지 다가오다가 멈추어 섰다.

    그는 준혁이 정말로 지왕을 죽일 거라고는 여기지 않는지 핏빛 인형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잘못은 분명 처벌해야 할 테지만. 한 번만 용서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용서라, 제 목숨을 노린 자를 용서하란 말입니까?”

    “그러겠습니까? 저 역시 같은 일을 당하면 가만있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이어지는 조왕의 말은 대황대륙과 삼대 세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삼대 세력이 대황대륙을 영수족의 터전으로 인정해주고 감히 발을 뻗지 못하는 이유.

    바로 그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팔왕의 존재.

    하지만 준혁으로 인해 지왕이 죽고 난다면 방비에 허점이 드러나게 될 테고, 결국 대황대륙의 안위가 흔들린다는 이야기였다.

    “겨우 이자 하나 때문에 팔왕이 구축한 역사가 무너질 거란 뜻입니까?”

    “휴우…. 숨겨서 뭐 하겠습니까? 사실 그녀의 능력이 매우 중요해서 말입니다.”

    흑언족과 마찬가지로 땅속에서 살아가는 흑지족.

    그들은 그들의 능력인 거미줄을 이용해 사방을 촘촘하게 잇고 있었고, 그것이 팔왕이 연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죽음은 흑지족의 탈락으로 이어지고, 흑지족의 탈락은 팔왕의 방비가 무너지는 거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용서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어느새 태백랑을 비롯한 팔왕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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