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마선기록방 (1)
강렬한 인상의 미남자는 얇은 턱선과 짙은 눈썹을 가진 사내였다.
상대는 준혁의 뒤를 이어 중괴까지 유적 안으로 넘어왔지만, 여유롭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게 다 무슨 말이냐?”
준혁보다 한 걸음 늦게 들어와서인지 중괴는 미남자가 한 말을 처음부터 듣지 못했고, 그의 정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저자, 조금 전 유적의 봉인을 풀 때 사용한 상자 속에 봉인되어 있었나 봅니다.”
“엥?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준혁과 마찬가지로 중괴 역시 상자를 살펴본 적이 있었기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미남자는 별것 아니란 듯 말했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대들 수준에 내 술법을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
거만한 미남자의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쩔 것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리고 시선이 맞닿은 순간.
파앗-
준혁은 곧장 적마의 권능으로 상대의 뒤를 점하며 월광지력을 뻗었고,
“반전하고 반전하라!”
중괴는 중력의 힘을 상하 양쪽으로 발산하며 상대가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해 버렸다.
투악-
하지만 상대하기 벅찰 거란 예상과 다르게 준혁의 주먹은 너무 쉽게 상대를 관통해버렸다.
다만 상대는 준혁의 공격에 명치 부위가 뚫렸음에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피식거리며 웃기만 했다.
“오호? 거인들의 힘 중 하나인가? 아직도 이런 힘을 쓰는 자가 있었다니. 예상외군. 하지만 이깟 허접한 힘 따위로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순 없지.”
파밧-
사내의 거만한 말이 끝나기도 전.
준혁이 재차 손을 쓰자, 사방에서 영역 분신들이 나타나며 한 명은 태양지력을, 또 다른 분신은 월광지력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성광지력을 사용하며 사내의 몸을 관통시켰다.
투학-
사내 정면에 서 있던 준혁은 세 힘이 하나 된 삼지행으로 정확히 상대의 단전을 꿰뚫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내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고, 몸에 난 구멍을 제외하곤 아무 타격도 없어 보였다.
‘허상은 아니다. 분명 살아있는 신체야.’
“실체이나 실체가 아니다!”
그때 중괴가 외침과 동시에 손바닥을 반전시키자, 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찢어지듯 터져나갔고, 잠시 후 조금 떨어진 곳에 멀쩡한 상태로 나타났다.
“그댄 우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나 보군.”
미남자는 중괴의 공격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여유롭게 바닥에 내려서더니 다시금 두 사람 가까이 다가왔다.
-잘 듣거라. 저건 고대의 기영(基影)이다. 아마 이곳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격체가 수많은 세월 동안 성장하면서 자아를 형성한 걸 테다.
기영이란 터를 지키는 그림자.
수호자와 비슷한 존재로서 현재에 와서는 찾아볼 수도 만들 수도 없는 생명체였다.
기영을 만들기 위해선, 만들기 위한 기영의 수행에 맞는 동급수사의 혼백 여럿이 필요했기에, 지금에 와서는 사장돼버린 술법이었다.
-저걸 잡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뿐이다. 이 유적 자체를 소멸시키거나, 아니면 기영이 가진 핵을 파괴하거나.
터에 얽매여 유적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기영.
중괴의 말에 의하면 일반적인 방법으론 타격 자체가 불가능하다 했기에 별다른 수가 없어 보였다.
-그럼 어찌합니까? 핵을 보실 수 있습니까?
준혁과 중괴의 능력으로 유적 자체를 소멸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
결국 핵을 파괴해야 한단 말이었고, 준혁은 그것을 찾기 위해 기감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하지만 핵이라는 건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보였다면 이렇게 있었겠느냐?
“둘이 뭘 그렇게 속삭이나? 혹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저자가 말한 핵이란 건 본다고 깰 수 있는 게 아니니 포기하는 게 맘 편할 것이다.”
전음을 전부 도청한 듯, 모든 대화 내용을 알고 있는 미남자의 말에 중괴와 준혁은 등줄기로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껴야 했다.
기본적으로 수행이 더 높지 않은 한 엿듣기는 불가능했었으니 말이다.
“천혈족이 멸족한 이상 더는 날 상대할만한 자가 없을 테니, 괜한 심력 낭비하지 말고, 이곳 일부가 되어 나에게 도움이나 주게나.”
‘천혈족?’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적마의 능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가를 재보고 있던 준혁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혹 당신을 만든 게 고대의 천혈족입니까?”
“만들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나는 스스로 태어났다! 나 스스로 태어나 이 좁은 곳에 싫증을 느꼈고, 세상을 유람하다 이제야 돌아온 것이란 말이다!”
상대의 반응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한 준혁은 중괴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즉각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어르신! 한 번 더 잡아주십시오!
“쯧쯧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어리석기는.”
그 순간 준혁의 부탁에 중괴가 또 한 번 중력의 힘으로 사내를 구속했고.
슈아악-
준혁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 삼지행을 가득 뭉친 채 상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푸욱-
직후, 상대의 심장을 손에 쥔 준혁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상대는 어쩔 거냐는 듯 비웃음을 날렸다.
“이래서 멍청한 것들과 대화하면 피곤하지. 같은 짓을 몇 번을 반복한다 해도 너희들은 나를….”
상대는 반격할 생각도 없는지 준혁에게 심장을 잡힌 자세 그대로 조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기 전.
찰나와도 같은 순간.
“갈라져라!!”
준혁이 상대의 몸 안에 쑤셔 넣었던 손을 잔뜩 오므렸다 활짝 펴자, 그의 손 전체를 감싸고 있던 삼지행이 사라지며 그 속에서 붉은빛이 피어올랐다.
붉은빛은 순식간의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순간에 거미줄이 불타는 듯 전율하더니 붉은 광선으로 변해 터져나갔다.
파파 팍- 투두둑-
붉은 광선은 준혁의 손을 중심으로 직경 1미터쯤 되는 붉은 광구를 형성했고, 그 안에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번개가 치듯 붉은 광선이 수천 겹 교차하고 있었다.
최근 마선들의 힘을 하나로 합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연구하던 걸 펼친 것이었는데, 적지주와 인지경의 힘에 천혈의 힘까지 실은 것이었다.
“ㅆ...”
그리고 붉은 광선의 움직임이 멈추기도 전.
미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뜨다가 아까와 달리 먼지가 흩어지듯 깨어져 나갔다.
툭-
그리고 존재 자체가 거의 소멸할 때쯤, 준혁의 발 앞으로 손바닥만 한 인형이 떨어졌다.
당연하게도 인형의 외형은 미남자와 쏙 닮아있었다. 너무 어이없이 죽어서인지, 인형의 얼굴이 왠지 억울해 보였다.
***
“대단하구나! 기영을 처리하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헌데 어떻게 한 것이냐?”
중괴의 의문에 준혁은 발 앞에 떨어진 인형을 주우며 대답했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핵을 찾을 수 없으니 일정 부분에 통째로 충격을 가한 것이지요.”
“그것 말고! 그 힘이 무엇이냔 말이다! 분명 예전에 느꼈던 천신라의 권능과 비슷함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예전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젠 분명히 안다. 네놈 설마?”
“천신라와 연관이 있냔 말입니까? 농담도 참.”
준혁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발을 빼려 했지만, 중괴는 들개처럼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결국 거듭된 중괴의 요구에 우연히 얻은 힘이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공간을 찢어내는 공능을 가진 힘이라고만 알려주었다.
다만 총량이 정해진 힘이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러니 다시 보여드릴 순 없습니다. 제 비장의 수이니 최대한 아껴야 하니까요.”
자신의 정혈로 성장시키지 않는다면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공간을 찢어내는 공능이라…. 분명 그놈과는 다른데…. 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그 힘을 연구할 수 있게 허락해다오.”
“그럴 여유가 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 보이는 중괴의 표정에 준혁은 결국 허락해주고 말았다.
그리고는 인형을 살피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형 안엔 고도로 집약된 진법이 새겨져 있었는데, 진법 안에는 인형의 기억과 시야도 일부분 저장돼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준혁은 중괴에게 사실을 알리고 즉각 인형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준혁은 중괴에게도 내용을 공유했다.
중괴의 말대로 오랜 시간이 흐르며 스스로 자아를 가지게 된 기영. 하지만 기영이라는 존재 자체를 뛰어넘을 순 없었고, 그는 감히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유적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그러다 누군가 유적에 방문했고, 자신의 능력과 그의 도움으로 유적을 나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영은 자신의 터를 벗어난 순간부터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상자에 의존해 겨우 연명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 후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결국 준혁의 손에 들어오고 다시 유적에 돌아온 것이었다.
‘운이 좋았구나.’
그의 기억을 읽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는데, 그가 유적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기에 자신에게 쉽게 당했단 것이었다.
만약 원래 기영의 능력을 전부 발휘했다면, 유적 안에서만큼은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훗날 요긴하게 쓸 수 있겠어.’
인형에 집약된 진법을 손본다면 다른 장소를 지정해 집 지키는 수호자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준혁은 인형을 소중히 공간팔찌에 담았다.
그리고 기영을 제압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유적 내부를 내 집처럼 둘러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유적의 창고로 의심되는 장소와 수련실, 약초밭 등 유적인지 거처인지 애매한 장소를 전부 확인해본 두 사람은 마침내 제단으로 의심되는 공간에서 그토록 바라던 물건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이게 마선기록방이로구나!”
제단 위엔 새카만 창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그 아래엔 마치 제물을 올려놓듯 손바닥만 한 가죽이 놓여있었다.
중괴는 네모난 가죽을 보더니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고, 준혁은 중괴를 지나쳐 원래 목표였던 제단 위로 올라가 창을 손에 넣었다.
“아! 대단하구나.”
창을 손에 쥔 순간, 용천무의 날개를 얻었을 때와는 또 다른 희열감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천영보인 새카만 창은 흑룡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는데, 공격적인 창의 모습과 달리 방어에 치중된 법기였다.
전함이 공간의 틈에서도 버틸 수 있게 설계된 방어법기였다면, 흑룡은 일정 지역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물건이었다.
흑룡이 특별한 건, 보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이 공격당하면 자동으로 반격한다는 특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사용자가 가진 영력의 곱절 이상이라서, 만약 규선이 흑룡을 사용하면 신선에 이른 자라 할지라도 쉽게 방어를 뚫어낼 수 없었다.
그때, 감탄하며 창을 살피던 준혁에게 중괴가 다가오며 마선기록방을 내밀었다.
“그깟 신외지물 따위에 감탄하지 말고, 이것을 발동해 보거라. 나는 이미 동화가 끝난 몸이라 그런 건지, 기능을 끌어낼 수가 없구나.”
마선기록방을 사용하지 못함에 중괴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준혁은 마선기록방을 받아들이며 영력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식아로 마선기록방을 흡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마선만 흡수했지만, 태어난 이유를 생각해보면 무생물인 마선도 먹을 수 있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그리고 준혁의 그런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부르르-
준혁의 단(丹)속 원영의 손에 쥐어져 있던 식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 돼. 참거라.’
요동치기 시작한 식검은 준혁의 명령 따윈 가볍게 거부하더니 몸 밖으로 튀어나왔고, 나오기가 무섭게 마선기록방을 꿰뚫어 버렸다.
푸욱-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준혁이 ‘참거라’라고 명령을 내리는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파화핫-
마선기록방을 꿰뚫은 식검이 빛에 휩싸이며 바가지 머리를 한 꼬마로 변했고, 마선기록방을 한 손에 들더니 육포를 뜯듯 쫘악 찢으며 씹어먹기 시작했다.
쿠궁-
그 순간 준혁은 심장과 단(丹)이 요동치는 느낌에 무언가 변화가 찾아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감지한 순간.
“어르신! 물러나십시오!!”
육포를 뜯듯 마선기록방을 뜯어먹던 식아의 눈빛이 변하더니, 자신 앞에서 신기하단 듯 쳐다보던 중괴를 향해 미칠 듯한 속도로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