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서열
준혁이 남운성주를 비롯해 그의 수하들을 전부 정리한 사실은 당분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남운성의 혼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백강의 의견 때문이었다.
“주 가주께서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모든 일을 주백강에게 일임한 준혁은 자신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꺼냈다.
“다만, 한 가지는 저와 상의를 하셔야겠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주백강의 반문에 준혁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주서령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주서령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고, 주백강은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다만 준혁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에 좌중은 차갑게 식고 말았다.
특히 주서령의 표정이.
“방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혼인이라뇨? 저에게 시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는 다른 이와 혼인을 하셨단 말입니까?”
“그것이….”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는 주서령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자, 준혁은 주춤하며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자신이 잘못했다고 여기진 않았기에 이내 신색을 바로 하며 그간의 사정을 사실대로 말했다.
“들어보시오. 그게 어찌 된 일이냐면….”
“흐음….”
아마르곤과 조호랑에 관련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주서령의 표정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실망한 표정은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준혁은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옆에서 얘길 엿들은 주백강은 그게 무슨 큰일이냐고 한마디 했다가, 살기를 띤 채 노려보는 딸의 시선에 슬그머니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아가던 순간.
주서령이 긴 한숨과 함께 수긍의 의사 표현을 했다.
“그래요. 준혁ㅆ…. 선사께서 몇 번이나 목숨을 빚진 친우를 위해…. 혼인까지 감내하셨다니. 본심은 아닐 거라고 믿겠어요.”
“예전처럼 편하게 불러도 되오.”
상황이 일단락되어가는 듯 보이자, 준혁은 속으로 안도하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여자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주서령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럼 그때 함께 온 두 분 중 한 분이신가요?”
“그, 그렇소. 노란 머리칼을 지닌….”
“아, 야생미가 넘치시던 그 영수족 수사 말씀이시군요?”
주서령이 눈을 흘기며 바라보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선사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심상치 않더니…. 그럼 나머지 한 분은요?”
“그녀는, 흐음….”
고민하던 준혁은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기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소화여가 태양지력으로 인해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려 했을 때, 자신이 그녀를 구해줬고, 그로 인해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전생의 기억을 보면 동생을 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으시더니…. 많이 변하셨나 보군요?”
토라진 듯한 주서령의 목소리에 질책이 아닌 실망이 담겼다.
그 순간 준혁은 당당하게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오. 그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소. 나는 당신과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을 한 뒤로 오직 그 목표 하나만을 이루기 위해 정진했소. 그것만은 사실이오.”
준혁의 눈에 담긴 진심을 읽은 것일까?
한동안 뾰로통한 얼굴로 준혁을 떠보던 주서령은 결국 발걸음을 옮기더니, 그의 품에 뛰어들며 와락 안았다.
“알겠어요. 당신의 진심. 대신 하나만 약속해줘요. 절대 나를 소홀히 하면 안 돼요. 알았죠?”
“당연하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보시오.”
망설이던 주서령이 말했다.
“그녀와 아직 혼인식을 하진 않았다고 했죠? 그럼 제가 먼저예요.”
***
천운대륙의 남동쪽.
칼을 거꾸로 박아놓은 것처럼 날카로운 산세가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 위.
양탄자 모양의 법기가 하늘을 가르고 있었고, 그 위에는 남녀가 다정히 앉아 서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운성주인 고류제의 눈을 피하고자 전송진이 아닌 비행법기를 이용해 대륙을 건너는 준혁과 주서령이었다.
주백강과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상의한 준혁은 곧장 주서령을 데리고 남운대륙을 떠났고, 추억 속 비행법기를 이용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때 사용하던 것과 겉모습만 비슷하지 전혀 다른 최상급 법기였지만 말이다.
“기억하오? 그대가 범인이었던 나를 태우고 하늘을 구경시켜주었던 때가?”
“물론이에요. 그땐 믿음직한 수하가 생긴 것 같아 좋았는데 말이죠.”
주서령의 너스레에 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하계에서 함께했었던 짧은 기간의 이야기와 함께, 시시콜콜한 지난 과거까지 꺼내며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수사를 기억하세요? 저를 도와주었던 언니….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네요. 아무튼 그때 나설헌 수사라는 분이 저를 도와주었기에 동생분을 지킬 수 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그녀도 그녀의 조부와 함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비행법기의 속도는 조금씩 느려졌고, 대륙을 건너는 수년 동안,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평화의 시간은 호란대륙에 도착한 순간 와장창 깨져나가고 말았다.
그 이유인즉슨.
대화성에 도착한 주서령이 조호랑을 찾아가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조호랑 수사? 저와 대화 좀 하셔야겠는데요?”
***
대화성의 중심.
성주의 집무실 근처에 마련된 준혁의 거처 안.
화려한 대전엔 준혁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엔 조호랑과 주서령이 있었다.
대화성에 도착한 주서령은 곧바로 조호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혼인식을 하지 않은 혼인은 인정할 수 없다며 자신이 준혁의 첫 여인임을 강조했다.
당연히 조호랑은 코웃음으로 맞받아쳤고, 둘 사이의 기 싸움이 시작됐다.
소화여도 끼어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소우자의 눈치만 보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네놈 그렇게 안 보였는데…. 능력이 출중하구나?”
상황이 심각하게 변해가고 있음에도 중괴가 장난스레 입을 열자, 준혁은 인상을 쓰며 핀잔을 주었다.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어르신이 좀 해결해 주시지요.”
“해결? 자고로 여자들 싸움에 끼어들면 고달픈 법이다. 너는 그저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입이나 닫고 조용히 있으면 된다.”
그저 가벼운 일로 치부하기엔 두 사람의 신경전이 생각보다 날카로워졌고, 무력이라도 사용할 것처럼 흉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준혁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라서 마음이 무거웠다.
두 여인은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서로 준혁을 수시로 쳐다보았고, 자신의 편에 서서 상황을 해결해 주라며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하아, 수행을 올리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왜 수사들이 혼인을 멀리하고 수행에만 전념하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화가 미칠 것 같아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때, 옆에서 키득거리고만 있던 중괴가 악마가 속삭이듯 전음을 보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네놈이 말하지 않았느냐? 친우를 치료해야 한다고?
주서령과 조호랑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이 반발하기 직전 중괴에게 아마르곤에 관한 얘길 꺼냈던 준혁.
중괴가 그에 대한 얘길 꺼내자 솔깃한 준혁이 은밀히 중괴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럼 지금이지. 어차피 네놈이 있어 봐야 저 사태를 해결한 순 없다. 멀리 떠나있다 돌아오면 누구 하나가 우위를 잡고 있겠지.
-그렇다고 저대로 두고 떠난단 말입니까?
-하면? 이대로 계속 지켜보기만 하려고? 그리고 저길 보아라.
전음을 보내던 중괴의 시선을 따라간 준혁은 두 손을 꼭 쥔 채 앞으로 나설까 말까 고민하는 소화여를 볼 수 있었다.
-저 아이도 곧 끼어들어 삼파전이 될 것 같다만? 네 의견은 어떠하냐?
-......
정말 중괴의 말대로 소화여까지 끼어든 삼파전이 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음흉하게 웃는 중괴의 표정에서 그가 다른 뜻이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목적이 있으시군요?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제 친우의 치료는 핑계고 저와 함께하려는 게 있지 않습니까?
속마음을 들킨 중괴가 시선을 피하며 입맛을 다셨다.
-쩝, 고놈 눈치는 빨라서. 그래. 하지만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건 진심이다. 저것들을 계속 보고 있다간, 내가 다 심마에 빠질 것 같거늘, 너는 안 그러느냐?
-...... 무슨 연유에서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중괴의 말에 속이 뜨끔한 준혁이 말을 돌렸다. 그 모습에 중괴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 너에게 뭘 숨기겠느냐. 네 친우를 치료해 줄 테니 그 후엔 나와 함께 마선기록방을 찾으러 가자꾸나.
-마선기록방이라…. 그게 그리 필요하십니까?
처음 마선기록방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때부터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모습이 떠올랐기에 준혁이 반문했고.
-당연한 것 아니냐? 그것만 있다면. 어쩌면 공천귀의 행방을 알아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로부터 내 눈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을 것 아니냐?
천신라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그에게 빼앗겼다는 한쪽 눈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던 중괴.
-혹, 제가 떠나있던 사이?
-흘흘, 정말 눈치가 빠르구나. 그래. 어디인지 알아냈다. 불타는 사막에 있으니 나만 따라오면 된다.
준혁은 이미 그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깜짝 놀란 척하며 중괴를 흘겨보았다.
‘왜 따로 움직이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구나.’
어딜 가나 따라다니던 중괴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땐 별생각을 안 했는데, 그는 혼자서 마선기록방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던 듯했다.
‘마선기록방이라….’
중괴의 제안에 고민에 빠진 준혁은 자신이 이미 공천귀를 얻었음을 그가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며, 언성을 높이는 여인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고 목소리만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수행이 높은 사람이 우선권을 가지는 거예요. 어떠시죠?”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경연대회라도 나왔나요?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지가 중요하지 거기에 수행을? 정말 속물이시군요?”
“마음이 통하는 거라면 저도 빠지지 않아요! 두 분은 최 선사와 추억만 공유했겠지만! 저는 그분과 공법을 공유했어요. 즉! 저는 이미 수련 반려나 마찬가지라고요! 게다가 제가 죽어가며 원영이 자아를 잃고 흐려지려 할 때, 잠시지만 그분의 혼백과 하나 됨을 느끼기까지 했고요!”
결국 주서령과 조호랑의 기 싸움에 소화여까지 가세하자, 준혁은 조용히 중괴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르신.
-왜?
-가시지요.
그리고 중괴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흐릿하게 변하며 허공중에 녹아 사라져버렸다.
스르르-
그 움직임이 얼마나 정교하고 틈이 없었는지, 두 사람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주서령을 비롯한 대다수 수사들은 준혁이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고 생각했지, 중괴와 함께 멀리 떠났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대전에 고성이 울리는 사이.
준혁은 중괴와 함께 전송진에 올랐고, 곧이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전송진을 발동한 수사만이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꽤 많은 영석을 받아, 웃음을 참지 못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