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마선들 (3)
준혁은 ‘거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부탁’이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상으로 공간석을 받고 싶다는 뜻.
‘어디 배포가 얼마나 큰지 볼까?’
준혁은 손목에 찬 금팔찌를 천휴림주가 잘 볼 수 있게 은근하게 흔들며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짧은 고민을 끝낸 천휴림주가 대답했다.
“좋네. 도와주지.”
“정말이십니까?”
설마 단번에 받아들일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준혁이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물론이네, 공간석이 귀하다고는 하나, 그대 말이 맞아. 우리에게도 필요하단 말 말이야. 단 공간석뿐이네. 전송석은 우리도 가진 게 없으니.”
천휴림주는 확답을 하며 천운성주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태왕문으로 사람을 보내 필요로 하는 재료를 제공하라는 말과 함께.
거기다 더해 공간석뿐 아닌 다른 재료들도 여유가 된다면 아끼지 말라는 명도 덧붙이면서.
‘시원시원하구나.’
천휴림주는 자신의 말마따나 보유 재화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오히려 명을 받고 움직이는 천운성주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준혁은 명령을 내린 후 ‘어때?’라는 눈빛으로 응시하는 천휴림주를 향해 깊게 몸을 숙였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이렇게 받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전송진이 완성되면 천휴림에 속한 이들이 최우선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천휴림주가 만족해할 만한 말을 꺼낸 그는 다음 주제가 나오길 기다렸다.
***
천운대륙 서남쪽.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를 쉼 없이 날아가는 무리가 있었다.
무리는 조각배 모양의 법기 위에 앉아있었는데, 선두엔 준혁이 초점 없는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왜지? 설마 공천귀 때문인가?’
공간석에 대한 거래가 끝나자, 다음 주제로 대화가 넘어가길 기다리며 긴장했던 준혁.
그는 천운성주가 말한 성광지력에 관한 얘기를 바탕으로 천휴림주가 어떤 제안을 할 거라 예상하였다.
그 제안이 자신에게 불리할 가능성이 매우 컸기에 어떤 식으로 빠져나가야 할지 머리를 핑핑 돌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천휴림주는 성광지력에 관한 얘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공천귀의 균열과 전송진에 대한 것만 몇 번 더 확인하다가 서로 시간을 아끼자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곤 축객령과 함께 최대한 빨리 흑석대륙으로 넘어가길 강요하듯 권유했고, 준혁은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천운성을 벗어났다.
‘그것 말고는 딱히 없긴 하군.’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준혁은 결국 공천귀의 이공간과 연관된 균열 때문이라 결론지었다.
아마 현 상황에서 자신을 강제하거나 하부세력으로 포섭하려 한다면 감정이 틀어질 수도 있었고, 그것이 균열의 조사를 뒤로 미루는 일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나로선 다행이라 해야 하나.’
준혁은 손목에 감긴 금팔찌로 시선을 옮겼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손목 어림에서 붉은 거미줄이 나타나 팔찌를 꽁꽁 싸매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사라지더니 다시 금팔찌만 덩그러니 남았다.
“역시 안 되는군. 천영보라 이건가.”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적지주의 권능에 이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전부 동원해 보고는 팔찌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제부턴 어쩔 수 없이 천휴림주에게 실시간으로 위치를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대라멸진을 구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왠지 지금도 천휴림주가 금팔찌를 통해 지켜보고 있을 거 같은 느낌에 준혁은 중림으로 향하는 비행 법기의 속도를 최고조로 올렸다.
그렇게 그는 긴 빛 꼬리를 남기며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
천운성, 성주실.
준혁이 떠나고 난 자리엔 여전히 천휴림주와 그의 제자인 천운성주가 남아있었다.
한참 동안 그동안의 안부 및 중요 사안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고, 천휴림주는 몇 가지를 지적하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처리했다. 둘째는 여전하고?”
“그렇습니다. 각 종문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균열을 통과한 자는 아직 아무도 없다 합니다.”
“역시. 적마의 도움을 받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을 듯하구나.”
천휴림주가 혀를 차자, 천운성주가 잠시 주저하다가 슬며시 질문했다.
“그래서 그냥 보내준 것입니까?”
“무엇을 말이냐?”
“예전에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심천군주에 이어 천신라를 겨눌 비수를 찾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전 당연히 그자를 수중에 넣을 거라 여겼습니다.”
심천군주가 비록 규선에 불과하나, 그가 사용하는 본명기와 성광지력이 극한까지 발휘되면 신선에 이른 천신라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방심을 유도할 수만 있다면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일.
그랬기에 성광지력을 다룰 수 있는 최준혁이라는 수사를 그냥 보내준 게 천운성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옥천이라는 법기로 구속을 해놨다고는 하나,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면 수행이 낮을 때 금제를 거는 게 최선이었다.
만약 기대대로 균열이 공천귀와 연관이 있다면, 그곳을 방문한 후 최준혁이란 수사가 어떤 기연을 만날지 몰랐으니 말이다.
“쯧쯧, 네 녀석은 하나만 생각하는구나.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다.”
천운성주의 생각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지적한 천휴림주.
“그놈이 점잖게 보인다고 해서 착각하지 말거라.”
“예?”
“그놈이 누군지 말이다. 그놈은 적마다.”
“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자주 들었던 적마. 그 이름 하나만으로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소문으로 전해 들은 적마의 성격대로라면, 조금의 억압이나 강제가 이행되려 한다면 약속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도망쳐 버릴 게 분명했다.
옥천으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고는 하나, 적마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것 역시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
그가 작정하고 숨어버린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잠시 후, 천운성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천휴림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떠날 채비를 했다.
그 모습에 천운성주 역시 후다닥 스승을 배웅하려 움직였다.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역시 초태해의 괴수들은 쉬이 볼 것들이 아니야. 한둘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엉겨 붙으니 여간 피로한 게 아니다.”
질색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던 천휴림주는 품에서 옥간 하나와 목함 하나를 꺼내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걸 셋째에게 전하고, 감옥에 그것도 포함시키라 하거라.”
“이, 이건…. 설마 또 한 놈 잡아 오신 겁니까?”
옥간을 품에 넣은 성주는 목함 속 기운을 느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워하는 천운성주의 말에 천휴림주가 잔인하게 입가를 끌어당겼다.
“돌아오는 길에 만났지. 어설프게 마선기를 숨기려 하더군. 이름이…. 그래 목요(木蟯)라고 하더군.”
“목요….”
“이로써 일곱인가?”
주어가 없었지만, 그것이 흑석대륙 비처에 가둬둔 마선들의 숫자임을 성주가 모를 리 없었다.
성주가 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천휴림주는 그 어느 때보다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신라만 처리하면, 으득. 세상에 마선이란 것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봉인시켜주지.”
한이 서린 목소리가 천운성주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마규보라는 또 다른 강자가 있었지만,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
“이곳이 괴류(怪流)라 불리는 강이에요.”
천운대륙 서남쪽 끝에 도달한 준혁은 강줄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강줄기는 초태해의 물줄기가 이어져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천운대륙과 중림을 가르는 지표였다.
그곳만 건넌다면 혈수림까지가 코앞이었기에,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 강줄기이지 폭이 수백 킬로가 넘었고, 초태해와 이어져 있던 걸 증명하듯 수시로 거대 괴수들의 기습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물론 초태해 깊은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삼선급 괴수들은 없었지만 말이다.
“자, 그럼 빠르게 이동해 봅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강줄기를 눈에 담은 준혁은 멈춰 있던 비행 법기를 조종했고, 비행 법기는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잠시 후, 삼 미터는 될 듯 보이는 날치들이 앞다투며 튀어 올랐고, 준혁은 가볍게 손을 저어 분신들로 그것들을 처리했다.
날치 무리의 습격이 끝나자, 그다음은 장어처럼 생긴 날개 달린 물고기들이 달려들었고, 그 후로도 각종 바다 괴수가 끊이질 않았다.
“멍청하니까 오히려 귀찮네요.”
준혁과 더불어 바다 괴수들을 처리하던 조호랑이 투덜거렸다.
괴수들은 수행만 높지, 지능이 없었기에 상대의 강함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덤볐다.
수행을 드러냄으로써 괴수들을 쫓아내는 게 불가능했기에 조호랑은 그게 불만인 듯 연신 투덜거렸고, 소화여는 아무 말 없이 성광지력을 움직여 날아드는 물고기들을 쉬지 않고 반 토막 냈다.
그렇게 강에 서식하고 있던 괴수들을 도륙하며 상공을 가르길 한참.
준혁 일행은 어느새 중림이라 불리는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
중림.
그곳은 이름처럼 나무로 가득한 곳이었다.
대황대륙과도 비슷했는데,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영목이 아닌 우중충한 나무만 가득하다는 것.
특히 안쪽으로 가면 갈수록 핏빛을 띠는 나무들이 늘어났고, 대기의 기운도 그와 함께 축 늘어지고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제 곧 혈수림이에요.”
핏빛 나무가 많아진다는 말은 목적지인 혈수림에 가까워진단 말. 준혁은 기운을 끌어올렸다.
중괴가 이곳에 먼저 방문했단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은 언제나 왜곡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이곳은 인족을 식량 삼아 먹어 치우는 식인족이 상주하는 곳이었기에 더더욱 날을 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온통 핏빛의 나무로 가득한 곳에 들어서자, 중괴의 방문이 무슨 뜻인지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조호랑뿐 아니라 소화여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마궁 수사들을 동원했다고 하더니….”
준혁이 바라보는 혈수림.
아니 처참하게 파괴되어 숲이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폐허.
그곳은 진선 수십 명이 한바탕 신명 나는 춤사위라도 벌인 것인지, 숲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 모든 게 파괴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땅이 움푹 파인 것은 물론이었고, 대기마저 지금까지 혼탁한 기운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이는 건 전혀 없었고, 심지어 숲을 이루는 나무들도 뿌리까지 죽어 있었다.
“씨를 말려버렸구나.”
‘내가 이곳에 오길 꺼리니. 장애물이라 판단하고 전부 처리한 건가….’
중괴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충분히 이해했지만, 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필요까진….’
이곳에 사는 이들을 지켜보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족인들의 씨를 말려버릴 의도까진 없었기에 준혁은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특히, 선계에 사는 다양한 종족들의 생활상을 보면서 종족의 다양성이란 것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더더욱.
“저쪽이에요.”
그때 상념에 빠진 준혁을 깨우듯 조호랑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덕분에 더 깊은 죄책감에 침잠하지 않은 그는 조호랑의 뒤를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잠시 후, 폐허로 변한 곳에 어울리지 않은 백색 바위를 마주할 수 있었고, 그곳이 대라멸진이 숨겨진 장소임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허, 이런 식으로.”
백색 바위에 준혁의 시선이 닿자 그의 한쪽 눈이 황금빛으로 변해갔다.
화아악-
그리고는 세상이 격자가 쳐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중괴가 눈 안에 미리 담아놓은 비술이었다.
격자로 나눠진 세상은 마치 의식의 공간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혁은 그것의 기능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격자로 이루어진 세상에 중괴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흐흐, 이곳을 찾아올 줄 알았다. 역시 내가 먼저 와보길 잘했어. 내가 뭐라 했느냐? 적마의 창고가 여기 있다고 했지? 크큭.”
격자 속에 비친 중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키킥대다가 말을 이었다.
“이놈아. 내 예상이 맞았다. 찾았다. 적마의 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