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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38화 (338/408)
  • 338화. 인연을 담고 (2)

    천운성 중심에 세워진 고탑의 정상.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은 자세로 천기와 감응하고 있던 사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이맛살을 구겼다.

    그가 규선에 오른 후, 감정변화가 거의 없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재밌군.”

    천운성주이자 천휴림 림주의 공식 첫 제자인 고류제는 자신의 의지가 밀려나자 놀랍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한 건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감히. 이곳에서 내 명을 어기려고 하다니. 예를 갖추려고 했거늘.”

    성 전역을 영역으로 보호하고 있던 고류제는 전송실에 나타난 새로운 기운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모습을 드러낸 이가 사제인 대막리가 말했던 인물과 일치함을 알아챘고 당장 움직이기 곤란해 전음부를 보냈던 것.

    스승이 관심을 보인 이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예를 갖추기보단 의지로 억압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호의를 거절하듯 전송실을 가득 채운 자신의 의지를 밀어내 버렸다.

    “잡아놓고 대화를 나눠야겠군.”

    불쾌함을 내뱉은 고류제의 눈에 광망이 비치며 번들거렸다.

    직후, 고류제의 몸이 분화하듯 떨리더니 그의 곁으로 네 명의 분신이 나타나 빛보다 빠르게 흩어졌고, 그의 몸 주위로 미세한 파동이 일어나 성 전역을 감싸고 있던 영역을 강화했다.

    영역을 강화해 전송진이 발동하기 힘들게 만들었고, 네 명의 분신이면 진선급 수사 한 명이야 충분히 잡아올 수 있었으니, 그는 여유를 가지고 다시 하늘의 천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천천히 눈을 감으며 천기를 음미하던 고류제는 또 한 번 인상을 쓰며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자신의 영역이 전송실에서부터 밀려나 있었다. 심지어는 상대를 잡기 위해 보낸 분신들도 그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영역 분신은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순간, 강렬한 기운의 이동이 느껴졌고, 고류제는 허탈함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허…. 내 방해를 뚫고 전송진을 발동했다고?”

    고류제가 어이없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역 강화뿐 아니라, 그전에 전송실 담당자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수 있게 수를 써놓았기 때문.

    당연히 그 상태를 해제하고 전송진을 발동하려면 꽤 고생을 해야 하는 건데, 상대가 너무 쉽게 상황을 벗어난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수련을 멈추고 움직일 수가 없는 고류제는 닭 쫓던 개처럼 남동쪽으로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전송진이 발동한 위치를 보면 남운대륙으로 향한 것이겠지? 돌아올 땐 반드시 나를 만나야 할 것이다.”

    자존심인지 억울함인지, 뜻 모를 감정이 담긴 목소리만이 허공을 수놓았다.

    ***

    남운대륙 회화성.

    회화성 중심에 마련된 전송실이 환한 빛을 내뿜더니 사내 한 명을 토해냈다.

    회화성 전송실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준혁.

    준혁은 고류제의 의지를 가로막아 간신히 천운성을 탈출했고, 중간 이동로인 하류성을 거쳐 회화성에 당도했다.

    “돌아갈 땐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야겠군.”

    중괴의 예상이 적중했기에 준혁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성을 벗어나 회보주가가 위치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주가가 가까워짐에 따라 준혁의 기감에 곳곳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폭발하는 기운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무엇 때문인지는 쉽게 알아차렸다.

    그것은 수사들이 맞부딪치며 발생하는 파동.

    “이미 무력을 사용했구나. 어찌 이리 치졸하게!”

    주서령을 욕심낸 남운성주가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가문 전체를 침입하려는 건 줄은 몰랐다.

    은연중, 보이지 않게 가문을 압박하고 있으리라는 준혁의 예상과는 달리, 수많은 수사가 직접적인 무력으로 주서령을 납치하려는 듯 보였다.

    “적지주!”

    그 상황에 준혁은 즉시 적지주를 소환해 인연의 실의 행방을 찾았다.

    지이잉-

    그 순간 준혁의 손목에서 시작한 붉은 실이 주가의 동쪽 방향으로 뻗어 나가있는 걸 볼 수 있었고, 준혁은 기운을 폭발하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빛살처럼 하늘을 갈랐다.

    “이번엔 반드시 지킨다!”

    ***

    “이 무뢰배 같은 자!! 이런 짓을 하면서도 대의를 논하는 군자라 할 수 있나요?!”

    주가에서 오백 리가량 떨어진 동쪽 공터.

    현재 이곳엔 주서령을 포함해 주가의 가주인 주백강과 수많은 가문의 구성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주가가 회화군락지를 지키며 명성을 쌓은 가문이라고는 하나, 기습을 가한 남운성에 비한다면 반딧불이나 다름없는 수준.

    다행히 남운성주도 부끄러움을 아는 자인지, 성에 기거하는 수사 중 믿을 만한 자들만 몇몇 추려서 데려왔기에 겨우 방비하며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초반에 남운성주가 직접적으로 간섭하기 전까지였고, 그가 손을 쓰기 시작하자 주가 구성원들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서령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도망 오게 된 처지였다.

    다만 그것도 이제 끝을 알리는 듯.

    지쳐버린 주가의 구성원들은 하나둘 주서령을 남운성주와 혼인시키자는 데 의견이 모아지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그건 주서령과의 혼인을 위해, 주가 인물들을 제압하기만 한 남운성주의 노림수가 먹혀들어 간 것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주서령의 직계 가족들만 강하게 반항하며 그녀를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

    공터 안쪽까지 몰린 주서령.

    그녀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근엄하게 생긴 사내가 교활하게 웃으며 어깨를 쓰윽 올렸다.

    “군자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내 것이어야 할 주 소저가 다른 이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 것을 지켜야지요.”

    “누구 마음대로! 당신 같은 이에게 단 한 번 눈길조차 준 적 없거늘!”

    주서령이 경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자, 교활한 사내, 남운성주가 이를 드러내며 입술을 핥았다.

    “그건 주 소저가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선택하는 것이지요.”

    “이!!”

    이치에 어긋나더라도 너무 당당하면 오히려 맞는 말 같을까?

    남운성주의 말은 너무 자연스러웠고 얼핏 들으면 진짜 그의 말이 맞다는 착각까지 들게 했다.

    그 순간, 주서령이 영기파동을 퍼트리며 외쳤다.

    “갈!! 모두 정신 차려요!”

    그녀가 일으킨 파동에 남운성주가 일리 있는 말을 한다고 여기던 주가의 구성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저자의 자소공법은 남녀 가리지 않고 미혹시키니 정신들 똑바로 차려야 해요!”

    “오호라. 역시 제가 선택한 여인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남운성으로 가시지요. 더 이상 반항은 소용없음을 알지 않습니까?”

    “흥!”

    주서령은 남운성주의 말에 코웃음 치며 기세를 일으켜 당장이라도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더는 반항이 의미가 없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를 따라갈 마음은 더더욱 없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어지러울 뿐이었다.

    ‘이럴 때, 그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과거의 인연이라고 불쑥 찾아와 전생의 기억을 안겨준 사람.

    주서령은 자신에게 시간을 주고 떠나간 사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떠나주길 요청했지만, 왜인지 이곳에 없는 그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제 마음을 정한 상태.

    준혁이라는 사내와 과거의 인연을 이어갈 결심이 굳은 상태였기에,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과거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나 홀로 떠나게 할 건가요?’

    주서령은 남운성주에게 강제로 끌려가느니 죽음을 선택할 결심까지 마친 상태였다.

    남자를 혐오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여는 것이었기에, 그 뜻이 꺾이면 차라리 귀천하는 게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시간을 끌어봐야 소용없습니다. 도와줄 이가 없으니까요. 제류문과 강해궁에서 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두 곳도 이미 제 뜻에 따라주기로 한 지 오래입니다.”

    제류문과 강해궁은 주가와 오래된 맹우.

    남운성주 말에 주백강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입에선 연신 ‘그럴 리 없다.’라는 말만 흘러나왔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될 줄 알았는지 허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이제 결단을 내리시지요. 소저만 저를 따라오면 주가의 어느 누구도 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남운성의 요직을 주가의 인물들로 채워드리지요. 내 약속합니다.”

    수군수군-

    남운성주의 제안이 혹하는지 곳곳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서령은 그 모습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백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처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평소 딸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던 주백강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 된다!”

    그리고 주백강의 입에서 ‘안 된다’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파앗-

    주서령의 주위로 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빛은 순식간에 황금색 검으로 변했고, 검으로 변한 직후 허공에서 한 바퀴 선회해 남운성주를 향해 빛처럼 쇄도했다.

    쇄애애액-

    동시에 그녀는 상공으로 치솟으며 양손을 합장해 거대한 기류를 불러들였다.

    “영역 선포!”

    화아악-

    그 순간 주서령 주변이 화사한 녹광으로 뒤덮이며 남운성주의 영역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차장-

    남운성주는 상시로 펼쳐져 있던 자신의 영역이 순간이나마 밀려나자 눈썹을 꿈틀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어느새 그의 한 손이 들려있었고, 그의 손안에선 황금색 검이 깨어지며 바스러지고 있었다.

    “허, 역사에 남을 천재란 말은 들었지만, 벌써 이 정도일 줄 상상도 못 했군. 이러니 정말 탐나지 않는가? 오늘 내 너를 꼭 내 여자로 만들고 말겠다!”

    콰앙!

    그리고는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으며 네 명의 분신을 만들어냈고, 그가 손짓하자 분신들이 교차하듯 빛 꼬리를 남기며 주서령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주서령이 의미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그녀는 상대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기에 힘으로 그를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끌려갈 수는 없었기에 작은 반항이라도 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을 해보고 결국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면, 그땐 상대의 소유욕을 막아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어디 파렴치한 자의 실력이 어떤지 봐보겠어요!”

    촤르륵-

    어느새 주서령 곁으로 황금색 검 수백 자루가 나타나 불에 타는듯한 아지랑이를 만들어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다면, 어설픈 분신으로 상대하기보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방법에 모든 걸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가라!”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진 순간 수백 자루의 황금색 검이 폭우가 떨어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행 차이를 넘어서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일까?

    “이깟 것!”

    솟구치던 남운성주가 양손을 휘젓자, 날아가던 분신 중 하나가 스스로 자폭했고.

    콰아앙!

    그 순간 주서령의 공격은 처참하게 박살 나며 빛으로 산화해 사라져버렸다.

    몇몇 검 조각이 여전히 힘을 실은 채 떨어져 내렸지만, 남운성주 근처에 가기도 전 대기권을 뚫지 못한 운석처럼 소멸해 버렸다.

    득의양양한 표정의 남운성주는 재차 손바닥을 교차하더니 그대로 주서령을 향해 손날을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가시가 있는 꽃이 아름답다고는 하나, 너무 거슬리면 안 되겠지? 오늘 밤이 오기 전 네년의 그 날카로운 성정을 전부 뜯어 고쳐주마!”

    그러자 거대한 불투명한 반달이 분신들 손에 생겨났고, 분신들은 주서령 지척까지 다가와 반달을 횡으로 휘둘렀다.

    ‘막고 반격은 힘들어. 그렇다면?’

    주서령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공격이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는 생각에 곧바로 다음 수를 준비했다.

    남운성주가 자신을 죽일 수는 없을 테니, 자신을 인질 삼아 반격을 가할 생각. 주서령은 다음 술법을 준비하며 날아오는 반달을 몸으로 받아내기 위해 방비 없이 몸을 날렸다.

    “어디 할 수 있으면 죽여봐!”

    그 순간, 그녀도 남운성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스윽- 스가각-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누군가 나타나더니 단숨에 반달을 휘두르는 분신을 갈라버린 것.

    콰아앙!

    분신을 갈라버린 이는 폭발의 반발력을 잠재우더니 보란 듯이 기세를 발산하며 주서령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내의 모습에 주서령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고, 사내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이번엔 늦지 않았습니다.”

    사내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서령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젠 전생의 기억이 아닌, 현생의 추억이 돼버린 사내의 등장에 주서령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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