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규선(窺仙) (2)
겨우 세 번 남은 천겁이었지만, 준혁은 살아오는 동안 경험했던 그 어떤 때보다 긴장한 채 준비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다고 여긴 순간.
하늘에서 노란 뇌전 기둥이 쇄도했다.
“가라!”
금지 안, 좌정한 채 극도로 의지력을 끌어올리던 준혁은 기둥을 향해 소리쳤고,
콰앙!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신체가 지면을 박차며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어느새 거신체의 몸은 태양의 힘을 담은 불덩이도, 달의 힘을 담은 얼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눈에서도 은회색 기운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모든 건 심장이 자리한 가슴으로 모여 삼지행으로 변해있었고, 그 안에는 원영이 힘을 받아들이며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뇌전 기둥과 삼지행을 압축한 거신체가 부딪친 순간.
파스르르-
엄청난 폭발과 파동이 터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모든 게 소멸해버린 듯 괴이한 정적만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정적은 더 파괴적인 폭발의 준비였다.
콰아아앙!!
소멸하듯 서로 상쇄해버린 것이라 여기던 힘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력을 동반하며 금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온다.”
준혁은 폭발의 진동으로 몸이 떨려오는 걸 느끼며 곧이어 응축하고 있는 기운을 감지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산들바람을 도우며 만들어 두었던 충전용 화신체 다섯 개를 전부 꺼내 허공중에 띄웠다.
동시에 화신체로부터 엄청난 영력을 전해 받으며 열여섯 명의 분신을 더 만들어 상공으로 쏘아 보냈다.
덜덜덜-
그러자 준혁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요동쳤고, 그의 입가에 비치는 핏물이 더욱더 선명해졌다.
규선에 오르며 예상대로 서른두 명까지 분신을 늘리는 게 가능했지만, 막상 다루려고 하니 정신력이 순식간에 고갈됨을 느껴야 했다.
만약 화신체의 영력을 빌리지 않았다면 그 반대급부까지 감당해야 했기에 이미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준혁이 쏘아 보낸 분신들은 거신체를 감싸듯 돌며 각기 가진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선의 모습을 한 분신들은 그들이 법기 형태일 때의 모습을 간직한 법기를 한 손에 꼭 쥔 채 하늘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준혁과 동일한 모습을 한 채 흑룡을 비롯한 용천무의 날개 등 준혁이 가진 최고의 패들을 두른 채 대기했다.
번쩍-
그때에 맞춰 또 한 번 뇌전 기둥이 떨어졌다.
***
“마지막인가….”
어느새 서른한 번째 천겁을 이겨낸 준혁의 모습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입가에 흐르는 핏물의 양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아니 좀 전에는 이미 한 바가지가 넘는 피를 토해내기까지 했다.
“역시 준비가 부족했구나….”
준혁은 하늘에 응집하는 기운을 느끼며 자조적인 소리를 내었다.
이미 분신들은 전부 소환 해제된 후였고, 거신체와 천혈도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그랬다.
직전의 천겁을 마지막으로 그는 모든 힘을 소진해버렸고, 더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준혁은 자신의 깊은 곳에 보호 중이던 산들바람의 구슬을 꺼내 얼굴 앞에 가져왔다.
그러자 구슬 위로 희미한 무영기가 생겨나며 구슬의 존재를 가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직 부족한 게 많구나.”
지금 상태로는 수행이 오른 산들바람을 그 상태로 완벽히 지켜줄 수 없었다. 마지막 천겁을 이겨내는 데 실패한다면 그 후폭풍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준혁이 삶의 희망을 놓고, 천겁에 대항하기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십이색 무지개가 사라지기 직전 하늘에 닿을 것 같던 느낌.
그 느낌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만 알 수 있다면 마지막 천겁을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쉬지 않고 발버둥 치고 있음에도 그 감각을 손에 쥐기란 너무 요원했다.
세상에 의지를 표출하는 게 아닌, 세상 그 자체가 되어 모든 걸 자신의 의지 아래 둘 수 있을 것 같은 감각.
그것만 획득할 수 있다면 천겁도 조종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너무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갔었기에 다시 한번 체감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에만 매달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이미 하늘 깊은 곳에선 마지막 천겁이 준비를 끝마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나. 수행이 떨어지는걸 감안하더라도 다시 한번 천혈을 움직일 수밖에.”
이미 천혈이 소비한 정혈의 양이 예상을 넘어가는 상황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만에 하나 마지막 천겁을 이겨내며 규선으로 올랐던 수행이 다시 진선으로 떨어진다면, 한동안은 다시 수행을 올리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어쩌면 영원히….
그랬기에 남은 힘을 이용해 산들바람이라도 보호하려 한 것이다.
그때, 준혁은 무영기에 갇혀가며 존재감을 잃어가던 산들바람에게서 따뜻한 무언가가 전해지는 걸 느꼈다.
스르륵-
“허어. 이건?!”
그것은 너무 따뜻하고 포근했으며, 한편으론 모든 걸 태워버릴 듯 맹렬했다.
“불의 근원?”
지금까지 어떤 방법을 써도 꿈적도 하지 않던 불의 근원이 구슬 밖으로 빠져나와 자신의 손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그리고 불의 근원이 가진 권능이 여실히 느껴지며, 이 사태를 불러온 산들바람의 화기와 태양지력의 공명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애초에 하나였다니….”
그동안 태양의 힘과 달의 힘, 거기다 별의 힘을 통합한 삼지행이 처음부터 하나라고 여기고 있던 상식이 깨져나갔다.
삼지행은 원래 하나의 힘이 아니었고, 수십 가지 기운이 섞여 만들어진 힘이었던 것.
거인족은 준혁이 마선들의 기운을 흡수하듯 다른 종족의 근본을 하나씩 수집해 삼지행이란 힘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태양지력이 자신의 원류나 마찬가지인 산들바람이 가진 화기를 만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말이다.
그 순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력을 품은 채 응축했던 뇌전이 세상을 갈라버릴 듯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에 반응하듯 준혁은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재빨리 삼키고는 곁에 있던 화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십이색 무지개 끝자락에서 느꼈던 감각.
그것을 획득하는 것엔 실패했지만, 산들바람이 전해준 불의 근원으로부터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콰르릉-
***
종말이라도 다가온 듯,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내려치던 뇌전이 사라졌다.
뇌전이 사라진 세상은 종전과 다름없었고, 어떤 가공할 기운도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서른두 번의 천겁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은 한없이 고요했다.
“끝난 것 같지 않습니까?”
“내 생각엔 천겁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소만?”
마지막 천겁은 그야말로 넓디넓은 봉황족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울창한 영목들이 가득했던 숲은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난 듯 곳곳의 지형이 변형돼 있었고,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을 거신체도 분신들도 전부 소환 해제해버린 채, 아무 준비 없이 대항한 상대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졌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조왕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지 안에 있던 자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나 마지막에 떨어졌던 천겁은 생명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잠시 후, 팔왕은 조심스레 결계 안으로 들어와 금지가 위치했던 곳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괜히 고생해서 결계를 만들지 않았다는 듯 혀를 차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역시, 깨졌습니다.”
봉황족 금지 근처에 다가온 이들은 변화를 느끼고 조소를 지었다.
조소의 의미는 천겁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누군가를 비웃는 것이기도 했지만, 금지의 도움으로 성장하던 봉황족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금지와 외부를 차단하던 봉인은 어느새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고, 금지의 화기가 밖으로 스멀스멀 빠져나오고 있었다.
“우선 저는 안을 살펴봐야겠으니, 다른 분들은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금지의 상태를 살피던 명왕이 으름장을 놓듯 목소리에 힘을 담자, 다른 팔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그들도 금지 안에 함께 진입해. 천지 현상을 불러온 존재의 최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금지에 출입하고 싶다고 밝히는 건 명왕과 싸우자는 말밖에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명왕이 파괴된 금지의 틈으로 몸을 날리기 직전.
쿠앙-
화르르륵-
파괴된 금지의 틈 한곳에서 견디기 힘든 고열을 동반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그 모습에 모두가 깜짝 놀라 긴장한 채 주시하는 사이.
“자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불기둥 속에서 감당하기 힘든 기운이 뭉쳐 들더니 흐릿한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걸 보고 태백랑이 깜짝 놀라 소릴 지르는 사이,
불기둥 속 인물은 알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으며 손을 살짝 저었다.
“이것 참. 실례를 하고 말았군요.”
그 순간 대기가 요동치며 무형의 장막으로 변하더니 어느새 불기둥 속 인물을 감쌌고, 잠시 후엔 붉은 법복을 입은 사내가 되었다.
“자네! 살아있었는가! 다행이네! 다행이야!”
잠시 후, 잃어버린 가족이라도 만난 듯 태백랑이 기쁨을 가득 담은 채 다가와 사내의 손을 맞잡았다.
불기둥에서 나온 사내. 준혁은 그의 태도에서 진심을 느끼고는 가볍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여있던 팔왕을 눈에 담고는 시선을 멀리 주며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불기둥에서 나온 그 순간, 봉황족 영토 전역에 설치되어있던 결계가 발동하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무사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거늘…. 그래. 그 아이는 구했는가?”
그때 명왕이 성큼 다가오며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을 하자, 준혁은 명왕지보를 건네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차갑고 냉랭했다.
“물론입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구먼. 다행이야. 나도 그 아이 걱정에 잠시도 편하질 못했네.”
“그러셨습니까?”
영기폭풍 속으로 직접 들어갔던 준혁은 명왕이 하는 말에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산들바람을 찾아 구하려 했다면,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신병 확보를 해놨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에겐 그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준혁의 반응에 명왕이 민망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사이, 이번엔 조왕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세. 안에 있던 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염화신족 말입니까?”
“역시 염화신족이었군…. 그래. 직접 본겐가?”
석양빛 구름을 통해 짐작만 했지, 그 존재를 확인받은 건 처음.
궁금증이 가득한 건 조왕뿐이 아니었는지, 준혁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하나같이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안에 있던 것이 진짜 염화신족이고 그자가 천지 영기를 불러오다 실패했다면 그 흔적이 남았다는 뜻.
그 흔적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모두 다 눈이 돌아갈 만했다.
지금은 금지의 주인인 명왕의 눈치를 보고 있지만, 준혁의 입에서 그 존재를 확인받는 순간.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지 짐작할 수 없었다.
준혁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규선에 오르며 깨달았던 감각이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늘과 맞닿을 것만 같던 그 감각.
세상의 의지를 발아래 둘 수 있을 것 같던 그 감각을 떠올려보면, 기껏 수행을 올리기 위해 외부의 무언가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규선에 올랐음에도 그전과 다름없는 행태를 보이는구나.’
그때, 한쪽에서 준혁을 말없이 주시하고 있던 곰 같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자의 말에 모인 전원의 눈이 번뜩하며 빛났다.
“헌데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수십 번 내리치던 천겁의 세력권 안에 있으면서 어찌 살아남을 수 있지?”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좌중을 흔들었다.
“저 안에 있던 자가 남긴 것을 그대가 받아들인 건 아닌가? 그러므로서 천겁을 불러왔고? 설마? 수행을 올린 건 자네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