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장어와 붉은매 (2)
준혁은 굳이 말을 돌려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가벼운 안부를 묻고 난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적매나 이글거리는포효 둘 모두가 반길 만한 제안을.
“오랜만에 만나 이런 얘길 꺼내는 게 예가 아님을 알지만, 우연히 두 분의 얘길 들었습니다.”
“......어디까지.”
“두 분 서로 계약 관계가 맘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 맞는지요?”
준혁의 물음에 이글거리는포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어느새 그의 머리 위로 나타난 적매도 입을 다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침묵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흥. 그대도 알 거 아닙니까? 세상에 딱 맞는 계약자가 어디 있답니까? 서로 맞춰가는 것이지.”
적매는 당연한 것 아니냔 듯 말했다. 그러면서 이글거리는포효를 살짝 곁눈질하자, 그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맞습니다. 원래 가까운 사이일수록 투덜대고 투닥거리는 거죠. 저희가 다툴 때도 자주 있긴 하지만 진심은 아닙니다.”
둘은 준혁의 질문에 담긴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부정부터 하고 보았다.
예전에도 준혁은 마선들의 정보를 캐고 다녔기에, 혹시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여기면서.
하지만 이어지는 준혁의 말에 둘 다 격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렇습니까? 만약 두 분께서 원하시면 계약 관계를 철회할 수 있게 도와드리려 했더니만.”
“그게 정말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동시에 외친 게 뻘쭘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준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웃으며 손끝에 우지의 기운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적매 수사께서도 아시지요? 우지의 능력을? 우연히 그의 힘을 얻게 되었는데, 원하신다면 두 분께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지? 그자와 계약했다고?”
“계약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비슷한 겁니다.”
적매는 준혁의 손끝에 모인 마선기를 느꼈는지 부르르 떨었고, 이글거리는포효는 그런 적매의 반응에 기쁨과 착잡함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어쩌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두 분의 계약을 철회해 드릴까요?”
이어지는 준혁의 물음에 적매가 이글거리는포효의 태도를 관망하다가, 시간이 흐르자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 이해 관계없이 우릴 돕겠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다만?”
“조만간 다시 선계로 돌아가야 하니, 그때 함께해주셨으면 합니다. 도움받을 일이 있을 듯하니 말입니다.”
선계라는 말에 적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좁은 비경이라도 탈출해보고자 했던 그였기에 광활한 선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악마의 속삭임이라도 되는 듯 달콤하게 들렸다.
적매는 준혁이 말한 ‘도움’이라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서, 선계로? 나를 데려다줄 수 있단 거요?!”
그가 놀라는 이유 역시 장구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준혁은 같은 설명을 전해주었다.
“해서, 그렇게 이동하시면 됩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적매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이글거리는포효를 마주했고, 둘은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포효. 너도 최 수사의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찌하겠느냐? 나와의 계약을 철회할 테냐?”
이글거리는포효는 적매의 마지막 질문에 그가 아닌 준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물어보시지요.”
“그 우지라는 자의 능력으로 계약이 깨지면…. 적매의 도움을 받아 상승한 제 수행은 어찌 되는 겁니까?”
재능이 없던 그는 적매의 도움으로 상승한 수행을 잃어버릴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만 아니라면 현재에 와서 구속이나 다름없게 변해버린 계약을 당장 해지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준혁은 그런 그의 심정을 파악하고 몇 가지 설명을 추가했다.
“크게 바뀌는 건 없습니다. 다만 적매 수사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기운만 회수될 뿐이지요. 수사가 가진 영기의 총량이 변하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결국 준혁의 입에서 가장 바라던 대답이 나오자 이글거리는포효는 적매에게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적매…. 그동안 투정만 부려 미안해. 내가 너를 품기엔 너무 부족했던 거 같아.”
“아니다. 처음부터 너와 상성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 욕심이었던 게지.”
잠시 후, 두 사람은 막상 헤어지려니 아쉬움이 남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속마음을 하나씩 털어놨고, 마지막엔 서로의 앞길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둘의 대화가 끝나자 준혁이 움직였다.
***
‘동화율이 최악이었군.’
우지의 권능으로 이글거리는포효의 몸속에 깃든 적매를 꺼낸 준혁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끝이 나자 허탈함이 밀려왔다.
진마족 수장인 자타에게서 아마르곤을 분리할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간단하게 일이 진행돼버렸다.
말 그대로 숨쉬기보다 쉬운 작업이었다.
“이게 끝인 겁니까?”
“정말 이런 게 가능하다니. 하하, 드디어 새 계약자를 맞이할 수 있겠어!”
막상 일이 진행되자, 이글거리는포효는 아쉬움이 남는 표정으로 적매를 바라보았고, 적매는 후련한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준혁이 은근히 적매 곁으로 다가가며 제안을 꺼냈다.
“계약자 얘기가 나와 하는 말인데. 적매 수사. 저는 어떠십니까?”
“응? 무엇이 말입니까?”
“새로운 계약자 말입니다.”
“최 수사와 말입니까?”
한참을 웃고 있던 적매는 준혁의 말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바라보다가, 그가 진심인 걸 알고 태도를 고쳤다.
“지금은 분신으로 헌신한 상태라 이리 보일 테지만, 제 수행이 낮지 않아서 말입니다. 저와 함께하시면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을 듯한데….”
적매 역시 몇몇 마선들과 마찬가지로 수행의 끝을 향해 가고 싶어 하는 부류였다.
그랬기에 준혁은 자신의 능력 일부분을 보여주며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수사께선 이미 다른 이와 계약상태이지 않습니까? 그가 허락하겠습니까?”
적매의 의문에 준혁은 거짓으로 꾸며볼까 하다가, 나중을 생각해 진실을 말해주었다.
물론 조금 돌려서, 하지만 거짓은 아니게.
“저는 조금 특수한 경우라 말입니다. 저와 계약하시게 되면 저와 동화되는 게 아닌, 제 분신으로 활동하시게 될 겁니다.”
“분신?”
“그렇습니다. 굳이 저와 동화될 필요 없이 본인의 몸으로 제 수행만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지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불편한 동화를 거칠 필요도 없이 꿀만 빨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 믿기지 않는 게 당연했다.
마선이라고 다른 생명체와 섞이며 하나 되는 게 즐거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들도 한 번의 계약을 마칠 때마다 계약자와 마찬가지로 버거워하는 건 똑같았다.
적매가 황당한 소릴 들었다는 듯 입을 벌리자, 준혁이 말을 이었다.
“물론 아직 제 능력이 부족해, 완벽한 자아를 가지고 분신으로 활동하긴 힘듭니다. 허나 이제 곧 그리 될 수 있다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준혁은 설명을 이어가며 분신 안에 깃든 분광소와 귀원패 삼청조 등, 다양한 마선의 기운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정말이란 말인가!”
그러자 적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고, 날갯짓을 하는 것도 잊고 휘청하며 흔들렸다.
“이들도 다 저와 함께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뿐 아니라 공천귀와 인지괴, 적지주 등 더 많은 이들도 말입니다.”
혹시 몰라 적마의 이름은 배제한 준혁.
잠시 후, 놀란 부리를 다물지 못한 적매는 고민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겼고, 준혁은 그런 그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었다.
일반적으로 두 명의 마선이 한 계약자와 동시 계약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토록 많은 자들이 함께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 말인즉 준혁의 말이 거짓은 아닐 거란 뜻이라 적매는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계약자의 능력을 나눠 가져야 하는 입장에서 절대 다중 계약을 하진 않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준혁은 적매가 바로 수락하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임에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선계로 가기 위해선 계속 함께해야 했기에, 설득할 시간은 많다고 여긴 것이다.
한편, 자신과 적매의 계약 관계를 깨자마자 그를 포섭하려는 준혁의 태도에, 이글거리는포효는 자신이 속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 실수한 건 아닌가? 다시 계약을 되돌려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한번 지나간 선택은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을.
준혁이 적매를 설득하려는 모습에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가 하고 고민하는 그와 달리, 적매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
모호한 표정으로 배웅하는 호왕족 수사를 뒤로한 채, 준혁은 적매와 함께 비경의 출구로 움직였다.
비경의 결계는 인족만을 통과시켰기에 적매는 장구수처럼 법기 형태로 변해 준혁 안에 숨어야 했다.
잠시 후, 적매를 숨긴 준혁은 비경 밖으로 나와 목족의 대지를 향해 날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족의 여왕을 마주하게 됐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최 수사…. 드디어….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요?”
준혁의 등장에 여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대에 찬 소리를 냈다.
그녀가 어째서 그러한지 알고 있는 준혁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아직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통로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리곤 실망한 표정을 하는 여왕을 향해 씨익 웃으며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목족의 태양이라는 적유목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적, 적유목을?”
적유목과 천년수.
목족의 대지에 자리한 적유목과 눈꽃 비경에 존재하는 천년수.
태양과 달의 기운을 담은 두 나무는 하나라도 있다면 소천경에 올라가기 쉽게 도와주는 단약의 재료로 쓸 수 있었다.
그랬기에 선계에 올라왔을 초기에 나무의 정보를 알고 있단 이유로 준혁이 공격을 받기도 했었다.
이미 선계는 물론이고 선계와 맞닿아 있는 다른 하계면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기에 그 가치가 작지 않다고 말할 만한 물건이었다.
다만 준혁에겐 딱히 가치가 없었고, 지구의 지인들이 훗날 선계에 올라올 때를 대비한다 해도 크게 쓰임새가 있진 않았다.
왜냐하면 준혁의 수행에 물심양면으로 돕는다면 누군들 소천경 정도는 올라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혁이 목족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적유목을 욕심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명왕에게 명왕지보를 건네주고, 고마움을 표하겠다며 이것저것 알려준 그에게 얻은 비술.
진선에 오른 수사가 수행을 올리다 막혔을 때, 정체를 돌파하게 도와줄 비술 때문이었다.
오직 몇몇 영수족에만 전해지던 비술 중의 비술. 그것을 익히는 데 적유목과 천년수의 정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나무 일부가 아닌, 온전한 나무 전체가.
현재 준혁의 수행이 막힌 건 아니었지만, 미리 준비해둬 나쁠 건 없었기에 말을 꺼낸 것이었다.
“적유목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이곳으로 통로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듯한데. 어떠십니까?”
수행이 오를수록 하계로 만들 통로를 견고히 할 수 있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