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무명(無名) (3)
자신의 고생을 알아달라는 듯 한껏 뽐낸 무명이 라후지의 물건들과 옥간 하나를 건넸다.
옥간 속 위치는 혈수림의 특정 장소를 표시하고 있었다.
‘혈수림이라고? 참으로 공교롭구나….’
이곳에 오기 직전 중괴가 마선들을 이끌고 혈수림을 정리하고 있단 소식을 들었기에, 준혁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마 적마의 창고가 아니라, 대라멸진 때문에 그곳을 정리하는 것이란 말인가?’
적마의 창고는 ‘있을지 모른다’였고, 대라멸진은 ‘있다’였다.
그러니 무게는 대라멸진에 쏠렸다.
천신라를 상대하는데 대라멸진이 비장의 수로 작용할 수 있었고, 자신이 그걸 구할 거라고 짐작했기에 미리 혈수림을 정리하려 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고개가 저어졌다.
‘아니야. 만약 내가 수행을 안정시키는 사이 대라멸진의 장소를 알아냈다면 나에게 언질을 주었겠지.’
두 번이나 전언을 남기면서 대라멸진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하긴 진실은 후일 그를 만나면 알 수 있겠지. 중요한 건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
무명이 알아낸 사실로 인해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진실이 무엇인지는 판별할 수가 없었기에 불필요한 고민을 접어버렸다.
방문하기 꺼려졌던 혈수림의 상황이 자신에게 이롭게 변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저어…. 제가 실수한 것이라도?”
“아니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랬네. 수고했어. 덕분에 중요한 일을 해결할 수 있겠어.”
준혁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무명이 조심스럽게 물러나자, 준혁은 그를 치하하며 또 다른 얘길 꺼냈다.
“한 가지 더, 자네가 해결해 줬으면 하는 문제가 있는데.”
“...제 원칙은 한 가지 부탁만 이뤄주는 것이지만, 적지주 수사에게 진 빚도 갚아야 하니. 말씀하시지요.”
지기 싫다는 듯, 자신이 돕는 이유를 말하는 무명의 모습이 그의 평소 성격을 말해주었다.
“내 가까운 이에게 들어보니 자네가 전송진을 다루는데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 하더군.”
“대륙 간 전송진 말씀이십니까?”
“아니, 뇌명숲 경계에 새로 생긴 태왕문이라고 아는가? 그곳과 묘립성을 잇고 싶은데. 혹 가능하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묘립성에서 태왕문으로, 태왕문에서 흑석대륙으로 잇고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뇌명숲은 전송진이 통과하지 못했다.
‘우선 태왕문까지만 길을 뚫어놓으면….’
그 후에 다시 무명을 데려다가 흑석대륙을 관통하는 전송진을 설치할 생각이었다.
대륙이 너무 넓다 보니 이동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게 너무 아까운 준혁의 계획이었다.
훗날 지구와 통로를 만들고 난 후의 일까지 고려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무명은 잠시 계산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태도는 시큰둥했다.
“가능합니다. 다만….”
“다만?”
“다만, 설치는 가능하나 그에 필요한 재료는 준비해주셔야 합니다.”
애초에 이럴 가능성을 고려했던 준혁은 바로 수긍했다.
“말해보게. 재료를.”
“우선 성인 머리만 한 공간석 여덟 개 정도가 필요하겠고…. 전송석도 하나 필요합니다.”
성인 머리만 한 공간석이면 하나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전송석이란 말을 처음 들어보았기에 준혁은 그것에 관해 물었다.
“전송석이 무언가?”
“전송석은 공간의 좌표를 새길 수 있는 특별한 영석인데….”
무명이 자신의 지식을 뽐내듯 전송석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핵심만 말하자면 특정 공간에 대한 위치를 새겨넣을 수 있는 영기를 품은 돌이었다.
그것은 공간석보다 귀했고 언젠가부터는 아예 찾아보기도 힘들다고 했다.
“어째서 나는 처음 들어보는 거지?”
“당연한 일입니다. 구할 수가 없으니 아는 자들도 드물지요. 공간석이 귀하다고는 하나, 전송석만 구할 수 있었다면 대륙의 모든 종문들이 전송진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을 겝니다.”
각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중요 성들이 전송진을 설치한 거점으로 시작한 걸 보면 무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전송진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면, 거대 종문이라 일컫는 모든 곳이 전부 장거리 전송진을 보유했을 것이다.
“단거리 전송진이라면 공간석만으로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 겝니다.”
“흐음...”
단거리 전송진이라면 최장 거리가 겨우 100킬로 전후였다. 공간석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얼마나 많은 곳을 유지 관리해야 할지 모르기에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었다.
‘공간 좌표라….’
무명의 말에 문뜩 생각나는 것이 있어, 준혁은 공간팔찌에서 초극영석 하나를 꺼냈다.
‘그렇게 구하기 어려운 것인데 주요 거점엔 대부분 전송진이 존재한다. 공간팔찌가 공천귀의 능력을 모방했다고 하던데, 혹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공천귀의 권능을 이용해 영석에 힘을 부여했다.
‘공간 좌표라 함은 특정할 수 있는 공간을 한점에 응축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전송진으로 이동될 때 십여 명의 사람이 설 수 있는 공간 정도의 크기. 딱 그 정도의 공간을 초극영석에 담았다.
화아악-
잠시 후, 공천령의 모습으로 팔목에 자리하고 있었던 시절의 파동을 간직한 초극영석이 만들어졌고, 준혁은 그것을 무명에게 던져주었다.
“확인해보게.”
준혁의 행동을 보고 있던 무명은 초극영석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곤 잠시 후 경악이 담긴 소릴 내질렀다.
“세상에!! 선사, 아니 선사시여! 이게, 이게 어찌 이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준혁이 건넨 초극영석을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안아 든 무명은 자신의 관념이 무너진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영석을 어루만졌다.
“전송석을 만들 수 있다니….”
그리고는 바닥에 털썩 부복했다. 마치 소우자가 충성을 맹세했을 때처럼.
“선사시여! 제 평생의 숙원이 계면 간 전송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부디 제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계면 간 전송진을 만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재료가 들어갈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애초에 그걸 계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험하고 관측을 하려 해도 시작할 재료조차 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송석은 수사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져버렸을 정도로, 언젠가부터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꿈을 저버렸던 무명에게 희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
제자로 받아달라는 무명의 부탁을 한사코 거부하자,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나섰다.
그 첫 번째가 묘립성에서 태왕문으로 이어지는 전송진을 도맡아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준혁에겐 공간석만 구해달라 부탁하면서.
“제자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전송석을 제공해주시기만 한다면, 명하시는 어떤 것이라도 하겠습니다! 선사시여!”
무명의 처절한 외침을 뒤로한 채 준혁은 계면 간 전송진에 대한 화두에 사로잡혀있었다.
다른 계면과 달리 지구는 완전히 독립되어 떨어져 나가 있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전송진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무명이 그걸 이뤄낸다면, 지구에 설치는 하지 못하더라도 응용은 가능할지 몰랐다.
애초에 무명 같은 다재다능한 고위수사가 자신을 돕는다고 했을 때부터 두 팔 벌려 환영할 생각이었던 준혁은 시간을 끌다 못 이긴 척 그를 받아주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가진 비술의 특성상 일반 영석은 그 힘을 견딜 수가 없네. 그러니 그대가 초극영석을 구해오면 원하는 전송석을 만들어주겠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대신 이 일에 대한 모든 것을 함구해야 함은 당연하고, 그대에게 금제를 걸 테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무명의 진심이 어쨌든 간에 처음 본 자를 그냥 믿을 수는 없는 법. 준혁의 처사는 당연하였다.
준혁의 제안에 무명은 잠시간 고민에 빠지는 것 같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고 몸을 숙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의욕을 잃고 이곳에 자리한 이유가 무엇인데 그걸 마다하겠습니까! 하겠습니다.”
이어진 무명의 말은 그의 삶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처음 수도계에 입문했을 때부터 진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관련된 공법을 익히며 수행을 쌓아갔다.
그 후, 자신의 의지를 천명할 수 있는 소천경에 이른 후부턴 본격적으로 진법의 끝이라 하는 전송진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송진을 만들 재료가 없었기에 이미 만들어진 진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고, 더 위대하고 인정받는 진법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지쳐가고 말았다.
그러다 대천경에 오른 후 삶이 덧없다고 여기고, 모든 걸 내려놓고 주운대륙에 숨어들었다.
그 후론 스스로 이름을 없애고, 선기를 두는 것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선기 안엔 세상 모든 진법의 이치가 담겼다나 뭐라나.
“좋군, 앞으로 잘 부탁하네.”
구구절절하지만 딱히 동감할 수 없는 무명의 과거사에 준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준 후 손끝으로 그의 심장을 가리켰다.
푸슉-
그러자 손끝에 삼지행이 맺히며 무명의 심장을 파고들었고, 그의 심장 한쪽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영근을 가진 자에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삼지행이.
***
“자네 말은 천휴림으로 가라고?”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천휴림은 공간 관련 법기와 물건들을 모아왔습니다. 아마 공간석을 구하기 가장 쉬운 곳이 그곳일 겁니다.”
일을 마치고 떠나려는 준혁에게 무명은 몇 가지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곳이 아니라면 선마궁이 다음일 것이고. 두 곳을 방문하시기가 꺼려지신다면 천운대륙….”
공간석을 많이 보유하고 있을 거라 생각되는 목록부터 시작해, 대륙 곳곳의 가장 큰 영석 광산과 가끔 채광되는 공간석의 발굴 장소를 대략적으로 알려주었다.
그 양이 워낙 방대해 준혁은 결국 옥간에 정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더 할 말이 남았나?”
“제 본명은 제무무(諸無霧)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 소개도 안 했군, 나는 최준혁이라 하네.”
“이걸 받아주십시오.”
자기소개를 마친 제무무가 옥패 하나를 건넸다. 적지주에게 받아 제무무에게 넘겨주었던 그의 명원패였다.
“앞으로 한뜻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응당 드리는 게 옳다고 여겼습니다.”
“자네 행동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 이건가?”
“그런 의미가 없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준혁은 당당한 제무무의 태도에 피식 웃고는 그의 명원패를 챙겼다.
그리고는 그에게 조호랑과 소화여를 소개한 후, 비행 법기를 꺼내 올라탔다.
“믿고 맡기라 하니 기다리겠네. 준비가 되면 대화성으로 사람을 보내게나.”
잠시 후, 가볍게 작별 인사를 나눈 그는 하늘을 가르며 사라졌고, 제무무는 그런 준혁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 눈엔 욕망이 불구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두고 보십시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계면 간 전송진을 완성하고 말 테니!”
***
제무무를 떠나온 준혁이 뇌명숲 방면으로 비행법기를 움직이자, 조호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도자들에게 100년은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그토록 오래 대황대륙을 떠난 적이 없던 그녀였기 때문에, 숲이 그리운 것이었다.
“근데, 명왕은 무슨 일로 만나시려 하나요?”
준혁이 향하는 곳이 백랑족이 아닌, 봉황족이었기에 조호랑이 물었다.
준혁은 별것 아니란 듯 허리에 매여진 영수대를 툭툭 건들며 대답했다.
“명왕에게 전해줄 물건도 있고, 여기 이놈들도 맡기려고 하오.”
“맡기다뇨? 설마?”
조호랑이 의도를 눈치챈 듯 화들짝 놀라자, 준혁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짐작하시나 보구려. 그렇소. 예전에 방문해보니 봉황족의 금지가 수련하기 딱 좋아 보이더군.”
출입이 불가능한 구조인 것도 마음에 들지만, 그 안에 배치된 화정이 가장 큰 이유였다.
주작의 화기를 이어받아 사신결을 익힌 산들바람에겐 지상 최고의 수련 장소라 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아이들만 맡기고 나면 바로 떠나실 건가요?”
“그래야지. 천운대륙으로 넘어가 천휴림으로 향할 것이오. 그리고 나서 중림으로 가야겠지.”
원래 일순위는 대라멸진이었지만, 가는 길에 천운성이 있었으니, 그곳에 먼저 들를 작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제무무의 의견대로 공간석을 구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선마궁을 상대할 동맹을 찾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새 준혁의 손엔 대막리가 주고 간 패가 들려있었다.
“먼저 초대했으니, 박하게 대하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