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우지(牛智) (2)
아슬아슬하게 명왕의 시선을 피한 준혁.
그는 적마도를 이용해 이동해 온 뒤에도 여전히 공간의 틈에 숨은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꼼꼼히 주변을 살핀 뒤에야 용천무의 날개를 회수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금지의 입구인가….”
석실이라 하기엔 자연적으로 형성된듯했고, 동굴이라 하기엔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 장소.
거인족이 남겨놓은 유적에서 보았던 크기 정도의 공동을 연속으로 지나온 준혁은 통로의 끝에서 멈추어 섰다.
“정말 특이한 장소구나.”
만약 이곳이 금지인 줄 모르고 입장했다고 해도, 수상함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무영기처럼 완벽하게 기운을 없애주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힘이 공동과 통로 전체를, 더 나아가 일정 공간 전체를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마치 계면과 분리된 비경을 강제로 뜯어와 명왕의 영토와 연결해놓은 듯이 말이다.
통로의 끝에선 준혁은 직감적으로 이곳이 명왕지보를 사용해야 하는 장소임을 깨닫고 공간팔찌에서 작은 피리를 꺼냈다.
그리고는 영력을 불어넣자.
화악-
예전에 보았던 ‘명왕지처’라고 적힌 지도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흐음.”
하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피리의 공능은 그것으로 끝. 더는 아무 반응도 보여주질 않았다.
명왕에게 명왕지보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캐물을 수 없었던 준혁은 피리를 한 손에 든 채, 혹시나 특이한 반응을 보일까 공동 곳곳을 살펴보았다. 허나 실망만 가득 안은 채로 다시 통로 끝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 물건이 명왕이 말한 물건임엔 틀림없다. 헌데 왜? 아무 반응도…. 반응? 혹시?’
그리고는 생각에 잠겨있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피리를 발동하던 기운을 회수했다. 동시에 주작의 사신결을 이용해 기운을 흘려보냈다.
그 순간.
화아악-
또 한 번 피리에서 지도가 투영되어 나오더니 허공에서 반짝였다.
조금 전과 동일한 지도의 모습. 하지만 준혁은 외형만 같을 뿐 지도를 이루고 있는 기운 자체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고.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파앗-
그 순간, 준혁이 적마를 사용했을 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파앗-
갑작스러운 이동에 준혁은 시야가 반전됨과 동시에 몸을 석화시키며 귀원패를 발동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는 천천히 시야를 넓히며 강제 전송돼버린 지역을 눈에 담았다.
“용암?”
명왕지보가 발동되며 이동된 장소.
그곳은 붉은 용암이 흐르는 장소였는데, 곳곳에 세워진 절벽이 용암을 피해 운신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준혁이 이동된 곳도 그런 절벽 중 하나였는데, 겨우 한두 발짝 움직일 만큼 좁았다.
다만 이런 곳이 화기를 다루는 봉황족에게 도움이 될법하긴 했으나, 금지로 취급받을 만큼 중요한 장소로 보이진 않았다.
“설마….”
그 모습에 준혁을 다시 한번 피리를 발동시키며 지도를 투영시켰다.
그리고는 지도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를 파악했다.
“이 지도…. 열쇠가 아니라 이동 수단이었구나.”
지도 한쪽에 표시된 용암과 절벽이 그려진 장소. 이동 직전 준혁이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댄 위치였다.
잠시 후, 명왕지보의 운용방식을 깨달은 준혁은 지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다가, 사람이 살기 적당해 보이는 장소, 지도에 표시된 나무와 집이 표시된 장소로 손을 가져갔고.
파앗-
다시 모습을 감추며 사라져 버렸다.
***
“대단하구나…. 이 지도 안에 공간의 좌표를 심어놓은 거란 말인가?”
또다시 이동된 준혁은 손에 쥔 피리를 내려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예상대로 명왕지보라는 이름의 피리 법기는 지도상의 원하는 장소로 이동시켜주는 기물.
지금껏 신비한 공능을 가진 물건을 많이 접해본 준혁도 놀랄 만한 기능이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법기의 기능에 관해 연구해보고픈 마음을 억누른 준혁은 곧장 주변을 살피며 인기척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푸른 나무로 뒤덮인 공간과 그 안에 보금자리처럼 자리한 집터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한번 피리 법기를 발동한 준혁은 지도에서 우지가 머물 만한 장소를 찾아 이곳저곳 이동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붉은 수정이 자리한 위치까지 이동해 왔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후에야 왜 이곳이 봉황족의 금지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 같은 높은 제단.
제단 꼭대기엔 사람 몸통만 한 붉은 수정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순수한 화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정인가?”
흑마지 안에서 구했던 진마정과 비슷한 수준의 순수한 기운이 담겨있는 수정체의 모습에 준혁은 몸이 잘게 떨려옴을 느꼈다.
동시에 명왕이 말한, 삼선 이후에 이곳에서 수련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보물을 이용해 수행을 올렸으니, 그동안 다른 종족보다 우월함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
바스락-
그때, 준혁의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가 재빠르게 주변을 경계하며 기감을 퍼트리자. 어디선가 중후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댄 누구신가? 이곳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데, 어찌 이곳에 올 수 있었지?”
목소리의 실린 힘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준혁은 몸을 보호하며 당장이라도 출수할 수 있게 기세를 돋구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땅을 박차 제단 아래로 내려갔고, 멀리 보이는 인물을 향해 다가갔다.
“혹, 우지 선사 되십니까?”
“그렇네만. 자넨 누구지? 명왕의 후손은 아닌 듯한데? 어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지?”
우지는 진선과 규선의 경계에 머물러있는 강자였는데, 얼굴을 절반쯤 가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노인이라고 하기엔 건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몸을 살짝 꾸부정하게 서 있는 것은 영락없이 나이 든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준혁은 그가 경계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저는 명왕의 부탁을 받아 이곳을 방문한 최가라고 합니다.”
“명왕의 부탁? 그럼 이곳을 방문할 수 있었음에도 여태껏 문을 걸어 잠갔던 건가?”
“그게 아니옵고….”
꽤 오랜 시간 강제로 갇혀있었던 것이 원통했는지, 우지는 신경질적으로 준혁의 말을 받았다.
그에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준혁은 현재 금지를 드나들 수 있는 열쇠가 사라져 아무도 왕래할 수 없고, 자신은 적마의 능력으로 온 것이라 해명했다.
기분 나쁜 눈빛으로 준혁의 설명을 듣던 우지는 적마라는 이름에 눈을 번뜩이더니 준혁의 말을 끊었다.
“자네 지금 적마라고 했나?”
‘설마, 그와 원한이 있던 자인가?’
적마와 원수지간인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준혁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그 순간.
우지는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얼핏 느껴지는 기운으로 석두의 석화 능력과 비슷한 힘을 사용한다 여겼는데, 적마라니. 혹 그댄 다중 계약자인가?”
중괴를 제외하곤 아무도 수행조차 꿰뚫어 보지 못했던 준혁. 자신의 마선기를 상대가 알아보자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사실을 꺼냈다.
어쨌든 우지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기에, 괜한 오해를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단번에 알아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예. 저는 적마와 석두 그리고 귀원패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과 계약을 통해 동화한 것이 아닌,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힘을 빌리고 있기에 계약이란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다른 형식으로 힘을 빌려?”
“예, 그것까진 제가 가진 밑천이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혹시나 원한 관계가 있을지 모르기에, 준혁은 적당히 식아의 능력을 포장하며, 마선들과 직접적인 친분은 없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 질문이 나올 거라 예상하면서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답변에 빈틈이 없도록.
피슉-
하지만 그 순간,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지로부터 황금빛 실이 뇌전보다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날아왔다.
황금빛 실은 그의 눈에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정확히 준혁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준혁 역시 방어태세를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기에 실이 몸에 닿기도 전, 전면에 육각 타일을 만들어내 방어했다.
팅-
그러자 위력 자체는 별로인지 황금빛 실은 귀원패의 능력에 간단하게 막히며 상공으로 반사돼 날아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왜?!”
하지만 반사돼 날아갔다고 생각했던 황금빛 실은 허공에서 직각으로 여러 번 꺾이더니 다시 준혁을 향해 벼락처럼 떨어졌고.
파바바방-
준혁은 의지를 일으켜 육각 타일로 이루어진 구체를 만들어 모든 방위를 완벽히 차단해 버렸다.
그러자 우지는 비웃듯 피식 웃으며 영기파동을 퍼트렸다.
그 파동에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날리며, 그의 황금빛 눈에서 수백 가닥의 황금빛 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해보자는 건가?’
우지의 태도에 준혁 역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상대를 상대해야 하나 고민하며 기운을 움직이려는 찰나,
부르르-
오랜만에 단(丹) 안에서 요동치는 식검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단 하나.
“설마, 당신도 마선입니까?”
그리고 준혁의 입에서 마선이란 단어나 나온 순간, 상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수백 가닥의 황금빛 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주변으로 퍼져나가던 영기파동이 잠잠해지며, 그의 머리카락이 안정을 되찾은 듯 살포시 내려앉았다.
***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던, 아니, 우지의 공격에 준혁이 방어로 응수했던 상황이 멈추자 주변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고요함은 우지의 비웃음으로 깨져나갔다.
“새삼스럽게 왜 그럴까? 아! 이제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시겠다?”
우지의 목소리에 담긴 악감정에 준혁은 그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태백랑, 명왕과의 대화가 떠올랐고, 왜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는지 깨달았다.
‘나를 천신라가 보낸 것이라 생각한 것이구나.’
마선을 거느린 천신라로부터 도망친 우지. 그리고 한동안 아무도 왕래한 적 없던 금지에 들어선 마선.
물론 준혁은 자신을 마선이라 생각한 적 없지만, 중괴의 말대로 남들은 마선이라 여길 게 분명했다.
우지를 설득해 그의 도움을 얻으려고 했던 준혁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끼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오해십니다. 명왕의 전언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선사께서 선마궁주를 피해 도망쳐왔다는 것을. 허나 결단코 저는 천신라의 수하가 아닙니다.”
준혁의 말엔 진심과 호소력이 담겨있었지만, 우지의 눈엔 가소롭게만 비칠 뿐이었다.
“개소리를 하는군,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지 내가 마선인 건 어찌 알았나?”
“그건….”
“명왕을 비롯한 팔왕 중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것을 자네가 어찌 알았냐 이 말이네.”
‘그러고 보니 식아가 바로 반응한 게 아니라, 저자가 능력을 사용한 후에야 식욕을 드러냈구나.’
준혁은 어떤 변명으로도 상대의 의심을 지울 수 없음을 느끼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규선에 오른 팔왕조차 마선임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자신의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정말 아무도 모른단 말입니까?”
“누가 아무도 모른다고 했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지?”
“아….”
준혁에게 호의를 가진 태백랑이 정보를 전해주지 않은 걸 보면, 아마 우지가 마선이란 것은 명왕만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우지가 비웃음을 던졌다.
“자 이제 말해보게. 천신라 그 망할 놈의 작자가 나를 어찌하라고 했나? 설득하라고 시키던가? 아니면 잡아 오라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우지의 눈빛엔 가소롭다는 듯한 감정이 가득 실려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 준혁은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구나….’
준혁의 눈빛도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