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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55화 (355/408)

355화. 장어와 붉은매 (1)

“정체를 말하랬더니, 또 말을 돌리는군. 그리고 계약이라고? 흐음. 별로 내키지 않는데?”

뇌전을 뿜는 장어가 몸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잠시도 고민하지 않은 걸 보면 당분간은 새로운 계약자를 찾지 않으려는 듯했다.

‘하긴 그랬으니 제이엘이 떠나고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던 것이겠지.’

지구에 영기가 충만해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마선과 수사가 완벽하게 동화되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시간.

그랬으니 제이엘의 죽음에 심적 충격을 받은 건 아닐 터였다. 아마도 귀원패처럼 만사가 귀찮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컸다.

당장 식검이 없는 준혁은 상대를 잘 구슬려 보려 입을 열었다.

“제 정체가 알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계약하고 나면 동화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레 제 기억과 모든 걸 알 수 있을 텐데. 어떠십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 지금은 분신인 거 같은데? 계약은 어떻게 하고?”

“당연히 선계로 올라가서 진행해야지요.”

“그럴 능력은 되고?”

비승할 때 다른 이들을 데려갈 수 없듯이, 마선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되기에 마찬가지였다.

장어는 그걸 물었고, 준혁은 대답하기 전 손끝으로 반투명한 구슬을 만들어냈다.

“꼼수를 쓰면 가능하지요. 당분간 법기 상태로 돌아가 계시면, 제 안에 봉인시킨 채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불가능했지만, 법기는 상관없었다.

준혁의 제안에 장어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며 무언갈 계산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길 한참 후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좋다. 다음 상대로 너를 선택하지. 대신 너도 제이엘처럼 나와 약속을 해야 한다.”

“말씀해 보시지요.”

“수행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최우선은 뇌둔술의 극의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걸 위해 노력한다 맹세하거라.”

“어차피 동화된다면 뜻대로 이뤄질 텐데 굳이 그런 약속이 필요합니까?”

준혁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마선과 계약하면 마선이 수사이고 수사가 마선이 되고 만다. 기억과 의식은 자연스럽게 하나 되기에 둘 중 누가 진짜 의식의 주인인지 판별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그랬기에 준혁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느 세월에 그걸 기다린단 말이냐? 특히 내 기운은 인족이 받아들이기엔 적합하지 않다. 해서 동화율도 엄청나게 떨어지는 편이지.”

‘아….’

장어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제이엘이 뇌둔술을 사용하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계약자임에도 준혁처럼 마선을 소환한 후에야 능력을 사용했었다. 그게 동화율이 일반적인 상태보다 떨어졌기에 그랬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뇌둔술의 극의라….’

예전 제이엘이 사용하던 술법을 떠올린 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고갤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가진 힘은 변환에 자유로운 편이었기에, 뇌둔술을 익히는 데 제약이 없었다.

그러기에 굳이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수행이 올라감에 따라 자신의 뇌둔술도 역량이 강화될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약속하지요.”

“좋다.”

준혁의 입에서 약속이란 단어가 나오자, 장어는 여전히 찜찜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움직여 미꾸라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마치 생명이 없는 물건처럼 준혁에게 날아왔다.

촤르륵-

직후, 준혁의 손끝에서 퍼져나간 금빛 실이 미꾸라지 형상의 인형을 감쌌고, 그것은 실타래처럼 변해 준혁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식검을 이용해 흡수하고 나면 약속이란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준혁에게 종속된 채 자아를 잃어버리기에 약속을 지키는지 아닌지 당사자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마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식아가 마선기록방을 흡수하며 한 단계 변화를 겪을 때, 준혁은 다음 단계를 어느 정도 예상했었고, 그랬기에 마선들을 대함에 거짓이 없이 행동하려 노력했다.

특히 만통방을 통해 마선들을 만난 후, 그들이 자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장구수를 체내에 봉인시킨 준혁은 영력을 움직여 제이엘의 시신을 밀봉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공간대 안을 가볍게 확인하고는 석실을 나섰다.

***

제이엘이 잠들어 있던 석실을 나선 준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생전에 머물던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누군가 머무는 인기척도 느껴졌다.

잠시 후, 준혁이 퍼트린 인위적인 파동에 금발이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준혁을 발견하고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와 허릴 숙였다.

“나를 본 적이 있으시군요.”

“한국의 최준혁 수사님 아니신가요? 예전에 멀리서 본 적이 있어요.”

금발여인은 준혁이 비승할 때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고,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나 당황하는 중이었다.

잠깐의 대화를 이어가자, 그녀가 제이엘의 사촌 동생이고 연락이 닿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는 중인 걸 알게 됐다.

‘마침 잘됐군.’

이곳에 오면 제이엘의 제자나 혹은 그에 준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란 생각에 방문했던 준혁은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굳이 사실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영력으로 밀봉한 제이엘의 시신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동시에 그녀의 공간대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어, 언니!”

준혁이 제이엘을 꺼내자, 그가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한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던 금발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를 받았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준혁의 말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비경에서 상처를 입고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기에, 옛 우정을 생각해 그녀를 데려온 것입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보내주길 바랍니다.”

“예, 치료를 위해 이곳보단 영기가 짙은 곳으로 간다 하여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수사가 죽으면 그 혼백은 환생을 통해 다른 몸으로 태어난다.

이미 적지주를 통해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준혁은 제이엘의 죽음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하지만 지구에서 환생이란 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의견이었고,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장례문화도 여전했다.

준혁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했다고 여긴 금발여인은 눈물을 멈추고는 준혁을 향해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깊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해요. 가끔 언니가 최 수사님에 대해 좋은 얘길 했었는데. 듣던 대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몰랐다면 모를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럼, 이만.”

잠시 후, 거듭 감사를 표하는 금발여인을 뒤로한 채 준혁은 하늘을 갈랐다.

다음 목적지인 호왕족이 위치한 곳을 향해서.

***

백두 비경 안, 호왕족의 거주지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 깊은 곳.

그곳엔 직경 십여 미터 정도 되는 동굴이 있었고, 동굴의 끝엔 붉은 공동이 존재했다.

부글부글-

붉은 공동 한쪽엔 붉은 호수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물이 아닌 용암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으으…. 괴로워.”

“참아! 겨우 이깟 것도 참지 못해서 내 화기를 어떻게 견디려고 그래!”

그곳엔 머리에서 어깨까지만 하얀 털이 나 있는 사내가 있었고, 그자는 용암 호수에 한 손을 담근 채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너무 괴롭단 말이야. 처음부터 우리 호왕족은 바람의 일족을 숭상했단 말이야.”

그러니 종족의 특성과 어울리지 않는 화기는 버티기 어렵다는 말.

“변명하지 마! 처음부터 그걸 몰라서 나랑 계약한 거야? 알고 있었잖아?”

“......그건.”

“강해지고 싶어서! 너를 무시하는 놈들을 이기고 싶어서 나와 계약했으면 군말 없이 버텨내야지!”

퍼드득-

어느새 사내의 머리 위에 나타난 붉은 새가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사내의 머리를 쪼았다.

“아, 알았어! 한다고!”

“명심해! 난 약속대로 네 수행이 오를 때까지 내가 가진 지식을 전부 전해주었어.”

“알았어. 또 얘기 안 해도 알고 있다고.”

호왕족 사내는 현재 완영기까지 오른 상태. 그의 눈부신 발전은 전부 붉은 새 덕분이었다.

“언제까지 이 좁아터진 비경 안에만 머물 거야? 어? 이곳에 펼쳐진 결계가 영수들을 억압하는 것 같은데, 나와 절반 이상의 동화만 해낼 수 있다면 아마 저항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말이야. 그러니 너도 나와의 약속을 지켜!”

붉은 새는 가끔 부락을 방문하는 인족들처럼 백두 비경을 벗어나고 싶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계약자를 쪼아대고 있었다.

“에잉! 왜 처음부터 너와 계약을 해서는.”

“...미안.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사내는 머리를 쪼는 새를 노려보다가 결국 체념한 듯 양손을 용암에 가져갔다.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는데,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해가 지날수록 자신을 구박하고 타박하는 붉은 새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감이 계속 쌓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상대방이 원하는 경지는 더욱더 요원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이건 내 실수야. 대신 너도 예전처럼 최선을 다해줘. 그놈들에게 복수한 뒤로는 좀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잖아.”

“알았어….”

같은 부족의 수사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괄시당하던 사내는 붉은 새의 도움으로 시원한 복수를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복수는 짧고 수련의 고통은 길었다.

‘그땐 최고의 기연이라 여겼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그딴 생각할 거면 당장이라도 계약을 때려치우든지! 죽으면 깔끔하게 해결될 거 아니야!”

속으로 투정 부리던 사내는 이어지는 새의 말에 뜨끔해 하며 인상을 구겼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쉽고 편하기만 한 일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었다.

쿠르릉-

그때, 지상으로부터 강렬한 기파가 전달되더니 용암이 호수를 넘어 넘치기 시작했다.

“어? 어? 이게 무슨 일이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상에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위다.”

“어?”

“위에서 누가 우릴 부르는 거라고.”

무언갈 눈치챈 듯, 붉은 새가 날개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먼지처럼 흩어지며 사내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이 기운은 분명 그자야. 가보자!

“어? 어….”

새의 지시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사내는 용암에서 손을 꺼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번쩍하며 동굴로 쏘아져 나갔고, 이내 기척을 감추었다.

잠시 후. 길고 깊은 동굴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온 사내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사내는 반듯한 외모에 차가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오래전 선계로 비승했다고 알려진 수사였다.

“최, 최준혁 수사?”

지하에서 올라오는 도중 이미 붉은 새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이었지만 사내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신색을 바로 할 수 있었고, 급하게 위엄을 갖추며 점잖게 말을 꺼냈다.

“역시 수사셨습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 모습에 준혁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미 지하에서 오고 간 대화를 전부 들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지만, 전혀 티 내지 않으면서.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글거리는포효 그리고 적매 수사.”

그러면서 오래전 귀원패가 세상을 등지고 싶다며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선과 계약자가 서로를 배척하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든 것보다 괴롭다고 하더니…. 딱 그 모양새구나.’

이글거리는포효는 예전보다 월등히 강해지고 수행이 올라있었지만, 수척한 얼굴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말해주고 있었다.

완영기 정도 되면 몸의 피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쉽게 유추 가능했다.

‘잘됐구나. 이러면 쉽게 설득할 수 있겠어.’

어느새 준혁의 두 눈엔 마선과 계약자를 분리할 수 있는 우지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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