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무명(無名) (2)
“벌써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중괴와 주서령이 잡혀간 마당에 준혁이 가만있지 않으리란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대화성으로 복귀한 지 며칠 만에 떠나려고 하자, 소우자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말리고 나섰다.
그들이 보았을 때, 중괴나 주서령 둘 다 안전을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제 막 수련을 마치고 온 준혁이 휴식을 취하길 바란 것이다.
“내 사람이 잡혀갔는데 어찌 휴식을 취하겠는가?”
하지만, 준혁의 성격상 절대 가만히 있을 순 없는 상황. 그는 떠날 채비를 마쳤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저도요.”
그때, 조호랑과 소화여가 함께하길 원했고, 준혁은 몇 번의 만류 끝에 그녀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직후, 소우자에게 삼청조 한 마리를 건네고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한 후 전송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게.”
“주군, 적루주 일은?”
“그녀에 관한 건 알아서 처리하시게. 지금 내가 나서는 건 힘들 듯하니.”
적루의 루주가 준혁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있긴 하나, 그녀를 믿을 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준혁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다른 세력에 소식이 전해질 수도 있었기에, 그녀를 찾아가 경고하려 했던 준혁은 그 일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관리하기 힘들면, 반대로 대화성 수사들을 관리하면 되지 않겠나?”
“그 말은….”
“적루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묘립성으로 보내버리게. 대신 묘립성의 여수사들을 이곳으로 부르면 되겠지. 그 후에 생길 일은 다른 힘을 가져다 쓰고.”
여수사라면 남자들에 비해 적루로 인해 정신이 해이해질 일은 없었다.
“명심하게. 성주는 자네라는 걸. 과하다 싶은 일도, 필요하다면 과감히 처리하게. 내 눈치 따윈 볼 필요 없으니.”
최근 들어 준혁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대화성 최고 수행인 적루주 교호홍이 안하무인 행동하기 시작했고, 소우자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준혁에게 물었었다.
적루가 수행을 올리는 주된 방법이 남녀의 교합이었으니, 준혁의 말은 그걸 원천 차단하란 뜻이었다.
그 후에 만약 교호홍이 그걸 문제 삼아 무력을 사용하려 하면, 또 다른 동맹인 청심문의 청교장을 데려다 쓰란 말이었다.
대천경 수사인 소우자 입장에선 진선들을 오라 가라 할 수 없었지만, 준혁은 눈치 보지 말고 일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대의 결정이 내 결정이네. 그리고 이걸 받게.”
소우자가 감격한 눈빛으로 옥간을 받아들자 준혁은 두 여인과 함께 전송진으로 올라섰다.
“청교장은 다른 이와 달리 믿을 만하니 내 전언을 전하게. 그럼 그대의 손발이 되어줄 테니.”
얻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작은 이익 때문에 쉽게 배신하지 않았다.
파앗-
잠시 후, 전송진이 발동되며 준혁과 두 여인이 모습을 감추자, 소우자는 텅 빈 진법 위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아무도 없는 빈 전송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준혁을 배웅했다. 진심을 담아.
***
전송진을 통해 묘립성에 도착한 일행을 곧장 성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묵묵히 준혁을 따르던 조호랑은 한 달이 넘게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는 준혁에게 질린다는 듯 말을 꺼냈다.
준혁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내가 그걸 말해주지 않았구려. 무명 수사를 찾아가는 길이오.”
“무명?”
“선기(仙棋)를 둬, 이기는 자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대천경 수사예요.”
조호랑의 반문을 소화여가 답하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그렇소. 어르신과 주 소저를 천신라에게서 데려오려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당장 수행을 올릴 수 없으니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는 힘을 찾는 게 우선이라 판단했소.”
“무명 수사를 직접 부리려는 건 아닐 테고? 다른 목적이 있나요?”
조호랑의 물음에 준혁은 라후지에게서 얻은 정보를 공유했다.
“이건?”
“36방 대라멸진이 있는 장소로 의심되는 곳이오. 다만 내 능력으론 위치를 알 수 없으니 무명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오.”
소화여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관심을 보이지 않자, 조호랑은 첫째인 자신이 뒤처진다 여겼는지 입을 쌜룩거렸다.
“저만 모르고 있었네요.”
준혁은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고는 혹시 그녀가 놓치고 있을 만한 얘기들을 몇 가지 더 해주었다.
그러는 사이 비행법기는 주운대륙 북쪽 끝에 다다랐고, 준혁은 적지주의 능력을 이용해 무명의 위치를 파악했다.
‘예전엔 멋모르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었지.’
전왕문을 상대할 때를 떠올린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한참 후, 평범한 언덕 위 초라하게 세워진 오두막집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는 오두막집.
준혁은 집 안에 머무는 이가 느낄 수 있게, 가벼운 기파를 날리며 마당에 내려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오두막 문이 열리며 매서운 눈썹을 가진 중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 사내는 준혁을 본체만체 지나치더니 마당 한쪽에 서 있는 나무 아래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바닥을 퉁- 하고 가볍게 밟자, 바닥에서 돌로 된 평상이 솟아올랐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직후, 품속에서 나무판 하나를 꺼내 올려두고는 말없이 준혁을 바라보았다.
마치 ‘뭐 하냐? 안 오고?’라는 눈빛으로.
준혁은 상대의 그런 행동에 피식 웃고는 말없이 평상으로 다가가, 상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하무인인 상대의 태도에 중괴의 말을 떠올리며.
‘대천경 수사에게 부탁하는 이들은 그보다 수행이 낮은 게 당연하다 했었던가?’
상대는 수많은 이들의 부탁을 받는 입장이었으니, 자신도 그런 부류의 수사로 여기는 게 어쩌면 당연하긴 했다.
그리고 진짜 부탁을 하러 온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수행은 다른 이들과 달랐지만.
“규칙은 알고 있겠지? 단판.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지니 신중하시게. 나를 이긴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 테고, 진다면 그댄 이름을 내놓아야 하네. 물론 그대가 이길 가능성은 없겠지만 말이야.”
무시하는 눈빛으로 마주 앉은 준혁을 훑은 사내는 가볍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내 오랜 경험으로 보자면, 여인네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놈치고, 제대로 된 자가 없었으니까.”
엉겁결에 주렁주렁한 처지가 돼버린 조호랑과 소화여. 그녀들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다가 준혁 가까이 이동했다.
준혁은 그런 사내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많으시군요. 수사께선 입으로 선기(仙棋)를 두시나 봅니다.”
“뭐? 흣. 오래 살다 보니 부탁하러 와서 뻗대는 놈도 있군. 하긴. 이기기만 한다면 태도 따위야.”
중년의 사내, 무명은 준혁의 태도가 의외란 듯 피식 웃더니 선기판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판 위로 생동감 있는 병사들이 올라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들썩거렸다.
‘이런 식이었군.’
범인들의 놀이인 장기(將棋)와 비슷한 선기였지만, 무명이 꺼낸 선기판 위 말들은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롯이 의지로 움직여야 했기에, 수행이 낮으면 처음부터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먼저 시작하시게, 선수는 양보하지.”
무명은 선기를 즐기는지 승부의 시작을 알리며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어쩌면 말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를 구경하는 게 즐거운 건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준혁은 그런 그를 향해 가벼운 미소로 응대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말 하나가 자연스럽게 걸어가 위치를 이동했고, 그 순간 무명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의 몸도 앞으로 조금 당겨졌다.
“흐음, 이거 내가 고수를 몰라봤군.”
고수라는 말이 수행을 의미하는지, 선기 실력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했지만. 무명은 긴장한 듯 장난스러운 모습을 지우고 승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로의 말이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숫자를 줄여가던 중.
준혁은 말을 움직이려다가 속으로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대놓고 꼼수를 부리려 하다니,’
의지를 움직여 말을 이동시키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위에서 누른 것처럼 말이 무거워진 것이다.
‘먼저 시작했으니, 딴말은 못 하겠지?’
어렵지 않게 그 이유가 상대의 방해임을 알아차렸고, 준혁은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으음….”
잠시 후, 다음 수를 진행해야 할 무명이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준혁이 비웃듯 입을 열었다.
“선기 두시는 분 어디 가셨나.”
***
준혁이 상대의 말을 움직이지 못하게 의지로 묶어버리자, 무명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등거리기만 했다.
그 후로도 무명은 침묵하며 말을 바라보기만 했고, 결국 두 손 들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한 건지 얼굴 가득 불만을 드러내면서.
“제가 졌습니다. 혹, 선사시옵니까?”
표정과 다르게 말투는 어느새 공손해져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 변화에 준혁은 피식 웃으며 선기판 끝을 손가락으로 툭 건들었다.
부르르-
그러자 선기판 위 병졸들이 질서정연하게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마치 전쟁을 치르는 군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나뉘어 치고받으며 실제 병사라도 된 마냥 격렬하게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혁의 진영에 속하는 말들만 남기고 전부 처참하게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재밌군, 앞으로도 종종 즐겨봐야겠어.”
“......”
준혁이 보인 일이 놀라웠는지, 무명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가 꺼낸 선기판은 영보로 이름 높은 법기였고, 그 위 말들을 조종하는 건 엄청난 심력을 소비하는 일종의 수련이었다.
그런 것을 하나가 아닌 수십 개의 말들을 동시에 움직였으니, 무명 입장에서 준혁은 괴물로 보일만 했다.
단지 수행이 높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제가 졌으니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무명은 조금 전보다 더 공손해져 있었고, 아까와 달리 진심이 묻어났다.
“그 전에 이걸 보겠나?”
준혁은 그런 그에게 작은 옥패 하나를 꺼냈고, 옥패를 건네받은 무명은 다른 의미로 놀라워했다.
“이건 제가 적지주에게 준 제 명원패인데….”
“그렇네. 그의 인연 목록에 자네가 있더군. 해서 부탁도 할 겸 이렇게 찾아온 것이네.”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굳이 시험을 거치지 않았어도….”
중괴가 말하길 무명은 고위수사가 억지로 일을 시키면 반항하는 부류라고 했다. 해서 실력으로 그를 누르려고 한 준혁이었다.
물론 선기에 져서 어쩔 수 없을 땐 패를 사용하려 한 것이었지만.
“됐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지. 이것들이 가리키는 장소를 찾아주게나.”
얼떨떨해하는 무명을 향해 웃어 보인 준혁은 라후지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전부 넘겨주었다.
“아, 지도를 해석하는 일이었습니까?”
승부에 지고 침울해하던 무명은 준혁이 맡긴 일이 간단한 일이라 판단했는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오두막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잠시라는 말이 무명에겐 다른 뜻이었는지, 시간을 빠르게 흘러갔고, 준혁 일행은 당연하단 듯 평상 위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벌컥-
준혁 일행이 지루함을 느낄 때쯤, 오두막 문이 열리며 무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자신감을 보자면 당연하게 위치를 판별해낸 것 같았다.
“알아냈습니다! 이것들이 가리키는 곳은 중림의 혈수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