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천휴림으로 (1)
적유목이 목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없다고 삶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적유목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 줄은 알고 하는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군요. 적유목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안주하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선계로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준혁의 말에 여왕은 한참 동안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준혁에게 다시 한번 약속을 받아내고는 적유목을 가져가도 된다 허락했다.
“그대가 누구보다 약속을 소중히 하는 사람인 걸 알고 있으니 믿겠어요.”
허락이 떨어지자 준혁은 곧장 움직였다.
잠시 후, 적유목 앞에 도착한 준혁은 금빛 실로 거대한 나무를 감싸고는 그 안에 존재하는 정수만을 빨아들여 한곳에 모았다.
‘실로 대단하구나! 만약 태양지력을 다루지 못했다면 눈앞에 두고도 가져가지 못할 뻔했어.’
그리고는 착잡한 눈빛을 보내는 여왕을 무시한 채 구슬처럼 만들어 몸속에 보관했다.
여왕은 계면의 압박을 받으면서까지 외부로 나와 준혁을 지켜보다가, 적유목이 빛을 잃고 죽은 나무처럼 변하자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아냈다.
준혁은 그런 그녀가 안심할 수 있게 몇 번이나 확답했다.
“헌데 너무 정이 없는 건 아닌가요?”
“아, 그렇지 않아도 전해드리려 했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자 여왕이 실망했다는 듯 입을 열었고, 준혁은 그녀의 뜻을 파악하고는 아마르곤에 대한 얘길 풀어놓았다.
“아마르곤 수사는 지금 대황대륙이라 불리는 곳에서….”
“세상에…. 그가 그렇게….”
아마르곤이 삼경을 넘어 삼선중 규선에 이르는 길까지 닦았고,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몰라도 결국 그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랬기에 함께 오지 못한 것을 이해해달라는 말과 함께.
짧지만 강렬한 얘길 전해 들은 여왕은 감격해 마지않으며 이것저것 되물었고, 준혁은 그녀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최대한 빨리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는 아마르곤과 관련된 대화가 끝나자 작별 인사를 건넨 후, 버뮤다 삼각비경을 떠났다.
다음 목적지인 천년수가 자리한 눈꽃 비경으로 향해 움직였다.
***
눈꽃 비경에 도착한 준혁은 바람꽃을 찾아갔고, 다행히 그녀도 무사히 살아있었다.
‘산들의 수행을 보고 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완영기 초기에 머물고 있는 바람꽃이 동생에 대해 이것저것 묻자,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정말 그 아이의 수행이 그렇게 올랐다고요?”
믿지 못하는 그녀에게 산들바람의 모습을 담아 건네준 준혁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는 몇 시간 동안 꼬박 말 상대를 하다가 천년수로 향했고, 마찬가지로 나무의 정수만을 뽑아 몸속에 저장했다.
‘예전 생각이 나는구나.’
천년수가 품은 달의 기운이 모여들자, 오래전 나무 아래서 월광지력을 흡수했을 때가 절로 떠올랐다.
잠시 후. 오랜 기간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천년수 역시 생기가 빠져나가며 죽은 고목처럼 변했다.
준혁은 계획했던 일들이 마무리되자 바람꽃과 작별을 나누었다.
“수사, 언제가 될지 모르나 그때까지 잘 지내셔야 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부탁해요.”
완영기 주제에 삼경에 오른 산들바람을 걱정하는 바람꽃.
준혁은 동생 소식에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구에 오길 잘했다고 느꼈다.
그는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눈꽃 비경을 떠났고, 섬으로 돌아간 후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가족과 제자, 지인들과 밀린 숙제를 하듯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때가 되었다고 느낀 준혁은 아쉬워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태백산맥의 천제단으로 향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심해야 한다.”
그리고는 진심이 담긴 걱정을 남기고 왔던 곳으로 향했다.
비승할 때처럼 야단법석하진 않았지만, 하늘을 찢으며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콰르릉-
닿아있지 않은 계면에 억지로 틈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준혁이 머물고 있던 서봉산맥 상공은 망치로 깨부순 것처럼 균열이 가 있었고, 그 사이로 암흑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가는 균열 사이에서 어둑칙칙한 기운이 흘러나와 주변을 물들일 것만 같았다.
멀리서 그 현상을 며칠째 지켜보고 있던 두 여인의 심정은 그래서 편하질 못했다.
“별일 없으시겠죠?”
“그럴 거예요. 상공 수행에 겨우 하계면에 가는 일이 위험할 리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본체가 아닌 분신을 보낸 것이니…. 더더욱.”
걱정을 가득 담은 소화여의 혼잣말에 대답하던 조호랑은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사실 이어져 있지 않은 계면을 통과한다는 건 공간의 압박을 본인의 수행만으로 버텨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옛 구지대륙을 가득 채운 암흑기도 버텨내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보다 더 본질에 가까운 공간의 틈 안은 훨씬 더 위험했다.
분신이 잘못된다면 분명 본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니, 마냥 안전하다고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앗! 저기 봐요!”
그때, 소화여가 한곳을 가리키며 소릴 질렀고, 걱정을 떨쳐내지 못한 조호랑도 급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쿠르릉-
두 여인의 시선이 닿는 곳,
며칠 전부터 계속되던 하늘의 균열이 점차 범위를 늘려가고 있었다.
“돌아오려나 봐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기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쁨의 소리를 내었고,
번쩍-
그사이 균열에서 엄청난 빛이 터져 나오며, 달무리처럼 흐릿한 빛을 머금은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빠져나왔다.
빛을 머금은 무언가는 균열을 빠져나오자마자 수직으로 하강하더니 서봉산맥 정상의 한곳을 강타했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의 균열이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편, 서봉산맥 상공의 균열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간.
준혁은 하계면에서 돌아온 분신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식검을 급하게 눌러야만 했다.
“아직 아니다!”
분신이 복귀하자마자 그 안에 고이 봉인된 마선들을 향해 군침을 흘리는 식검.
다행히 사막의 유적 때와는 달리 식검은 준혁의 의지에 따라 안정을 취했고, 준혁은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하계에서 가져온 봉인을 해제했다.
파앗-
잠시 후, 봉인이 깨어지며 적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적매는 주변을 파악할 생각도 하지 않고, 깊게 숨을 들이켜며 행복한 표정을 했다.
두 날개 역시 기쁨에 겨워 촐랑거리며 퍼덕였다.
“흐읍! 이 얼마나 진한 영기란 말인가! 반신반의했는데 정말로 돌아오다니!”
준혁의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적매는 선계에 도착하자 감탄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수사 말에 진정 거짓은 없…. 허! 그것 또한 거짓이 아니었다니….”
그러다가 준혁이 은근히 퍼트리는 마선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수많은 마선들을 나열하며 모두와 계약관계라고 할 때만 해도 그 말의 사실 여부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했는데, 실제 마선기를 느끼자 떨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었다.
준혁은 그런 적매가 자신의 기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지켜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자,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적매 수사 차례입니다. 도움을 주신다고 했으니. 어쩌실 텝니까? 저와 계약을 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이번엔 수사와 함께하도록 하지요.”
준혁의 물음에 적매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스르륵-
그리고 적매에게서 긍정의 확답이 떨어진 순간, 어느새 그의 뒤로 검은 식검이 떠올라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우적- 우적-
식검은 적매와 장구수, 그리고 착화방까지 흡수하고 나자 그제야 꼬마아이의 모습으로 변하며 마선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행복한 듯 웃으며 마선들을 씹어먹는 식아가 괴기스러우면서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우선 흡수하고 난 뒤에야 먹어 치울 수 있구나.’
한 번의 되새김질이 끝나야 진짜 흡수를 할 수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준혁은 식아가 마선들을 먹어 치우며 일어나는 변화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우선 소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마선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삼지행을 비롯한 다양한 기운들 때문에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앞으로 계속 마선들을 흡수한다면 언젠간 자신의 주 기운이 마선기가 될 수도 있다 여길 정도였다.
다음으로 온전하게 소화되며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을 살폈다.
‘적매의 화기와 화괴의 힘이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할 수도 있겠어.’
적매의 권능은 화괴와 마찬가지로 화기를 다루는 능력이었는데, 화괴와는 조금 차이를 보였다.
화괴가 순수하게 불을 다루는 능력이었다면 적매는 둔술에 치중된 힘이었다.
불씨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는데, 다만 일반적인 불이 아니라 적매의 권능으로 만들어놓은 불씨여야만 했다.
미리 준비만 해놓는다면 엄청난 수단이 될 수 있었기에 만족의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효능이 좌우되겠구나.’
거리에 따라 권능에 사용될 힘의 크기가 결정되기에 무작정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반환점을 지정해놓고 돌아가는 용도로 사용한다면 엄청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듯했다.
생명을 대가로 사용하는 공천귀의 능력과도 일견 닮아있었다.
아쉬운 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불씨가 하나뿐이란 거였다.
만약 개수에 한계가 없었다면 전 대륙을 마음껏 옮겨 다닐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식아가 장구수를 먹어 치우기 시작하자 그가 가진 뇌둔술을 만끽할 수 있었고, 착화방에 이르러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식아가 착화방을 전부 먹어 치우고 만족한 얼굴로 몸속으로 들어가자, 준혁은 가만히 있어도 몸속으로 미친 듯이 밀려드는 영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바다와 같이 넓어진 준혁의 그릇엔 티도 나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사쿠라의 말대로 수행이 오르는 속도가 수십 배나 빨라져 있었다.
하지만 준혁이 진심으로 감탄한 건 수행 상승 속도의 향상 때문이 아니었다.
“가능할 거 같은데?”
천천히 착화방의 능력을 음미해본 준혁은 공간팔찌에서 적색의 나뭇가지 하나를 꺼냈다.
누군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다른 선사에게서 얻은 물건 중 하나.
공격형 최상급 법기임에도 딱히 쓰임새가 있지 않아 공간팔찌 한쪽에 처박혀 있던 물건이었다.
촤르륵-
법기를 손에 쥔 준혁이 혈단법을 일으키자, 그의 손끝에서 시작한 금빛 실이 법기를 완벽하게 감싸 금빛 실타래로 만들어 버렸다.
준혁은 그 변화를 천천히 관찰하다가 착화방의 권능을 사용하며 혈단법을 운용했고.
“역시! 되는구나!”
법기를 흡수하고 난 뒤, 준혁은 쾌재를 부르며 또 다른 법기를 꺼내 들었다.
착화방의 수행 속도를 향상시키는 능력.
그것이 준혁의 혈단법과 만나자, 흡수 속도와 효율을 말도 안 되게 상승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선에 오른 후 막막했던 앞이 안개가 걷힌 듯 환해졌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겨우 쓰지 않던 법기를 흡수하는 데 사용했지만, 다른 진선이나 그에 상응하는 것을 흡수할 기회가 생긴다면?
준혁은 그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효율로 그것들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고, 그건 다른 이들과 달리 여전히 빠르게 수행을 올릴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만약 다른 진선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을 정도의 기연과도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