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마선들 (1)
천운성주는 매우 놀라는 중이었다.
자연스럽게 대처한다고 했지만, 떨림이 밖으로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천운성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신의 영역은 동급 수사가 아니라면 어떤 의지도 표출할 수 없을 만큼 촘촘했다.
당연하게도 진선이라 소문나있던 준혁은 자신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야 했고, 직접 발품을 팔아, 탐문하듯 움직였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여겼다.
상대가 적마의 계약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와 같은 장난을 친 이유이기도 했다.
“저도 조금 배우긴 했지만, 이곳에 걸린 것들과 비교하자니 부끄럽기만 하군요.”
천운성주는 빠르게 신색을 회복하며 그림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준혁에게 다가갔다.
“아, 그러십니까? 선도에 오른 후, 저와 같은 취미를 가진 분을 뵙지 못했는데, 마침 잘됐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 혼자 두고 온 것에 대해 언급할 생각을 못 하게, 벽에 걸린 그림 중 하나를 손으로 끌고 오더니 준혁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걸 받으시지요.”
“허, 이리 귀한 것을 말입니까?”
그 행동에 준혁이 살짝 놀라자, 천운성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무리 이것이 귀하다 한들, 최 선사와의 만남만큼이나 특별하겠습니까? 사양하지 마시지요.”
그가 건넨 그림은 범인들이 그린 산수화가 아닌, 최상급 법기였다.
물론 영보급엔 미치지 못했기에 준혁에게 쓸모가 있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수준의 물건이었다.
***
준혁은 상대의 호의가 무슨 의미인 줄 알았기에 가볍게 웃어 보이며 물건을 받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두고두고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주면 내가 고맙지요.”
준혁의 행동에 껄껄 웃음을 흘린 천운성주는 곧이어 안쪽으로 이동했고, 착석하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잠시 후, 준혁이 그림 감상을 마치고 따라 앉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됐다.
“그럼 방문 목적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방문 목적이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그게 무슨?”
준혁은 공간석을 구하는 게 첫 번째 목적이었고, 선마궁과 대결 구도에 놓인 천휴림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얻겠다는 두 번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목적이 있었음에도, 물건을 사거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손님이 아닌 초청받은 손님으로서 우위에 서기 위해 시치미를 뗐다.
어느새 한 손엔 대막리가 주고 간 신분패가 들려있었다.
“예전에 대막리 수사가 방문을 요청해서 말입니다.”
“아!”
천운성주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준혁을 바라보다가, 신분패를 넘겨받더니 그게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스승님이 전하라 하신 물건이군요.”
“천휴림주께서 직접 말입니까?”
어느 정도 예상대로 들어맞자 준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예, 막내가 명을 하달받을 때 저도 함께 있었으니까요. 허나…. 흠.”
“??”
말을 중간에 멈춘 천운성주를 보며 준혁이 의문을 드러내자, 그는 골몰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하긴, 알린다고 하여 크게 상관은 없을 테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스승님께선 어떤 정보를 입수하시고는 최 선사를 뵙고자 하셨습니다.”
“정보 말입니까?”
준혁의 반문에 천운성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웃는 듯했다. 마치 네가 숨긴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선사께서 성광지력을 다룰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허! 그걸 어찌?’
천운성주의 말에 준혁은 진심으로 놀랐지만, 티 나지 않게 대꾸했다.
“여태껏 적마 때문에 저를 찾는 거라 여겼거늘. 아니었군요.”
중괴가 전하길 적마가 턴 곳 중엔 천휴림의 보고도 있었다. 그랬기에 이곳을 방문하면서 적당한 핑계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적마라. 저희 천휴림을 너무 낮게 보신 것 아닙니까? 겨우 도둑맞은 물건 몇 개로 지금까지 앙심을 품고 있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정말 의외군요. 헌데 어찌 아신 겁니까?”
성광지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아는 이가 별로 없었고, 힘을 남발하지도 않았었기 준혁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하하 그것뿐이겠습니까? 조만간 혼인할 소우자의 여식도 같은 공법을 익히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체질이라 해야 할까요?”
‘대화성에 누군가 있구나.’
천운성주의 웃음에서 준혁은 눈치챌 수 있었다.
소우자가 수많은 세력에 수하들을 침투시켜 놓았듯이, 대화성도 똑같이 당하고 있다는 것을.
‘하긴,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지.’
고위수사를 갑자기 침투시키긴 어렵지만, 잡일을 하는 하위 수사는 생각보다 쉽게 가능했기에 준혁은 빠르게 수긍했다.
“천운성이 대륙의 중심이라더니. 정보력이 대단하시군요. 맞습니다. 허면 그다음 얘기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준혁이 너무 쉽게 수긍해서인지, 천운성주는 잠깐 의외란 듯 준혁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
천운성주의 긴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준혁은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때때로 감탄을 터트리기도 했다.
“해서 그 패를 전하며 한번 보자고 하신 겁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우선은 그게 주요한 이유입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선마궁과 척지고 있던 천휴림주는 이미 요마족의 심천군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걸로 부족하다고 여겨 준혁에게까지 손을 뻗으려 한 것이었다.
마선들에게 치명적인 상성을 가진 이들을 자신의 세력 하에 두려는 의도를 가진 채로.
심지어 천휴림주 그도 성광지력을 다룰 줄 알았다. 물론 그 역시 심천군주처럼 법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저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너무 의외의 말을 들어서인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요.”
그렇지 않아도 선마궁을 상대하기에 앞서 천휴림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던 준혁에겐 천운성주의 말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문제라면 준혁이 원하는 건 동등한 관계였고, 천휴림주가 원하는 건 상하 관계라는 점이었지만.
“물론입니다. 그리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요. 그리고 때가 맞지 않아 지금 결정할 필요도 없고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사실 스승님께선 현재 초태해에 넘어가 계셔서, 선사께서 뵙고자 해도 만나 뵙기 어렵습니다.”
준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성주가 설명을 이었다.
“뭐 선사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성주의 말에 의하면, 초태해 깊은 곳에서만 자라는 특수한 식물을 채취하기 위해 그가 직접 움직였다고 한다.
거인족의 거신체에 필적할 만한 초거대 괴수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라, 그가 아니면 애초에 갈 수가 없었으니까.
‘진선들도 방심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했던가?’
초태해의 거대 괴수에 대해 떠올린 준혁은 생각을 거듭하다, 지금의 상황이 차라리 잘됐다고 여겼다.
원래라면 적마에 대해 준비한 핑계를 대다가, 선마궁의 얘길 자연스럽게 꺼내려고 했는데, 지금 천휴림주를 만난다면, 반강제적으로 그의 세력에 편입돼야 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드러내지 않았던 비밀이 알려지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대비를 한 후 다시 방문하는 게 낫다 판단했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준혁은 성주에게 작별을 고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천운성주가 했던 말 중 아직 끝맺음하지 못한 게 남았다는 걸 깨닫고 질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하신 말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전부가 아니라니.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하하, 그것 말입니까? 그건 제가 직접 말하긴 그렇군요. 스승님이 오시면 직접 들으시지요.”
질문에 천운성주가 대답을 회피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처신이었기에 준혁은 수긍하며 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림주께서 돌아오시면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
하지만, 작별을 끝마치기 직전, 진선에 오른 후 느껴본 적 없는 중압감과 함께 날렵하게 생긴 미남자를 마주해야 했다.
사내는 마치 원래부터 준혁 곁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었다.
“그래, 내가 말해주지.”
선계 최강자 중 한 명인 천휴림주의 등장이었다.
***
천휴림주.
삼선 중 마지막이자, 일반적인 수행의 끝이라 알려진 신선에 오른 유일한 인족 수사.
그는 젊은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양 눈썹이 위로 올라가 매서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 묵직한 느낌이 들게 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날렵한 외형에 하얀 도포를 걸치고 있어 학자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범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사내의 등장에 천운성주가 경건한 표정으로 허리를 깊게 숙이자, 준혁도 그를 따라 몸을 살짝 숙였다.
“림주를 뵙습니다.”
천휴림주는 성주는 안중에도 없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고 준혁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의외란 듯 입술을 비죽였다.
“재밌군. 아무것도 볼 수 없다니.”
“예?”
그의 혼잣말에 천운성주가 급히 반문하고 나섰지만, 림주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준혁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는 준혁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적마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최가라 불러야 하나?”
화아악-
질문이 끝날 때쯤, 감히 깊이를 재단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무시한 거력이 파도처럼 밀려들었지만, 준혁은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자신의 수행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시험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무영기로 몸을 꽁꽁 싸매면서.
“최가 준혁이라 합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말을 하는 준혁이 작은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림주는 감탄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골몰히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혼자서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지. 알고 싶은 게 뭐지? 내가 조금 전에 도착해 자세한 걸 몰라서 말이야.”
‘설마. 그곳에서 이곳까지….’
천휴림주의 말에 준혁은 그가 천운성에 방문한 것이 자신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원래 림주가 머무는 천휴림은 천운대륙의 서남쪽 끝. 그러니까 초태해와 근접한 대륙의 경계 부근이었다.
그 말인즉, 할 일을 마치고 천휴림으로 돌아온 림주가 굳이 대륙의 중심인 천운성을 방문할 필요가 없단 뜻이었고, 순전히 천운성의 동태를 파악하고 움직였단 뜻이었다.
준혁의 예상은 일부분 맞았는데, 천휴림으로 돌아온 림주가 천운성주의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인 것이었다.
다만 준혁이 긴장하고 있는 것만큼, 성주도 자신의 영역 내에서 감지되지 않은 준혁을 신경 쓰는 중이었다.
천휴림주의 질문에 준혁은 조금 전 성주와의 대화를 읊었다.
“아, 성광지력이 아닌 다른 이유가 궁금했다 그 말이군? 내가 그댈 찾은 또 다른 이유.”
“그렇습니다.”
준혁의 대답에 림주는 피식 웃고는 천운성주가 앉아있던 상석으로 가 철퍼덕 궁둥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별것 아니란 듯 말을 꺼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부탁 말입니까?”
준혁이 공손하게 되묻자, 천휴림주는 처음으로 성주에게 눈짓을 보내다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별건 아니고. 내 제자가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해서 말이지. 적마의 능력을 빌리고 싶었거든.”
이어지는 그의 말은 준혁을 놀라게, 한편으론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혹시 계면의 균열이라 들어본 적 있나? 내 제자 녀석이 오래전에 발견한 곳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그곳이 꽤 중요해 보여서 말이야. 헌데 어찌 된 일인지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 볼 수가 없더군. 심지어 나도 말이야. 해서 적마가 필요했던 참이지.”
“중요하단 말은 균열의 정체를 알고 있단 뜻이군요.”
천휴림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정확하진 않지만…. 예상하기론 공천귀의 권능인 이공간(異空間)과 연결된 곳이라 생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