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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334화 (334/408)

334화. 다시 만나 (1)

“그래. 우리 족인들의 삶을 보니 어떻던가? 인족들과는 많이 다르던가?”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축제장에 도착한 준혁은 반갑게 맞이하는 명왕에게 보고 느낀 바가 많다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여전히 축제에 취해있는 태백랑에게 다가가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축제가 즐거운 건지, 축제에 제공된 봉황족의 선주가 좋은 건지 도통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러자 눈치껏 끼어든 조호랑이 부락으로 돌아가자며 반복적으로 얘길 꺼냈고, 그제야 태백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참 흥이 오르는 중이구먼. 에이.”

“왜 벌써 가려는 건가. 좀 더 머무르지 않고?”

태백랑과는 다른 이유로 명왕도 아쉬움을 내비쳤다.

봉황족의 금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금지의 열쇠를 찾아다 줄 준혁과 조금 더 깊은 얘길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후일 좋은 소식을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던 명왕은 좋은 소식이란 말에 성큼 다가와 준혁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자네만 믿고 있겠네. 명왕의 이름으로 그 일에 대한 보답은 꼭 할걸세.

명왕지보를 분실한 일이 알려져서 좋은 건 없었기 때문에 명왕은 전음으로 작별 인사를 전하며 지긋한 눈빛으로 한동안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떠나는 준혁에게 작은 옥함 하나를 건넸다.

-봉황의 불은 새 생명을 의미한다는 걸 아는가?

옥함을 전해준 명왕은 이제 가보란 듯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준혁은 옥함 안의 물건을 기감으로 확인하며 깊게 고갤 숙였다.

잠시 후, 태백랑을 필두로 준혁 일행은 숲을 가로지르다 상공으로 치솟았고, 빛 꼬리를 남기며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부디 약속을 지켜주게….”

멀어지는 그들을 향한 명왕의 목소리만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

봉황족의 영토에서 백랑족의 부락으로 향하는 길목.

끝없이 펼쳐진 숲 위를 초음속으로 날아가던 준혁 일행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 급기야 멈춰서야 했다.

선두에서 앞장서던 태백랑의 신호 때문이었다.

“이제 어쩔 거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대충 듣자니 한동안은 우지를 만나지 못한다던데?”

태백랑의 물음은 우지의 능력을 빌리지 않고 친우를 어떻게 구할 건지를 묻는 말.

준혁은 그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의 도움 없이는 아마르곤을 구할 수 없다는 판단에 조금의 거짓말을 추가해 상황을 설명했다.

“명왕께는 비밀로 해주실 거라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은근한 눈길로 조호랑을 향해 눈짓하다 시선을 마주치자, 태백랑은 그 눈길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굳은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말해보게, 내 입은 대호산(大虎山)보다 무거우니.”

“사실 명왕 몰래 우지란 자를 만나고 왔습니다.”

“어??”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금지를 왕래할 수 없다고 명왕에게 전해 들은 태백랑이 눈을 큼지막하게 뜨며 부연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어찌 된 것이냐면….”

준혁은 예전에 태백랑이 방문했던 전왕문에 대한 얘길 꺼냈다. 그때 조말랑을 구하는 과정에서 명왕이 잃어버린, 금지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얻었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럼 이 아이들과 외유를 나갔던 게?”

“예, 그것을 돌려준다 하여 저를 도와준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몰래 숨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 그런 일이….”

준혁이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두고 치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손자를 구하려다 우연히 명왕지보를 구한 것이 신기했는지.

태백랑은 한참이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빠진 표정을 했다.

그러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지, 암’이라고 중얼거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준혁을 직시했다.

그리고는 그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준혁에게 말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갈래 선택의 순간이 오게 마련이네. 그때 자신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게 최고의 선택이 되는 법이지. 지금처럼 말이다.”

훈화 말씀을 하듯 진지한 표정의 태백랑을 보며 준혁은 그가 살짝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준혁이 조말랑을 구하는 과정에서 명왕지보를 입수한 것이, 하지 않아도 됐을 선행을 행함으로써 행운을 잡은 것이라 결론을 내린 듯했다.

완벽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완전한 사실은 아니었기에 준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태백랑은 명왕지보를 볼 수 있냐는 부탁을 했고, 준혁은 주저 없이 그것을 넘겨주었다.

“이 법기에 그런 신비한 기능이 있다니…. 헌데. 그자를 데려오지 않고도 친우를 구할 수 있느냐?”

한참 동안 명왕지보를 살피던 태백랑은 그것을 준혁에게 넘기며 질문했고.

“그가 자신의 능력을 담은 물건을 건네주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약속대로 도와만 주신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준혁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공간팔찌를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켰다.

그리고는 태백랑의 관심과 호감이 올랐을 때를 이용해 쐐기를 박듯, 진마족 수장에 대한 얘길 꺼냈다.

“그럼 지금 바로 저와 함께 흑마지로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어…. 그, 그러지.”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조호랑이 팔을 걷고 앞으로 나섰다.

입바람 소리를 낸 그녀는 일행의 선두로 이동한 후, 허리에 손을 척 올리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턴 제가 지름길로 안내할게요. 할아버지가 함께 계시니 굳이 흑석대륙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바로 이동하면 될 거예요.”

태백랑이 말을 바꾸기 전, 준혁을 도우려고 솔선수범하는 조호랑이었다.

그녀가 이동할 방향에 관해 설명하며 준혁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자, 준혁은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

음침한 기운이 흐르는 산 중턱.

검은색, 보라색 이파리가 서로를 물들이려는 듯, 한데 엉켜있는 숲속의 공터.

공터 중심엔 폭포수가 흘러내리듯 비단결 같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좌정한 채 손바닥과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내의 손동작이 이어질수록, 사내의 피부는 점점 진한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갔고, 시간이 흐르자 무광의 짙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무광의 검은색은 분명 특수한 기운이 뭉친 것임에도, 영기파동을 흘리긴커녕 주변의 빛을 잡아먹으며 대기를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준혁이 무영기를 운용할 때 주변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며 기운이 소멸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정말 끈질기구나. 이제 그만 내 일부가 되도 될 것을 끝까지….”

잠시 후, 사내의 불만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무광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동시에 사내의 피부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사내는 준혁이 다시 만나려고 한 진마족의 수장, 자타.

오늘도 거대한 진마정이나 다름없는 아마르곤을 완벽히 체화하려 도전하다가, 실패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자타였다.

“이제 거의 된 것 같은데 도대체 의식을 보호하고 있는 힘이 무언지 알 수가 없다니….”

준혁을 만나기 전부터 아마르곤을 체화하기 위해 긴 시간을 보냈었던 자타는 이제 그 끝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마음이 조급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두고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아마르곤이라는 원영밖에 남지 않은 수사는 그의 거대한 힘 앞에서 자아를 유지하며 굳세게 맞서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은 현상이었기에 자타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녹여내기 위해 그저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것 말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이없는 건 의식밖에 남지 않은 주제에 얼마 전엔 인족 수사의 탈출을 돕기까지 했고, 그 뒤로 자아를 보호하는 벽이 한층 더 두꺼워졌다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던 환자가 광명의 빛을 발견하고 의지를 되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자타의 마음이 더 조급해진 연유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라도 거의 체화 과정이 끝나가던 원영의 의식이 더 강해지면, 진마기를 완벽하게 흡수해 수행을 올릴 수 있다는 희망이 깨져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의식을 남겨두고 일을 진행할 수도 없고….”

가장 좋은 방법은 진마기를 제외한 아마르곤의 의식만 밖으로 배출해 버리는 것이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쯧, 할 수 없지. 될 때까지 계속 두드리다 보면 의식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깨져나가겠지.”

실제로 처음 흡수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원영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기댈 것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답을 주겠지.”

그때, 심신을 정리하고 재차 수련을 박차려는 자타의 기감에 다급한 이의 호흡이 느껴졌다.

잠시 후 호흡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우중충한 피부색을 가진 마족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타시여! 지금 흑마지에!”

“흑마지?”

고도의 집중을 위해 외부와의 기운을 강제로 차단해 놓았던 자타는 당황해하는 족인의 모습에 급히 외부와의 교감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의지에 감응해 전면에 보라색 물결이 나타나더니 흑마지의 모습을 비추었다.

“흐음, 저자는….”

보라색 물결에 비친 모습.

그곳엔 전함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물건을 꺼내 자신에게서 도망쳤던 인족 수사.

자신이 흡수하고 동화시키고 있는 아마르곤이라는 수사를 구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줄행랑을 쳤던 자가, 흑마지를 지키고 있던 족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모습이 비쳤다.

“다신 오지 않을 줄 알았건만.”

인족 수사는 어떤 목적이 있는 건지, 족인들을 때려잡을 뿐, 죽이진 않고 있었다.

마치, 소란을 일으켜 누굴 부르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 모습에 자타가 싸늘하게 웃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마침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이 답답함을 풀고 싶었는데.”

잠시 후, 냉소하며 몸을 일으킨 자타는 의지를 일으키며 한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짓에 따라 검은 꽃잎이 회오리치듯 날아가 원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휘리릭-

검은 꽃잎으로 이어진 원은 하나의 진법이 되어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화악-

아마르곤의 기운을 흡수하는 과정 중, 그의 기억 속에서 훔친 목족의 비술.

때때로 흑마지 깊은 곳에서 수련을 즐기던 자타가 그곳의 좌표를 각인시켜 상시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공간이동 진법이었다.

잠시 후, 공간이동진법이 완성되며 거대한 나뭇잎을 엮어 만든 월계관 같은 형상으로 변하자, 자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

세상이 반전되는 감각도 잠시.

공간이동진법을 빠져나온 자타는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인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도망치더니. 멍청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도발 따위는 필요도 없었기에 굳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엔 상대를 무시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타의 말에 인족 수사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멍청한 것도 아니고 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았기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요.”

“끝내지 못 한 일? 마치 이젠 끝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상대가 무슨 짓을 해도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자신감에 자타는 비웃음을 날렸다.

그러자 상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려다.

“물론입니다. 그땐 선사 같은 분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으니 그렇게 당했을 뿐, 이번엔 준비를 철저히 하고 왔습니다.”

“준비?”

“어디 한번 제가 준비한 것을 보시겠습니까?”

코웃음을 날린 자타는 정말 자신 있어 하는 상대의 모습에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하위 수사에게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래, 어디 보여 보거라. 단 죽을 각오를 하고선. 아니지, 어차피 죽을 테니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것이다.”

어느새 자타의 비웃음 사이엔 살기가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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