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염화신족(炎火神族) (3)
저주받았다는 표현으로 보면 천혈족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분명했기에 준혁은 내색하지 않고 반문했다.
“천혈족? 그게 무엇입니까? 방금 수사에게 사용한 건 공간 가르기라는 비술입니다.”
“흐음…. 아닌데. 분명 더러운 냄새가 나는데….”
여인이 곰곰이 생각에 빠지는 듯 보이자 준혁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말 돌리지 말고 그 아이에게서 떨어지기나 하십시오.”
여인은 아이란 말에 불타고 있는 산들바람을 힐끔 쳐다보다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쁘지? 조금만 기다리면 완성될 거야.”
‘완성? 그냥 기생하려 하는 게 아니었구나.’
여인의 기운이 잔혼과 비슷한 영체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준혁은 당연히 그녀가 산들바람의 몸을 빼앗으려 하는 거로 여겼다.
“완성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보면 몰라. 흐음? 그렇구나. 역시 인족의 눈엔 안보이구나.”
여인은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선심 쓴다는 듯 설명을 이었다.
“지금 이 아이는 완벽한 염화족으로 탈피하는 중이야.”
“완벽한…. 이란 말은 설마 그 아이가 원래 염화족이란 뜻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훗.”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주작과 연관이 있던 적호족이 아주 먼 방계이지만 염화신족의 대를 잇고 있다고 했다.
산들바람의 기억을 속속들이 읽어낸 여인은 적호족의 특성이 자신이 기억하는 방계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좋아했다.
더군다나 산들바람은 방계이면서 염화족의 피가 유난히 강했고, 그로 인해 자신이 깨어날 수 있었다는 것까지.
“그래서 내가 우리 염화족의 비술을 사용했지.”
비술이란 게 현재 봉황족 영토를 뒤덮은 영기구름을 뜻한다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일.
“완성되고 나면 어찌 되는 겁니까?”
준혁은 여인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지만, 그녀와 산들바람의 상태를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기에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 발끝으로 금빛 실을 바닥으로 쏘아 보내 천천히 산들바람에게 흘려보냈다.
“어떻게 되긴? 당연히 우리 염화족이 되는 거…. 아! 수행이나 뭐 그런 걸 묻는 거야? 내가 그동안 간직해온 기운을 전부 소화하고 나면 최소한 규선에는 오르지 않을까?”
여인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지, 준혁이 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심지어 질문하지 않은 대답까지.
“너와 이 아이가 연결돼있다는 건 알아. 걱정돼서 온 거겠지?”
“그렇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오직 염화족의 모든 걸 전승시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니까.”
“그 말은…. 설마 탈피가 끝나면 저 아이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단 뜻입니까?”
“그래. 기억 깊숙한 곳에 우리 염화족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깃들긴 하겠지만, 이 아이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거야.”
‘독고제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천혈족의 유일한 후인이었던 독고제가 준혁에게 천혈과 권좌를 넘기며 했던 말과 똑같았다.
실제로 그는 모든 걸 넘겨준 후, 판단은 준혁에게 맡긴다는 식으로 말하고 사라졌었다.
‘허나 아직 의구심이 남아있긴 하지.’
잔혼과 영체를 남기면서까지 바득바득 생을 연장해 종족의 영광을 실현하려던 이들이 정말 그걸로 만족할까?
준혁은 독고제가 한 말을 믿는 척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앞의 여인이 하는 말도 진실이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저 아이의 모습이 너무 처참하군요. 제가 도움을 줘도 되겠습니까?”
“도움? 어떤?”
준혁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지금 저곳에 모인 영기를 이용해 저 아이의 수행을 올리려 한다는 것 아닙니까?”
“맞아. 잘 파악했네. 우리 염화족의 비술이자 공법이지. 어땠어? 아름답지 않았어?”
대화가 주제 없이 날뛰는 듯한 여인의 행태에 준혁은 혀를 찼다.
“그렇다면 수행을 올리기 전까진 최소한 신체가 버텨줘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제 눈엔 그렇게 보이질 않는군요.”
지금도 산들바람의 몸은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기에,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였다.
그 순간 준혁은 금빛 실을 통해 산들바람의 상태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거짓이었구나!!’
산들바람의 의식은 감옥에 갇힌 아이처럼 겁에 질려있었고, 그녀의 원영은 불구덩이에 빠져 거세져 가는 불길로 인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자아가 소멸하고 말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니! 제가 도움을 줘야겠습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준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종속의 인을 강화하는 한편 재빨리 그녀 곁으로 쏘아져 나갔다.
“어딜! 안 돼!”
하지만 상대는 그런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듯, 준혁이 채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한 사이 성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교차했다.
푸악-
그러자 그녀의 손짓에 따라 초고열의 화기가 두 곳으로 뭉치더니 준혁을 녹일 듯이 뻗어왔다.
슈악-
같은 화기를 품은 용암 호수 깊은 곳에 있었던지라, 그녀의 공격은 준혁이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강력했다.
“흥!”
하지만 태양지력을 지닌 준혁에게 화기란 너무나 친숙한 것.
그는 코웃음과 함께 전신의 영력을 삼지행으로 교체. 그 즉시 삼지행을 태양지력으로 바꾸며 한 손을 뻗었다.
촤르르륵-
그러자 그의 손짓에 따라 금빛 실이 태양지력을 머금고는 다가오는 화기를 가볍게 감싸 소멸시켜 버렸다.
“어? 이게 아닌데?”
그 모습에 여인이 잠시 행동을 멈춘 사이.
어느새 산들바람 코앞까지 도착한 준혁은 태양지력의 절반을 성광지력으로 바꾸며 그녀의 심장으로 손을 뻗었다.
물컹-
화기로 인해 피부가 녹아버렸기에 준혁의 손은 짓물러진 피부를 가볍게 파헤치며 그녀의 심장을 움켜잡을 수 있었다.
“너! 쓰레기 같은 거인족이었구나!!”
산들바람의 심장을 움켜잡은 준혁이 전력으로 성광지력을 쏟아부으려는 그때.
준혁의 몸 절반에서 일어나는 광채에 염화족 여인이 괴성을 지르며 뾰족하게 쏘아져 왔다.
직전에 손과 발을 동시에 구르자, 준혁의 발밑으로 진흙 같은 점성을 가진 불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준혁과 산들바람 사이의 용암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치다가 송곳처럼 변하며 터져나갔다.
그녀의 공격은 마치 산들바람의 안위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준혁은 성광지력을 일으켰던 손으로 귀원패의 권능을 사용하며 나머지 손으로 발끝을 가리켰다.
“터져라!”
콰앙!
그러자 주먹보다 두꺼운 육각 타일이 은은한 성광지력을 머금은 채 산들바람을 완벽히 감싸버렸고, 발밑의 불길은 폭발과 동시에 월광지력으로 꽁꽁 얼었다가 금세 소멸해 버렸다.
송곳 같은 불길은 귀원패로 만들어낸 육각 타일에 상처도 내지 못했다.
“으으….”
폭발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월광지력을 혐오하기 때문인지.
염화족 여인이 황급히 물러난 사이 귀원패로 덮인 산들바람을 향해 금빛 실을 쏘아 보낸 준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디 이제 진실을 말해보시겠습니까? 대체 이곳에서 뭘 하려 한 건지?”
어느새 준혁의 몸은 절반이 화염으로, 절반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중심인 심장은 하얀 광채가 뻗어 나오는 상태였다.
진선에 오른 후, 최초로 삼지행의 진짜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중이었다.
쾅!
그런 그가 용암의 물결을 역행하듯 아무런 방해 없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
이름은 없었지만, 고대에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 잠들어있던 염화신족의 전승자.
염화신족의 염원을 잇기 위해 만들어진 그녀는 거인족의 힘을 사용하는 인족 때문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는 실제로 적호족 아이를 염화신족의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 비술을 사용했고, 이미 그 아이에게 염화족의 권능인 불의 기운을 넘겼기 때문이었다.
모든 행동은 그 아이를 위한 것이었고, 염화족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한 말엔 거짓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인족은 공격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왜지? 나는 정말 저 아이를 위해서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신이 만들어질 때 주입되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세상을 파멸시킬 의도인지 분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던 두 종족.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종족들은 과감히 처단했다.
서로 상대에게 편승해 도움을 주지 못하게, 발본색원하듯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단 하나의 생명체도 살려두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종족과 저주받은 종족.
그렇게 생각해보니 지금 온몸에 불덩이와 얼음을 달고 공격하는 인족의 행태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쓰레기 같은 종족의 뒤를 이은 자라 그런 거야. 그들은 이유 없이 모든 종족을 말살하려 했어.’
이해가 더해지자 염화족 여인은 곧바로 방비에 나섰고, 자신에게 기록되어있는 수많은 공격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하고 도망가고 한편으론 기습하길 얼마나 이어갔을까.
심장을 꿰뚫을 듯 다가오는 얼음송곳을 피한 그녀는 회심의 한 수를 준비하며, 적호족 아이에게 넘겨주고 남은 화기를 한곳에 모았다.
이 정도 기운이면 상대를 처리하지는 못하더라도 재기불능으로 만들 수는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어? 설마?”
그때, 회심의 한 수를 사용하려던 여인은 적호족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파동에 황급히 놀라 모든 걸 멈추고 말았다.
지금까지 전투에 몰입해있다 보니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사이에 거인족의 후인이 무언갈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에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멈춰!!”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퍼엉 하고 터지더니 용암 물에 녹아 사라졌다.
동시에 의식의 조각이 칼날처럼 변하며 산들바람을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
준혁은 염화족 여인을 공격하기 직전 금빛 실을 이용해 의식의 일부를 산들바람에게 주입했다.
그 결과 그녀의 의식공간에 들어선 상태였다.
하지만 이곳은 명랑한 산들바람의 의식공간이라 하기엔 너무 어둡게 칙칙했으며 생기가 전혀 없었다.
마치 무생물인 무언가가 억지로 의식공간을 형성한 듯 보였다.
‘그자가 만든 것이군.’
한참 동안 의식공간을 살피던 준혁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감정의 편린을 통해 산들바람이 감옥에 갇혀 울부짖는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것이 이 상황을 전해준 것이었다.
‘감히 이딴 짓을 하다니.’
잠시 후, 의식공간에 완전히 스며들기에 성공한 준혁은 산들바람을 찾기 위해 종속으로 이어진 끈을 강하게 자극했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성광지력을 이용한 외부의 신체 치료와 더불어 그녀의 정신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기에 한시도 낭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의식공간 곳곳을 살피던 준혁.
마침내 그는 가장 깊은 곳 구석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숨어있는 작고 귀여운 여우 한 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산들….”
그녀는 거대한 존재에 짓눌린 듯, 준혁의 기운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의식이란 것이 작은 반응에도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기에, 준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종속의 끈을 통해 온기를 전달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외부에서 쫓고 쫓기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준혁은 온 정신을 작은 여우에만 집중했고, 결국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화들짝-
여우는 준혁의 존재에 겁을 먹은 것처럼 더욱더 움츠러들더니,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냄새를 맡듯 코를 킁킁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산들 나야. 겁먹을 필요 없어. 내 품으로 오렴.”
그렇게 다가오기 시작하던 작은 여우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급기야 껑충 뛰더니 준혁의 품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그리고는 심장이 자리한 가슴부위로 파고들더니 엄마 품이라도 되찾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작은 여우는 준혁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꼬리를 흔들었다.
물론 준혁이 성광지력으로 신체를 회복시키고, 의식공간에서 그녀를 만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진정한 사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일.
본격적인 시작은 의식의 일부에 이미 침범해있는 불청객을 쫓아내는 것부터였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산들바람이 준혁의 품속으로 뛰어든 순간, 의식공간이 점점 붉게 변하더니 급기야 활활 타올랐다.
“내놔! 그 아이는 우리 종족의 미래야!”
동시에 염화족 여인의 목소리로 생각되는 외침과 함께 수천 개의 불꽃 칼날이 만들어지더니 준혁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