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성광봉인진(星光封印陳) (1)
“이곳에서 마선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적마가 혈수림을 자주 방문했다는 중괴의 말이 떠오른 준혁은 그가 이 장소를 알고 있었을까 떠올려보았다.
그러다 보니 적마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낼 수 있었고, 그가 자신을 가둔 봉인에 대해 알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진법을 해제하기 위해 단상 위의 법기를 가져가라며 종용했던 걸 보면, 그는 이곳에서 마선을 가둔 진법을 미리 경험한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엔 스스로 봉인을 풀고 나를 공격했었지? 설마?’
생각을 이어가던 준혁은 이곳에 마선을 가둔 이가 적마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크게 의미 있는 건 아니었기에 빠르게 상념을 지워버렸다.
적마가 봉인을 만든 장본인이든, 이곳에서 봉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이든 어차피 그는 자신에게 흡수돼 더는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마음 한편으론, 훗날 적마가 자아를 찾게 된다면, 그땐 그와 이 일을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결심을 남겼다.
생각을 마친 준혁은 자아를 잃은 듯 보이는 마선을 흡수하기 위해 봉인진법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유심히 관찰하며 혹여나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 파악했다.
“역시, 죽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것도 느껴지질 않는구나.”
마선은 영원불멸하기에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 그 말인즉 봉인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적용됐거나, 또 다른 수법에 당했다는 뜻이었다.
관찰을 이어가던 준혁은 손끝에 마선기를 뭉쳐 살짝 자극을 가해보았다.
“흠, 반응조차 없다니.”
하지만 가위 형태의 마선은 정말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고, 심지어 식검마저도 별 관심을 주질 않고 있었다.
스윽-
한참 동안 ‘가세’를 살피던 준혁은 결국 식검을 불러내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알아낼 정보가 없으니 굳이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는 일.
식검을 이용해 가세가 가진 권능과 마선기를 흡수하려 손을 썼다.
다만 준혁에 의해 불려 나온 식검은 지금까지 마선들을 만났을 때와 다르게 거무튀튀한 모습에,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썩은 건 안 먹는다는 듯이.
잠시 후,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식검의 모습에 준혁은 결국 의지를 일으켜 식아를 강제로 깨웠다.
“깨어나라.”
그러자 꼬마 아이의 모습으로 변한 식검이 가세를 낚아채더니 입가로 가져갔다.
으드득-
그리고는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아이처럼 한껏 찌푸린 얼굴로 가세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역시, 화괴나 수괴처럼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마선기를 보유한 마선임은 틀림없구나.”
만약 식아로 변한 식검이 흡수하길 거부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준혁은 다행이라 여기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가세를 전부 먹어 치운 후 입맛을 다신 식아가 졸린 듯 몸속으로 들어가자 준혁은 허공을 살짝 긋듯이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갈라져라.”
지이익-
그 순간 천혈을 사용했을 때와는 달리 한 뼘 정도 되는 균열이 허공에 생겨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적매가 하찮은 능력이라 표현했던, 가세의 공간에 상처를 내는 권능.
“오호, 꽤나 쓸만하겠구나.”
다만 적매의 평가와 달리 준혁은 가세의 능력을 꽤 고평가 했다.
가세의 능력을 단독으로 사용하면 보잘것없었지만, 적마의 능력이나 용천무의 날개 같은 공간 관련 능력에 보조로 사용하면, 큰 도움이 될 듯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천혈과는 상극이라 어떤 도움도 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 가세의 권능에 대해 파악을 끝낸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 자신이 불러주길 고대하고 있을 그녀들 때문.
이곳이 적마의 창고라 여긴 채 잔뜩 기대하고 있을 그녀들이 텅 빈 공동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할지 예상이 가는 상황이었다.
***
“어? 왜 이렇게 휑하죠?”
“여긴 적마의 창고가 아니군요?”
적마 분신의 도움을 받아 신비경으로 이동해 온 두 여인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대로 실망하는 기색이 가득했고, 허탈해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렇구려. 어르신이 착각한 것 같소.”
준혁은 이곳이 창고가 아닌 마선을 가둬두고 있던 봉인진이 설치된 시설임을 설명하고 가위 모양의 법기를 소환해 두 여인에게 보여주었다.
마선이란 말에 흥미를 보이던 두 여인은 살아있는 수사가 아닌 법기 형태의 모습에 금세 관심을 꺼버렸다.
이미 준혁이 다양한 마선을 다루고 있는 걸 보았기에 거기에 하나가 더해진다 해서 신경 쓰진 않는 모습이었다.
준혁이 마선을 흡수했다는 건 모르고 있었기에, 살아있는 마선이 아닌 이상 그녀들에겐 준혁이 법기 하나를 추가로 습득한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잠시 후, 마선에 대한 흥미를 잃은 두 여인은 마선이 아닌 마선을 가두고 있었다는 공동 자체에 관심을 보이며 이곳저곳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소화여가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녀는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별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려 손바닥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마치 별빛을 잡아보려는 듯이.
“이건 분명 성광지력이죠? 제 몸 안에 이것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요.”
옅은 은하수가 떨어지듯, 반짝이는 별빛에 소화여는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아마도 저주 같았던 태양지력을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성광지력이 주입됐던 그 날, 준혁과의 일을 떠올리는 듯했다.
한편, 준혁은 공동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겨진 것이 없나 확인하는 조호랑의 모습에 청룡가 밑에서 광산을 관리하던 때를 추억했다.
‘나도 신비경에 비밀이 있진 않을까 하고 밤낮 가리지 않고 조사했었지.’
결과만 놓고 보자면 마선을 가둔 신비경은 성광지력이 흐른다는 것 말고는 어떤 장치나 숨겨진 것이 없었다.
그러다 근처에서 들리는 소화여의 말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도 그녀의 말에 그녀를 치료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녀만큼이나 감상에 젖을 때가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절망에 웃음 짓던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환한 웃음을 선물했었던 때를.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될 거라 예상하진 못했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각인될 만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나요?”
그때, 준혁의 상념 사이로 소화여의 질문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조호랑과 달리 마선을 봉인한 공동에도 금세 흥미를 잃은 듯 준혁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장난 섞인 목소리로 준혁을 의심한다는 듯 흘겨보았고, 준혁은 그녀의 장난에 공간팔찌에서 평범한 법기 세 개를 꺼내 내밀었다.
“혼자 차지하려 했더니, 눈치가 이토록 빠를 줄이야.”
준혁이 꺼낸 물건은 단상 위에 있던 물건들로, 상급과 최상급 사이의 훌륭한 법기.
다만 이미 진선에 오른 준혁에겐 별 가치가 없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준혁이 장난에 보조를 맞춰주자, 소화여는 즐거운 듯 환하게 웃으며 세 법기를 낚아채 갔다.
“욕심이 많으시군요? 세 개면 하나씩 나눠야지.”
그리고는 별 기대하지 않고 법기의 상태를 살피며 혼자서 피식거리며 행복해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화아악-
소화여가 법기에 담긴 기능을 파악하기 위해 기운을 주입한 그때. 세 개의 법기 중 하나가 강렬한 빛을 폭사하더니 허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더니 거대한 비석 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표면에 기이한 문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준혁은 법기가 발동되며 표면에 떠오른 문자들이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하고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곳에 적힌 것.
그건 바로 신비경에 존재하는 마선을 봉인한 봉인진에 관한 내용이었다.
준혁이 기감으로 간단하게 살필 땐 아무 반응도 없던 물건이, 소화여의 성광지력에 반응해 본래의 기능을 표출한 것이었다.
***
“성광봉인진(星光封印陳)?”
누가 보아도 성광지력과 관련이 있는 봉인진의 이름에 준혁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그 내용을 빠르게 머리에 담았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끝마치기도 전.
부르르-
공동 전체가 작은 미동으로 시작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장에서 쏟아지던 별빛이 불타오르듯 강렬해지더니, 소화여가 발동시킨 법기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아차린 준혁은 급하게 허공에 떠오른 법기를 손안에 끌어온 후, 소화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멋.”
직후, 공동을 조사하다가 당황한 듯 멈추어 서 있던 조호랑에게 쏘아지듯 날아갔고, 그녀마저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
“이곳이 무너지려 하니 나가야 하오.”
그리고는 공동에 균열이 생기며 진동이 거세지기 직전.
파앗-
적마의 권능에 가세의 능력까지 더하며 그녀들과 함께 허공을 찢으며 사라져 버렸다.
스으윽-
잠시 후, 지하의 공동을 탈출한 준혁은 지상 한쪽의 공간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양팔에 각각 안긴 채 몸을 밀착하고 있던 두 여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 눈을 끔벅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준혁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그는 대답 대신 재빨리 소화여가 발동시켰던 법기를 꺼내 들고 성광지력을 주입했다.
화아악-
그러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비석의 모습과 함께 문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석에 떠오른 문자에 세 사람은 누가 말릴세라 탐독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한참 후, 가장 먼저 집중을 깨고 입을 연 건 준혁이었다.
“흐음…. 그런 건가….”
그는 비석 안에 담긴 내용에 그동안의 의문 중 일부가 해소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성광봉인진이라 불리는 진법.
그것은 성광지력을 이용해 법기에 담긴 기능을 발동시키면 사용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더하여 비석에 잔뜩 적힌 진법가의 주석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성광봉인진은 마선을 가두기 위함이 아니라 성광지력을 한곳에 모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진법이라는 부분이었다.
즉, 성광지력을 다룰 수 있던 진법가가 자신의 수행을 도우려고 만든 것이었다.
‘성광지력을 다룰 수 있는 이가 있었다니…. 설마 거인족과 관련이 있는 자?’
다만, 그가 만든 진법은 성광지력과 상극인 마선들을 억압할 수 있었고, 우연히 그 기능을 알게 된 진법가가 자신과 분쟁이 생긴 마선들을 상대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법기와 봉인진을 만든 이가 남긴 말에 의하면 그는 마선 중 약한 축에 드는 ‘가세’를 잡아 와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로 인하여 연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훗날 성광지력을 다룰 수 있는 이에게 마저 연구를 이어가 달라고 법기에 연구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예상하기로 적마는 훗날 그곳을 발견함으로써 봉인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이고 말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면 적마가 그곳을 그대로 유지해놓은 이유였다.
‘설마 실험을 이어가기 위함인가?’
성광봉인진이라 불리는 진법은 미완성의 진법.
진법 제작자가 무슨 이유로 중도에 실험을 그만뒀는지는 기록해두지 않았으나, 몇 가지 연구해야 할 목록들은 친절히 적어놓았다.
그리고 그가 말한 것들을 전부 충족할 수만 있다면, 성광봉인진은 마선을 억압할 막강한 수단이 될 수 있고 말이다.
‘이걸 이용할 수만 있다면.’
준혁은 자신에게 봉인진이 들어온 것이 엄청난 기회임을 직감했다.
중괴와 주서령을 되찾기 위해선 천신라를 상대해야 하는 게 당연했고, 그 과정에서 봉인진은 엄청난 도움을 줄 게 뻔했으니까.
‘허나 혼자선 안 된다.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해.’
다만 평생 봉인진을 연구한 이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준혁 혼자서 이뤄내기란 요원한 것.
시간이 촉박한 그는 도와줄 이를 떠오르다가 적합한 사람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래, 그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그때, 준혁의 상념 사이로 소화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도 비석의 내용을 전부 확인하고, 고양된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제가 이걸 연구하고 싶어요!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