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무명(無名) (1)
‘천신체?’
지나가듯 들은 정보였기에 준혁은 천신체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었는지, 중괴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며 현재 주서령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다음 계약자란 의미가 그런 것이었구나…. 다행이라 해야 하나.’
천신라가 주서령을 데려간 궁극적인 이유인 차후 계약자의 신분.
천신라는 당장 주서령을 어쩔 생각이 없었고, 몸을 옮기거나 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수도계엔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고, 언젠가는 대라신선(大羅神仙)이 되기 위해 도전할 테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준비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그는 주서령을 극진히 대접하는 건 물론이었고, 그녀의 수행을 올리기 위해 도움까지 주고 있다고 했다.
‘훗날 계약자가 되려면 동화율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지.’
마선과 계약자가 완벽한 하나의 인격체가 되기 위해 동화율을 올리려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라야 하는 건 당연했다.
만약 서로 죽이고픈 원수라도 된다면 동화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물론 수천 수만 년이 흐르며 인고의 시간이 지나간다면 결국 하나가 되고 말겠지만 말이다.
준혁은 중괴의 전언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마음 한구석 답답한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중괴는 처음부터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고, 이젠 주서령의 안전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됨을 깨달았으니까.
그렇다고 그 둘을 그대로 둘 순 없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그때, 옥돌을 떼어내고 생각에 잠기려는 준혁의 손 위로 조호랑이 손을 가져다 댔다.
“걱정 많으셨죠? 막내는 잘 지낼 거니까 심려 마세요.”
“혹시 먼저 확인한 것이오?”
“당연한 것 아닌가요? 어르신이 처음에 전해준 물건은, 그분이 둘째에게 직접 전해준 것이라 굳이 확인 과정이 필요 없었지만, 두 번째 물건은 진정 그분이 보낸 건지 확인 작업이 필요했으니까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조호랑의 모습에 준혁은 그녀가 생각보다 조신하거나 사려가 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구려. 헌데? 방금 막내, 둘째라고 했소?”
“네, 결국 살아온 시간으로 서열을 정하기로 했어요. 다만….”
“다만?”
“백 년에 한 번씩 서로 수행을 겨뤄, 상공의 거처를 주기적으로 바꾸기로 했답니다.”
“내 거처를?”
준혁의 반문에 조호랑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생글거렸다.
‘적응이 되질 않는구나.’
괄괄하던 조호랑이 유난히 조신해 보이자, 준혁은 필히 자신이 모르는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그렇다고 그런 사소한 것까지 짚고 넘어갈 상황이나 여유가 없었기에 굳이 티를 내지 않고 넘어갔다.
그때 굳게 닫아놓은 대문 밖 결계 사이로 전음부 한 장이 날아와 준혁 앞에 이르렀다.
일반적인 전음부가 결계를 통과할 수는 없는 일. 소우자가 보낸 특수 처리된 전음부였다.
준혁은 그녀들과의 대화를 멈추고 바로 부적을 활성화했다.
-주군, 급히 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소우자의 요청에 한 손을 가볍게 저어 결계에 문을 만들어주었다.
“주군!”
그리고 기다렸단 듯 문을 열고 나타난 소우자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선마궁이 중림으로 진출했다고 합니다!”
“중림?”
“묘립성에서 각 세력에 침투시킨 세작들이 있사온데, 그들로부터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선마궁의 마선들이 움직여 중림의 혈수림을 정리하고 있다 합니다.”
중림은 천운대륙 남쪽, 숲으로 이루어진 작은 대륙이었고, 남운대륙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중괴의 예상으로는 적마의 보물창고가 있을지 모를 곳이었고 말이다.
“이유가 무엇이라 하던가?”
준혁의 물음에 소우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알 수 없다 합니다. 다만 누군가를 찾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긴 합니다. 헌데 이상한 게 하나 있는데….”
“말해보게.”
“마선들을 이끌고 있는 자가…. 중력괴 어르신 그분이라 합니다.”
갑작스러운 선마궁의 행보에 준혁은 예전에 중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족을 사육해 섭식하는 혈수림에 준혁이 가길 꺼리자, 비아냥대던 그의 말이.
‘설마? 나 때문에?’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어쩌면 선마궁의 행보는 중괴의 노림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내가 편히 적마의 창고를 찾을 수 있게…. 식인을 하는 종족을 전부 처리할 생각인 건가?’
그는 준혁이 적마의 보물창고를 찾아가길 원했고, 준혁은 혈수림을 핑계로 꺼리는 상황이었으니, 선마궁을 선동해 그곳을 정리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쳤다.
중괴가 적마의 출몰지역을 알고 있었다는 건 마선경도 어느 정도는 그의 흔적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었고, 준혁이 적마를 흡수하고 있단 것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그쪽으로 유도하긴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소름 끼치는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임무를 핑계로 마선들을 하나씩 퍼트릴 생각인가?’
천겁이 막으려 움직인 16명의 분신 중 일부가 마선인 걸 중괴가 몰랐을 리는 없을 터.
어쩌면 중괴는 마선들을 계속 흡수시켜 준혁을 빠르게 성장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건지도 몰랐다.
준혁의 생각은 거기에 닿았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정말 그런 계획일까?’
중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준혁이었다.
한참 후, 대화가 정리되고 걱정거리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소우자가 소화여에게 눈짓하며 준혁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눈치 빠른 준혁이 모를 수는 없었다.
“그만 물러가 보게.”
은근슬쩍 딸과의 혼사에 대해 언급하려는 소우자에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 문제는 뒤로 미루자고 했다.
조호랑이 둘째라고 부르며 일정부분 인정하는듯했지만, 현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축복을 논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주서령의 가문인 주가에도 혼인에 관한 건 차후로 미룰 수 있게 일 처리를 부탁했다.
이미 정해진 혼삿날이 지나버리기도 했지만, 이젠 몇 년 몇십 년이 아닌 그녀를 되찾을 때까진 무한정 연기였으니까.
그리고 소우자에게 명해 전송실 담당자의 입을 막으라 했고, 자신이 출현한 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막으라 지시했다.
잠시 후, 소우자를 비롯해 두 여인까지 물러나게 한 후 준혁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걱정할 일은 줄었으나 이대로 기다릴 순 없지.’
수행이란 게 원한다고 오르는 게 아니었고, 다른 이들처럼 시간을 녹여 성장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중괴가 바라는 공천귀의 무덤도 찾고 싶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니, 준혁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을 나눠 머릿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
계획을 정비한 준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산들바람과 청호, 두 영수를 잡아 오는 일이었다.
“수, 수련 열심히 했다구!”
“저, 저도요. 주인님.”
초태해 근처에서 해양 괴수들을 가지고 놀고 있던 두 영수는 준혁의 부름에 대화성으로 돌아왔다가 후회만 하고 있었다.
“아씨, 그냥 돌아오지 말걸.”
“아씨? 넌 점점 더 애처럼 변하는구나. 언제 철이 들 생각인 것이냐?”
“흥! 재밌는 게 너무 많은데 어쩌란 말이야! 오히려 큰둥이 네가 변했어!”
“......”
“말투도 늙은이같이 변하고 말이야!”
“...후우.”
보통 종속 관계에서 수행 차이가 커질수록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산들바람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게 거짓은 아니군.’
그 이유가 그녀의 의지력이 강해졌기 때문임을 알아본 준혁은 칭찬하려다 급하게 멈추었다.
“내 말투가 어떻다고 그러느냐? 오히려 이곳에 온 뒤로 범인들의 세속적인 삶에 찌들어 네가 변한 것이다.”
“흥! 아무것도 모르면서! 떡꼬치 먹어봐써?! 그 맛있는 걸 범인들은 매일 먹는대! 우린 화식을 멀리해야 한다고 먹지도 못하게 하고!”
속세의 음식을 먹는다고 수행에 방해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음식 대부분은 영기로 이루어진 생명체를 죽이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탁기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양이 아무리 미비하다 할지라도 수행을 함에 있어서 피하는 게 옳았다.
“이상한 변명을 해봐야 소용없다. 당분간 둘 다 영수대 안에 들어가 수련에만 힘쓰거라.”
“싫어!!”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준혁은 오래전부터 산들바람과 청호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만 소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비술을 익혀 자신을 보조해주고 하는, 일반적인 영수로 살아가길 원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랜 세월 함께해온 정이 있기에, 앞으로도 함께하길 바랐고, 그들이 영원불사할 진선에 오르기를 희망할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그들을 닦달할 생각이었기에, 준혁은 단호하게 그들을 꾸짖고는 울상을 짓는 두 영수를 강제로 영수대에 집어 넣어버렸다.
“너희들이 수련하기 딱 좋은 장소로 데려다주마.”
두 영수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얘기가 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숲.
얼핏 보기엔 대황대륙의 영수족이 사는 곳과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크게 다른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대황대륙의 나무들이 하나같이 영험한 영목이었다면, 이곳은 우중충한 나무들이 즐비하단 것이었다.
“중력괴, 정말 그곳에 그놈이 있단 말이냐?”
“나 참. 도대체 몇 번을 되묻는 거지? 못 믿겠으면 그냥 돌아가자니까? 천신라 그놈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겠구먼.”
“그분을 함부로 언급하지 말라.”
“끄응.”
우중충한 핏빛 나무 사이를 쉬지 않고 날아가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그 선두에는 중괴가 있었다.
중괴 옆엔 바람을 맞은 듯 헝클어진 머리칼의 사내가 있었고, 반대편엔 몽실몽실하게 생긴 포동포동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인과 사내는 천신라의 명령으로 중괴를 보조하고 있는 풍수(風獸)와 운영괴(雲影怪)였다.
정확히는 중괴는 감시하는 역할이었지만 말이다.
“그분께서 너를 믿는 듯하니, 더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최가 놈이 혈수림 안에 있다는 말이 거짓일 경우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잠깐!”
날아가던 중괴는 갑작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멈추어 섰고, 그로 인해 뒤를 따르던 몇몇 수사들도 급하게 정지했다.
중괴는 ‘왜?’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풍수와 운영괴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언제 그놈이 혈수림 안에 있다고 했지?”
“뭐?! 분명 네놈이 그분께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적마의 창고 안에서 그놈과 함께 있었다고!”
“그랬지. 함께 있었다고. 근데 있었다고 했지, 지금도 있을 거라고 했나?”
“......”
상대가 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중괴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분명 말했지? 그놈은 적마의 권능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수련을 하는 중이었고, 내가 함께 있던 곳도 그중 하나일 뿐이니깐 지금은 없을 수도 있다고. 어?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같이 들었을 텐데?”
“그건….”
“그래서 가봐야 허탕일 수 있다고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어?”
“해, 했지…. 그랬네.”
상대가 진땀을 빼자 중괴는 개운한 듯 다시 몸을 돌려 허공을 박찼다. 그러자 다른 인원들도 황급히 중괴의 뒤를 쫓았다.
“그러니 가서 허탕 친다고 뭐라 하지 마. 난 분명히 말했어.”
“아, 알겠네.”
‘물론 적마의 권능이 없으니 보물창고에 들어갈 수도 없을 테고 말이야? 크큭.’
혈수림의 식인 종족을 처리하고 나면 적마의 보물창고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선마궁 수사들을 부려 먹을 생각에 신난 중괴였다.
보물창고로 의심되는 장소를 진짜 찾는다고 해도 핑곗거리를 생각해 두었기에 걱정도 없었다.
그리고 중괴가 이곳을 찾은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흐흐, 어차피 와야 할 테니 먼저 청소해 놓으마. 나중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거라.’
선마궁에 들어간 후 우연히 알게 된 정보가 중괴를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준혁에게 정보를 보내고 싶지만, 감시의 눈이 심해 그러지 못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