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염화신족(炎火神族) (2)
“아니 자네! 어떻게 이곳에!”
준혁을 발견한 태백랑이 깜짝 놀라 다가갔다. 그뿐만 아니라 명왕도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열지 못하다가 황급히 움직였다.
“분명 인근에 아무도 접근하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겐가?”
태백랑과 명왕뿐 아니라 흑언족 수사와 다른 나머지 두 명의 팔왕도 준혁이 자신들의 기감을 피한 채 모습을 드러낸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준혁은 현재 그것에 대해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상황이 된다 해도 입을 열진 않았겠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 영…. 제가 이곳에 맡긴 아이와 연결된 심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혹시 저것과 관련된 것입니까?”
자신의 종속인 영수라 말하려던 준혁은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규선 영수들의 시선에 급히 말을 바꿨다.
그리고는 하늘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고, 태백랑이 그런 준혁을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쯧쯧, 몸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우선 숨이나 돌리게. 그리고 자네 예상대로 저것 때문이 맞네.”
“저것이 무엇입니까?”
보기엔 영락없이 수행을 올리는 영기구름.
하지만 불길하게 석양빛으로 물든 구름을 보고 있자니 산들바람이 수행을 올리는 과정 중에 생긴 것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건…. 흠. 자네 혹시 고대 혈족에 대해 들어보았나?”
“혹 천혈족이나 거인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준혁의 심각한 표정에 태백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니 설명하기 편하겠군, 그래. 천혈족과 거인족 그들이 세상을 양분하고 다스릴 때…. 그때를 말함일세. 그 당시 그 두 종족이 세상을 주도했다고는 하나, 모두가 그들의 뜻을 따른 건 아니네.”
이어지는 태백랑의 설명에 의하면, 고대의 선계는 천혈족과 거인족을 포함은 수많은 종족이 끊임없는 전쟁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중 유독 거인족과 천혈족이 막강했기에 역사는 그 둘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실상은 너무나 많은 고대 종족들이 즐비했다는 것.
당연하게도 영수족에도 그들의 뿌리가 되는 고대 종족이 있었고, 현재 봉황족 상공에 나타난 현상은 고대 영수족 중에서 염화신족(炎火神族)이라 불리는 일족이 수행을 상승시킬 때 나타나는 현상이란 것이었다.
“염화신족? 설마 봉황족과 관련된 것입니까?”
“맞네. 내가 마저 설명해주지.”
태백랑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명왕이 끼어들었다.
주작이 봉황족과 관련이 있었듯이, 봉황족의 뿌리는 불에서 태어났다는 염화신족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오래된 일이고, 봉황족이 여전히 화기를 다룬다고는 하나 이미 불의 근원은 잃어버린 지 오래라 했다.
그랬기에 지금에 와서 봉황족과 염화신족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불의 근원? 설마, 그녀처럼 스스로 화기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불에서 태어나고 불과 함께라면 절대적인 권능을 발휘한다는 염화신족.
그들은 스스로 화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행을 올린다 했다. 마치 소화여가 태양지력을 스스로 만들어내던 것처럼.
간략하지만 핵심만 담은 설명에 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명왕은 혀를 차며 설명을 이었다.
“헌데 어째서 저것이 현재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말이네. 현시대에 염화신족이 살아있을 리도 없고 그들이 수행을 올릴 일은 더더욱 없으니 말일세. 더군다나 분명 위치로 보면….”
설명을 이어가던 명왕은 준혁의 표정에 아차 하더니 갑자기 말을 끊었다.
준혁은 그런 그의 태도에 냉랭한, 하지만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아이는 어찌 되었습니까? 당연히 안을 확인해 보셨겠지요?”
“크흠.”
“명왕 선사!”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 했네. 당연히 일이 터지고 금지로 접근해봤지. 허나 아무도 찾을 수 없었네.”
“아무도… 말입니까?”
“우지는 물론이거니와 자네가 맡긴 아이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말이네. 내가 영기 폭풍 속에서도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는가? 이건 진실일세.”
명왕은 미안한 감정 절반과 본인의 떳떳함 절반을 얼굴에 담았다.
뻔뻔한 그의 태도에 당장이라도 무력을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지만, 준혁은 침착하게 점점 규모를 키워가는 석양 구름을 눈에 담았다.
‘금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예상할 수 없으나. 그 일에 산들이 말려든 건 분명하다.’
봉황족에 도착하고 금지에 가까워지자 삼청조를 통한 감정 전달뿐 아니라, 원래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그녀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공포와 무력함.
다행이라면 아직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자아를 잃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았다.
“주십시오.”
“응? 무얼 말인가?”
“명왕지보 말입니다.”
결국 준혁은 손을 놓고 방관자의 자세로 돌아간 명왕에게 금지의 출입 열쇠인 명왕지보를 요구했다.
마음 같아서는 적마의 힘을 이용해 바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빤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다섯 규선들이 눈에 밟혀 그렇게 하진 못했다.
“설마 자네…. 저곳에 들어가겠다는 말인가?”
“안 된다!!”
준혁의 요구에 명왕이 놀란 눈을 하는 사이. 태백랑이 소리쳤다.
금지는 현재, 영기 폭풍의 중심지.
규선인 명왕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듯, 지금껏 준혁이 경험했던 그 어떤 영기폭풍보다 거셌다.
태백랑이 소리쳐 말린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
하지만 그깟 영기폭풍 따위가 문제겠는가?
이곳까지 오느라 준혁이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준혁이 화신체 비술을 사용해 공천귀의 비술을 사용하자, 단번에 흑석대륙의 절반에 가까운 거리를 도약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가지고 있던 화신체 수정 세 개를 전부 사용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뇌명숲과 흑석대륙을 건너뛰고 대황대륙 깊숙한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비술의 반작용.
비술을 발동하는 데 필요한 생명력은 화신체로 대신했다고는 하나, 그 비술을 사용하는 주체는 준혁 본인.
당연히 어마무시한, 규선에 이른 이들이라도 믿지 못할 거리를 공간 도약하는 일이 신체에 부담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그 반작용을 이겨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중이기도 했고 말이다.
즉 준혁은, 진선에 가까운 화신체 세 개를 완전히 소모하고 진신 체력마저 거의 바닥이 나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비한다면 영기폭풍 속으로 몸을 날리는 일?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에 하나 지금의 현상이 누군가 수행을 올리는 일이라 천겁이라도 발생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말이다.
“저곳을 네놈 따위가 버틸 수나 있을 것 같으냐?!”
“그럼 두고 보란 말이십니까? 제 소중한 이가 저 안에 있는데.”
“…그래도 안 된다.”
준혁은 태백랑의 반대를 뿌리치며 명왕 앞에 섰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십시오.”
건네주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듯 준혁에게서 기세가 풀풀 날렸다.
“지금 내게 명령하는 겐가?”
준혁의 태도에 당황하던 명왕이 어느새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아이를 맡길 때, 뭐라 하셨습니까?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지금 이게 책임지는 것입니까?”
“…….”
“선사, 주. 십. 시. 오.”
준혁의 태도가 당장 칼부림이라도 하려는 듯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명왕지보를 가져간다 해서 금지에 출입하기가 가당치도 않다고 여겼을까?
준혁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명왕은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명왕지보를 꺼내 건넸다.
그 순간 무언가에 빨려가듯 명왕지보가 준혁의 손안으로 이동됐다.
파앗-
그리고 동시에 준혁의 모습이 사라졌다.
“명왕. 왜 그냥 보낸 거지? 내 생에 이렇게 건방진 인족은 처음이군.”
준혁이 사라진 뒤.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만이 주위를 감돌았다.
조왕이라 불리는 적수리족의 왕.
그녀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 있던 곰 같은 사내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래. 맘에 안 드는군. 겨우 인족 따위가 말이야.”
***
명왕지보를 건네받자마자, 적마의 권능으로 자리를 옮긴 준혁은 법기를 공간팔찌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열쇠를 얻으려던 건 보여주기 위한 행동.
그는 그것을 수납함과 동시에 다시 한번 적마의 권능을 발동했다.
파앗-
잠시 후, 화기로 가득 찬 공간에 도착한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이런 곳에서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명왕의 말대로 금지안은 영기폭풍으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당장 금지가 터져나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제발, 무사하거라.”
진선인 준혁이, 정확히는 일반적인 진선을 뛰어넘는 준혁이 이 정도의 압박을 느낄 정도면 산들바람이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
빠르게 상념을 날려버린 그는 곧장 심장에 연결된 종속의 인을 강하게 자극했다.
동시에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전부 사용해 영기폭풍으로부터 맞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종속으로 연결된 끈이 산들바람이 위치한 곳을 어렴풋이 알려주면서, 귀원패를 비롯한 마족의 전영까지 전부 발동하며 준혁의 피부 안으로 스며들었다.
“거기구나!”
그 즉시 준혁은 또 한 번 적마의 권능을 발동.
단숨에 공간을 뛰어넘어 용암으로 가득 찬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전신을 귀원패로 보호한 후 용암 호수로 뛰어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들바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점성을 가진 듯, 끈적하게 변한 불꽃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아이를.
반쯤은 녹아버린 처참한 모습의 그녀를.
***
영기폭풍의 중심이라 그런지, 산들바람 주위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보호되고 있는 것처럼 봉황족 영토 상공에 모여들고 있는 석양빛 영기구름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강렬한 기파가 쉼 없이 주변을 어지럽혔고, 정신을 앗아가려는 듯 뇌리를 파고들려 했다.
준혁은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의지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기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누구신지는 모르나 당장 멈추시지요.”
하지만 준혁의 말은 대답하는 이 없이 허공을 머물다 사라졌다.
그 모습에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그가 손가락을 들어 산들바람을 정확히 겨누었다.
그리고는.
“갈라져라.”
공간을 통째로 찢어버리는 천혈의 힘을 사용했고, 그 순간 산들바람의 몸을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왔다.
쩌저적-
“멈추라 하지 않았습니까.”
산들바람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무언가는 점성을 가진 불꽃처럼 보였던 불 그 자체.
그것은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더니 불타오르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피부 표면이 불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준혁에겐 그런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이깟 미혼술이나 사용하는 걸 보니, 소문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닌가 봅니다.”
준혁은 그녀가 명왕이 말한 염화신족의 무언가라 판단하고 말했다.
그러자 불꽃이 일그러지다가 점점 옅어지더니 완벽한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준혁을 응시하며 입술을 할짝댔다.
“신기하네. 인족 중에서 이렇게 정신력이 강한 자가 있었다니. 헌데 꼬마야.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방금 네가 사용한 건 설마 저주받은 천혈족의 힘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